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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항공우주 연구의 메카 NASA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과 옛 소련은 군사력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전쟁을 계속했다. 핵폭탄과 수소폭탄의 개발 경쟁, 이를 지구 어디에든지 투하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개발 경쟁 등이 바로 그것이다. 1950년대 중반 두 나라는 핵폭탄과 수소폭탄을 보유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개발이었다.

인공위성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가운데 그 부산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상징성은 매우 컸다. 인공위성을 쏠 수 있다는 것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아가 전인미답의 우주를 점령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올리려고 착실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옛소련의 손을 먼저 들었다. 1957년 10월 4일 옛소련은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83.6kg)를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개발기술이 앞선 것을 뜻했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은 옛소련이 우주에서 핵무기로 공격해 오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미국이 옛소련에 뒤진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미국은 원래 국제지구관측년(1957-1958)인 1957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소형 과학위성을 발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공군, 육군, 해군의 주도권 다툼으로 효과적으로 진행하지 못했다. 최초의 위성을 발사하려 했던 해군의 밴가드 계획은 로켓 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발사 일정이 늦춰졌고, 게다가 1957년 12월 6일에 발사한 첫위성도 실패했다.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은 독일 출신의 폰 브라운 박사가 개발한 육군의 주피터 로켓에 의해 1958년 1월 31일에 발사됐다. 익스플로러 1호(13.97kg)는 지구 주위에 양성자와 전자로 이뤄진 방사선 벨트(반알렌대)를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옛소련의 첫위성과는 현저한 무게차이를 보였다. 미 공군이 1958년 발사한 토르-에이블로켓은 발사한지 77초만에 폭발하고 말았다. 그 사이 옛소련은 스푸트니크 2호(라이카 탑승, 508.3kg)를 쏘아올렸다.

따라서 미국은 보다 효과적으로 우주개발을 하기 위해 육해공군의 연구소를 통합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미소간의 냉전관계가 더욱 악화되지 않도록 군을 배제한 민간우주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NASA는 1958년 10월 1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발족했다. 초대 소장(징관급)은 예일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으며, 해군수중음파연구소 소장을 지냈던 케이스 글레넌(당시 53세)이 맡았다. NASA의 조직은 1915년 절립된 국가항공자문위원회(NACA)로부터 물려받은 랭글리항공연구소(1918년), 에임스항공연구소(1940년), 루이스비행추진연구소(1941년)등 3개 연구소가 주축이 됐다.

출범 당시 NASA의 직원은 8천명이었고, 연간예산을 1억달러. 40년이 지난 1998년 NASA늬 직원은 약 20만명(정규직은 약 2만명), 예산은 136억 달러(우주과학 21억달러, 지구과학 14억달러, 유인우주계획 및 우주개발 58억달러, 항공우주기술개발 13억달러, 기타 30억달러로 최근 매년 2억달러 정도 삭감되고 있음)에 이른다. NASA가 아폴로계획을 추진할 때는 직원은 40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1958년 1월 익스플로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자 제트추진연구소 피커링소장, 반 알렌 박사, 폰 브라운 박사가 주피터 로켓 모형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2. 미국 최초의 유인우주선 머큐리 계획

1958년 10월 5일 NASA는 탄생한 지 5일만에 인간을 우주에 보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최초의 유인우주선 계획 이름은 머큐리(Mercury). 미국은 이를 통해 옛소련에 의해 구겨졌던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계획이 너무 위험하다고 보고, 1-2번 유인비행을 한 후 포기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인비행이 시작될 무렵, 젊고 패기있는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성되면서 머큐리계획은 제미니계획과 아폴로 계획으로 이어졌다.

1959년 미지의 우주로 나갈 7명의 우주비행사들이 선발됐다. 선발기준은 우선 테스트 파일럿(비행기를 개발했을 때 처음 시험하는 베테랑 비행사) 출신이어야 하고, 나이는 40세, 체중은 82kg, 키는 178cm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NASA는 아무도 겪어보지 않은 우주환경에 인간이 처음 도전한다는 것을 감안해, 무인로켓 발사, 동물실험 등을 통해 안정성을 확인해 갔다. 이 과정에 두마리의 원숭이(샘과 미스샘), 한마리의 침팬지(에노스)가 궤도비행에 성공했다. 햄은 레버를 잡아당기는 것과 같은 단순한 작업도 했다고 한다.

1인승 머큐리 우주선에는 모두 6명이 탑승했다. 비행시간을 모두 합치면 비록 2일 6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주선을 안전하게 설계하고 무중력에서 인간이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머큐리 계획에는 55개월의 시간이 걸렸으며, 7300개의 제조회가와 200명 이상의 전문가들이 매달렸다. 전체 경비는 약 4억달러가 들었다.

3. 달을 향한 일보 전진 제미니계획

1961년 존 F 케네디는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어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머큐리(자유 7호)에 탑승한 엘런 세퍼드 2세가 미국 최초로 준궤도비행에 성공하자, 20일 뒤인 5월 25일 의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미국은 앞으로 10년 내에 사람을 달에 착륙시키고, 지구로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목표를 달성한다"는 공언이었다. 이후 NASA의 목표는 모두 여기에 맞춰졌다.

그러나 당시 NASA는 겨우 15분 정도의 비행경험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NASA는 장기간의 우주비행 경험을 쌓고, 랑데부와 도킹하는 기술을 습득해야 했다. NASA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명의 우주비행사와 14일 동안 우주비행할 수 있는 우주선을 개발하기로 했다.처음에는 머큐리 마크 2로 불렀는데, 1962년 1월 3일 정식으로 제미니라 명했다. 제미니는 2번의 무인발사를 거쳐 1965년 3월 23일 머큐리호에 탔던 버질 그리솜(선장)과 존 영(나중에 우주왕복선의 첫선장이 됨)을 싣고 첫 우주여행에 나섰다.

제미니의 우주활동은 우주유영, 랑데부와 도킹,등 장기간 우주생활 등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본격적인 우주여행을 하려면 인간은 안락한 캡슐에서 나와 혹독한 우주 환경에 맞서 우주선을 수리하거나 우주작업을 해야 한다. 따라서 우주선 밖을 나오는 유영(선외우주황동)은 위험하지만 필수적인 일이다.

제미니 4호의 에둬읃 화이트는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주유영에 도전했다. 화이트는 우주선과 함께 시속 2만9천km로 21분 동안 지구를 돌았다. 당시 우주의 아름다운 광경에 매료됐던 화이트는 우주선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내 일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후 화아트는 1967년 1월 26일 아폴로 1호 발사시험에 참가했다가 화재사고록 사망했다. 제미니계획에는 4명의 우주비행사가 총 4시간 동안 우주산책을 했다.

제미니 10호에 탑승했던 조종사 콜린스만은 4개월 전에 발사된 에너지에 접근해 실험장비를 회수했다. 이것은 다른 궤도에 있는 물채와 접촉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제미니는 조종사가 직접 조종한 최초의 우주선이었다. 이들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하며 다른 궤도를 돌고 있는 표적물과 랑데부(접근비행)도 하고 도킹(연결)도 했다. 이러한 기술은 인간을 달에 보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제미니는 랑데부와 도킹을 9번이나 성공시켰다. 제미니 11호에는 표적위성과 밧줄로 맨 상태에서 회전함으로서, 원심력을 이용해 우주에서 처음으로 인공중력을 만들었다. 이때 측정된 중력의 세기는 지구의 약 0.00015배 정도였다.

제미니의 가장 크 성과는 달탐사에 필요한 기간(6-8일)동안 인간이 우주에서 생존할 수 있냐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제미니 7호는 13일 18시간 동안 지구를 돌았는데, 이는 달나라를 갔다오는데 필요한 시간의 2배에 이른다, 따라서 제미니계획은 달탐사의 가능성을 한층 앞당겨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제미니는 1964년부터 1966년까지 타이탄로켓으로 모두 12번 발사됐으며, 16명(4명은 두번 탑승)이 탑승했다.

1966년 11월 15일 발사된 제미니 12호싸지 여기에 투입된 돈은 11억달러. NASA는 제미니계획을 통해 옛소련에게 졌던 빚을 갚게 된다. 총 유인비행수는 옛소련의 2배, 비행시간은 3,5배에 이르게 된것이다.
 

암스트롱이 달에서 촬영한 올드린


4. 인간 최초의 달 착륙 아폴로계획

미 항공우주국이 탄생한 이래 가장 큰 업적은 인간의 달착륙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커뮤리계획과 제미니계획을 통해 작실하게 노하우를 쌓아왔다. NASA의 달에대한 도전은 데미니 계획이 끝나고 불과 2개월만에 이뤄졌다. 그러나 나무 서두른 탓인다 1967냔 1월 발사준비를 하던 아폴로 1호가 화재로 불탔다. 이 과정에서 버질 그리곰, 에드워드 화이트, 로저 채피 등 3명의 우주비행사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아폴로계획은 당초 목표대로 진행됐다. 3번의 무인로켓 발사와 4번의 유인우주선 시험비행을 거쳐 마침내 1969년 7월 20일(한국시간 7월 21일 오전 5시 17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이것은 인간이 지구 이외의 천체에 첫발을 내딛는 대사건이었다. 첫 월인(月人)이 된 암스트롱은 아폴로 11호 달착륙선의 발이 붙어있는 명판을 읽으면서 1961년 케네디대통령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1969년 7월 이곳에 인간이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다. 우리들은 모든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이곳에 왔다."

아폴로계획은 사고를 일으킨 13호를 포함해 17호까지 모두 11회의 유인비행이 있었다. 이중 24명의 우주비행사가 달궤도를 돌았고, 12명이 달표면을 밟았다.

달에 착륙한 우주비행사들은 월석을 가지고 돌아왔다. 지구에 저절로 떨어지는 유성을 제외하고 외계물질이 반입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반입한 암석과 토양의 양은 3백85kg으로 돈으로 환산하면 1kg당 9억원 정도가 된다. 월석은 달의 형성비밀을 푸는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아폴로 15호에 탑승했던 제임스 어윈이 가져온 돌은 지구와 달이 형성되던 때의 돌로 '창세기의 돌'이란 별명을 얻었다.

처음 아폴로에는 걷는 것말고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다. 그런데 아폴로 15호부터 월면차가 등장해 우주비행사들의 활동영역을 10-20km로 크게 넓혀주었다. 배터리로 움직이는 이 전기자동차는 피아노선을 엮어 바퀴를 만들었으며, 시속 11km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월면차를 처음 탔던 제임스 어윈은 "발버둥치는 야생마나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보트를 타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아폴로계획이 추진되던 기간은 NASA 40년 역사 속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9년 동안 2백39억 달러를 투여했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 예산의 23배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돈이었다. 참여인원만 해도 40만명에 이르렀다.

5. 우주실험의 산실 스카이랩

아폴로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NASA는 아폴로계획에서 사용하다 남은 로켓과 우주선을 개조해 우주실험실을 만들었다. 스카이랩은 새턴 5호 로켓의 3단로켓을 개조해 3명의 우주비행사가 동시에 머물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그 안에 각종 실험시설을 갖추었다. 길이 17.5m, 지름 6.7m. 총무게 74.7t. 내부 공간의 크기 2백70㎥의 거대한 우주실험실이었다. 실험실의 바닥과 천장은 격자모양으로 돼 있어, 공중에 떠있는 우주비행사들의 신바닥에 있는 멈춤쇠를 걸어 몸을 고정시킬 수 있었다.

방문계획은 아폴로 캡슐이 3대 남아 있기 때문에 3회로 한정됐다. 스카이랩은 1973년 5월 14일 무인발사되고, 5월 25일부터 11월 16일까지 1백71일 동안 9명의 우주비행사들이 이용했다.

스카이랩에는 승무원들이 장기간 거주해야 하기 때문에 특별한 시설들이 필요했다. 벽에 매달린 개인용 고정침날, 냉장고와 72가지의 식단, 화장실, 무중력공간에서 칼슘의 손실과 근력의 저하를 막기 위한 운동기구, 샤워시설(쓰고 나면 1시간 동안 공중을 떠도는 물을 찾아 빨아들여야 한다)등을 갖추고 있어 마치 우주호텔 같았다.

NASA는 무중력환경인 스카이랩에서 실험할 내용을 공개모집해 25가지를 골랐다. 그 중에는 주더스라는 여학생이 제안한 "무중력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어떻게 칠까"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이 실험을 위해 탑승한 '아라벨라'와 '아나타'란 거미는 처음에는 제대로 집을 짓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무중력에 적응해 훌륭하게 집을 지었다. 하지만 6마리의 생쥐와 쇠파리는 우주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었다.

스카이랩의 최대 실험은 우주비행사 자신을 관찰하는 일이었다. 장기간 우주에서 생활하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이 연구에서 육체적인 변화 못지않게 정신적인 요소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스카이랩 3호의 우주비행사들은 쉴틈없는 스케줄에 불만을 품고 짧게나마 파업을 하기도 했다.

스카이랩의 중요한 성과 중에는 태양관측과 지구관측이 있다. 스카이랩에서는 18만장 이상의 태양사진을 찍었으며, 지구관측을 통해 석유와 광석이 매장된 곳을 발견하기도 했다. 스카이랩은 승무원들이 철수한 후에도 5년 동안 지구궤도를 돌다가 1979년 7월 11일 대기와의 마찰로 산산이 부숴져 인도양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에 떨어졌다.

6. 냉전시대 최대의 사건 아폴로-소유즈 도킹

1972년 5월 미국의 닉슨대통령은 옛소련을 방문해 코시긴 수상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양국은 냉전시대의 데탕트(긴장완화)를 조성하기 위해 공동우주실험협정을 체결했는데, 이것이 아폴로-소유즈 시험계획(ASTP)이다.

아폴로-소유즈 시험계획은 양국 우주선의 도킹, 인공일식에 의한 태양관측 등 33종의 실험이 계획됐다. 양국의 우주선에 적합한 도킹장비와 기술을 마련하는 것은 우주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상호 구조를 위한 예비훈련이기도 했다. 아폴로와 소유즈의 도킹장치는 단순히 서로의 우주선을 껴맞추는 일은 아니었다. 미국과 옛소련의 우주비행사들은 다른 종류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승무원들은 정상 기압의 3분의 1인 저기압 상태에서 순수 산소로 호흡하고 있었고, 옛소련 승무원들은 정상기압에서 지상의 공기와 같은 질소와 산소로 배합된 공기를 호흡했다. 따라서 낮은 기압에 적응한 아폴로 승무원이 3배나 기압이 높은 소유즈 우주선에 들어가면, 마치 잠수부가 기압이 높은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난다. 반대로 소유즈 승무원이 아폴로로 건너가면 잠수부가 물위로 떠올라오는 것과 같아, 잘못하면 혈액 속에 녹아 있던 질소가 거품으로 변해 잠수병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도킹장치에는 서로의 기압에 적응할 수 있는 완충장치가 필요했다. 아폴로에서 소유즈로 가기 위해서는 25분 정도, 소유즈에서 아폴로로 가기 위해서는 약 2시간을 이 완충장치에서 보내야 했다.

1975년 7월 15일 2명의 승무원을 태운 소유즈 19호가 바이코누르우주기지에서 발사됐고, 7시간 뒤 3명이 탑승한 아폴로 18호가 케네디우주센터를 떠났다. 이들은 7월 17일 2백25km 상공에서 역사적인 첫 도킹에 성공했다. 도킹이 일어난지 3시간 후 아폴로 18호의 토마스 스태퍼드선장이 먼저 소유즈를 방문했다. 상호 방문은 4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44시간 뒤 두 우주선은 분리돼 공동우주계획의 하이라이트인 인공일식실험을 실시했다.

인공일식실험은 큰 아폴로우주선이 태양 쪽에 있고, 작은 소유즈는 아폴로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인공일식을 만들고 소유즈에서 태양을 관찰하는 실험이다. 이것은 마치 달(아폴로)이 지구(소유즈)로 가는 태양 빛을 가리는 일식현상과 같다. 두 우주선의 거리는 약 1백50m였고, 일식시간은 32분이었다. 인공일식을 통해 태양의 코로나 현상을 관찰했다.

인공일식실험을 마친 두 우주선은 다시 결합해 이별을 고하고 각각 지구로 귀환했다. 소유즈는 7월 21일 카자흐스탄 근처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갔고, 아폴로는 3일 동안 우주에서 머물다 태평양으로 떨어졌다. 아폴로-소유즈의 도킹을 끝으로 NASA의 유인우주계획은 우주왕복선이 완성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1974년 2월 마지막 거주했던 우주비행사들이 지구로 귀환하면서 촬영한 스카이랩


7. 우주왕복선 우주 왕래 시대 개척

우주개발과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로켓은 한번밖에 쓰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러번 사용함으로써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개발한 로켓이 우주왕복선이다. 우주왕복선은 1972년 1월 개발되기 시작해 10년 뒤인 1981년 4월 12일에 결실을 맺었다. 이날 2명의 우주비행사를 태운 최초의 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가 발사된 것이다. 우주왕복선은 이보다 일찍 우주무대에 등장할 수도 있었다. 미국은 원래 X-15와 같은 비행기로 우주를 비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옛소련이 1회용 로켓으로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와 최초의 유인우주선인 보스토크 1호를 쏘아올리자, 미국도 방향을 틀었다. X-15를 개발하기 위해 막연히 시간을 보내기보다 손쉬운 1회용 우주로켓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달착륙으로 미국이 옛소련을 앞서게 되자, 그동안 정치적 논리에 의해 집행됐던 막대한 예산이 공격을 받게 됐다. 즉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NASA는 폐기했던 과거의 파일에서 활공형 우주선인 우주왕복선을 부활시켰다.

길이 37.2m, 높이 17.25m, 무게 72t인 우주왕복선의 궤도선은 한번에 27t의 화물을 실을 수 있다. 우주왕복선은 그동안 사용하던 로켓보다 천천히 지구궤도에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허블우주망원경과 같은 크고 약한 구조물을 지구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우주왕복선은 81년에 두번, 82년에 3번, 83년에 4번, 84년에 5번 등 매년 발사횟수를 늘려갔다. 85년에는 9번을 발사했다. 그러나 무리였던지 1986년 1월 28일 7명의 승무원을 태운 챌린저호가 발사한지 1분 13초만에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우주왕복선 발사를 2년동안 멈추게 만들었다. 우주왕복선 발사는 1988년 9월 29일 디스커버리호에 의해 재개됐다. 지금까지 우주왕복선은 91번 발사됐으며, 총 5백29명이 탑승했다. 우주에서 보낸 시간은 7백 83일이며, 1만2천3백53번 지구를 돌았다.

그동안 우주왕복선이 했던 일 중에서 특기할 만한 일은 인공위성 회수와 수리이다. 마치 고속도로에서 고장난 자동차를 출장수리해 주듯, 우주왕복선은 고장난 인공위성을 찾아가 현장에서 수리해 주듯, 우주왕복선은 고장난 인공위성을 찾아가 현장에서 수리해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허블우주망원경도 이런 출장수리 서비스를 몇차례 받은 바 있다.

또 우주왕복선은 그동안 조종사들만 탈 수 있는 우주여행의 문호를 비조종사들에게도 개방했다. 우주왕복선은 최대 10명의 승무원과 다양한 화물을 우주로 보낼 수 있다. 그래서 우주에서 실험을 하고자 하는 과학자를 실험장치와 함께 실을 수 있었다. 일본, 프랑스 등의 국가들은 돈을 내고 우주왕복선을 임대해 생명과학 실험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주왕복선 역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현재 무게 1파운드(0.4536kg)당 1만달러라는 고비용이 들기 때문에 경제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차세대 우주왕복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1파운드당 1천달러 수준의 우주왕복선.

지난 1996년 7월 개발되기 시작해 2004년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벤처스타'도 그중 하나이다. 현재의 우주왕복선은 2분의 1만 재사용하는 우주왕복선이다. 즉 발사체는 1회용이란 뜻이다. 그러나 벤처스타는 100% 재사용할 수 있는 우주왕복선으로 비행기에 추진체만 갈아넣으면 된다.

8. 파이어니어와 보이저

NASA의 임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태양계 탐사다. NASA는 1963년 태양계 바깥으로 탐사선을 보내는 그랜드투어(grand tour) 계획을 발표했다. 이 구상은 1백75년만에 생기는 천체의 움직임 때문에 수립된 것인데, 1976년과 1980년 사이에 태양계 행성 가운데 화성의 바깥쪽을 도는 4개의 외행성이 비스듬한 일직선상에 놓인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행성의 중력을 이용하면 단 1개의 탐사체로 모두를 탐사할 수 있던 절호의 배치였다.

NASA는 본격적인 그랜드투어에 앞서 파이어니어 10호와 11호를 발사했다. 1972년 3월에 발사된 파이어니어 10호는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수많은 소행성 장애물을 뚫고 1973년 12월 목성을 탐사했다. 현재 (1997년 12월 기중) 파이어니어 10호는 지구로부터 1백억km(지우과 태양 사이의 거리의 약 67배)떨어져 있으며, 2백만년 후에는 황소자리의 눈에 해당하는 알데바란에 도착할 것이다.

1973년 4월에 발사된 파이어니어 11호는 1974년 11월 목성을 탐사하고, 1979년 9월 토성을 탐사한 후 독수리자리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다만 1995년 11월 통신이 두절됐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는 파악이 안되고 있다.

1977년 7억 8천만달러를 들여 발사한 보이저 1호와 2호는 NASA의 야심작이었다. 9월 5일 발사된 보이저 1호는 1979년 3월 목성을, 1980년 11월 토성을 탐사했다. 8월 20일 발사된 보이저 2호는 1979년 7월 목성을, 1981년 8월 토성을, 1986년 1월 천왕성을, 1989년 8월 해왕성을 탐사했다.

두대의 보이저는 천왕성과 해왕성의 자기권을 발견하고, 22개의 새로운 위성(목성 3, 토성3, 천왕성 10개, 해왕성 6개)을 찾아냈다. 또 지구보다 큰 목성의 위성 이오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발견했으며, 트리톤에서는 온천과 같은 것이 분출되는 것을 보았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목성의 고리 또한 이때 발견됐다. 이들이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을 찍어 보낸 사진은 10만장에 이른다.

보이저 1호는 1998년 2월 파이어니어 10호를 앞질러 태양계에서 가장 먼 우주선이 됐으며, 현재 5억 km/년의 속도로 땅군자리 (적경 262도, 적위 12도)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보이저 2호는 4억7천만km/년의 속도로 남반구 큰부리새자리(적경 338도, 적위 =62도)를 향하고 있다.
두대의 보이저에는 지구인의 목소리를 담은 금제 음반이 실려 있다. 그 속에는 59개국의 언어와 고래의 언어(혹시 물 속에서 사는 외계인이 발견할지 모르니까)로 된 인사말, 입맞춤과 어린이 우는 소리, 사랑을 나누는 젊은 여성의 뇌전도 기록. 우리의 과학과 문명 등을 알리는 1백16개의 부호화된 그림, 최고 히트곡들이 들어있다.

파이어니어와 보이저에서 쌓은 기술은 갈릴레오와 카시니 발사의 토대가 됐다. 또 파이어니어와 보이저에 담긴 지구인의 메시지는 언젠가 외계인에게 전달될 것이다.

인간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행성은 화성이었다. NASA는 1964년과 1969년에 마리너 4호,6호,7호를 화성에 접근시켰다. 1971년 발사된 마리너 9호가 화성궤도를 선회하면서 7천3백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들 사진을 통해 화성의 비밀은 밝혀지기 시작했지만, 화성생명체에 관한 궁금증은 점점 증폭돼 갔다.

NASA가 10억 달러를 들여 세운 바이킹 계획은 화성생명체의 존재 유무를 확실하게 밝히자는데 있었다. 원래 세워졌던 계획에 따르면 새턴 5호 로켓으로 발사하는 거대한 착륙선이었다. 그러나 예산삭감으로 우주선의 크기는 작아졌다. 이름도 '보이저' 에서 화성을 침공하는 해적을 뜻하는 '바이킹'으로 바뀌었다.

NASA의 제트추진연구소와 랭글리연구소가 공동설계한 바이킹은 궤도를 도는 궤도선과 직접 화성표면에 떨어지는 착륙선으로 구성돼 있다. 착륙선은 화성을 '지구 박테리아'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살균소독됐다. 사고를 대비해 2대가 제작됐는데, 1호는 1975년 9월 9일에, 2호는 같은 해 8월 20일에 발사됐다.

바이킹 1호는 이듬해 6월 19일 화성궤도에 도착했으며, 착륙선은 7월 20일 크리세 평원에 내려 앉아 6년반 동안 화성에 대한 정보를 지구로 보내왔다. 바이킹 2호는 1976년 8월 7일 화성궤도에 도착했으며, 착륙선은 9월 3일 유토피아평원에 내려앉아 3년반 동안 활동했다.

바이킹 착륙선은 화성생명체를 찾아내기 위해 착륙지역의 토양을 가지고 3종류의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 결과 활발한 화학적 활동이 전개되고 있음이 밝혀졌으나, 이것이 생물의 활동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록 화성에서 생명체의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바이킹 착륙선과 궤도선은 5만장의 사진을 촬영해 지구로 전송했다. 이를 통해 화성의 날씨 등 그 신비가 한꺼풀 더 벗겨졌다.

1980년대 이후 NASA는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값싸게, 좋게, 빠르게'(the cheaper, the better, the faster)라는 목표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첫번째 우주선이 1997년 7월 4일 바이킹 이후 21년 만에 화성을 '재침공한' 패스파인더이다.

바이킹은 설계에서 발사까지 8년이 걸렸으며 비용도 30억달러(97년 기준)가 들었다. 하지만 패스파인더의 개발은 3년밖에 걸리지 않은데다가 비용도 2억 5천만달러에 불과했다. 비행기간도 바이킹은 11개월이 걸린 반면 패스파인더는 7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패스파인더가 짧은 연구기간 동안 저렴한 비용으로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가지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패스파인더는 궤도진입 후 선회없어 곧장 대기권에 진입했고, 착륙에는 역추진로켓 대신 에어백을 사용했다. 결국 패스파인더는 착륙시도에서 착륙까지 4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패스파인더 탐사에는 6개의 바퀴가 달린 '소저너'라는 탐사차가 종횡무진 화성땅을 누비면서 탐사활동을 펼쳤다. 고정형 탐사선이 아닌 이동형 탐사선을 보낸 것은 달탐사 이후 처음이었다. 1997년 10월 7일 착륙선의 신호가 끊어질 때까지 패스파인더는 1만 6천장의 사진과 토양분석자료, 대기관측자료를 지구로 보내왔다. 앞으로 NASA는 2년에 한번씩 탐사선을 화성에 보낼 예정이다.

9. 21세기는 국제협럭의 시대 국제우주정거장

지난 40년 동안 NASA는 독자적으로 모든 우주계획을 수립해왔다. 그러나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국제적인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NASA는 미국의 항공우주기관에서 세계 항공우주개발의 메카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계획이 국제우주정거장(ISS)이다.

우주정거장을 건설하려는 NASA의 계획은 1982년부터 추진됐다. NASA는 우주 환경을 이용하고 달과 행성을 탐사하기 위한 중계기지로서 우주정거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은 10년 이내에 우주정거장을 건설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미국의 힘만으로 엄청난 예산을 감당하며 우주정거장을 건설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1992년 미국은 유럽우주기구 산하 11개국(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캐나다, 브라질, 그리고 10년이 넘게 우주정거장을 운영해온 러시아를 끌어들여 국제우주정거장 계획을 수립했다. 국제우주정거장의 이름은 '알파'로 정해졌다.

국제우주정거장 알파계획은 3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는 1994년부터 1997년까지로 미국의 우주비행사들이 러시아(옛소련)의 미르에 방문에 우주생활의 노하우를 습득하고, 우주왕복선과 미르가 도킹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2단계(98-99년)는 1단계에서 제작한 알파의 기초적인 구조물들을 4백35km의 지구궤도상에서 조립한다. 오는 11월 20일에는 최초의 알파 구조물인 '자르야'(화물선 기능의 모듈)가 러시아 프로톤 로켓에 의해 발사될 예정이다.

3단계가 끝나는 2003년이 되면 7명이 생활할 수 있는 승무원 거주모듈, 미국, 일본, 유럽우주기구가 구축한 6개의 실험모듈들이 완성된다. 2004년 1월에 워용을 드러낼 국제우주정거장 알파는 가로 1백8m, 세로 74m, 무게는 4백20t에 이른다. 이를 위해 들어가는 돈은 약 3백조원이다.
 

199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정홍철
  • 채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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