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팡이가 인체에 침입해 일으키는 질병은 무척 다양하다. 누구나 흔히 겪는 가벼운 피부 알레르기는 물론이고, '20세기의 흑사병'으로 불리는 에이즈 환자에게 가장 많은 죽음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곰팡이가 공격하는 신체 부위는 무차별적이다. 가장 많이 알려진 곰팡이의 목표는 피부를 비롯한 인체의 표면이다. 하지만 인체 내부에 침입해 세포를 파괴함으로써 만성적이고 치명적인 감염을 일으키는 종류도 많다. 내장은 물론 피하조직, 뇌, 그리고 뼈와 같이 거의 모든 조직이나 기관을 감염시킨다고 알려졌다. 단지 치아의 일부 조직만이 곰팡이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는다.
현재까지 질병의 원인이 뚜렷하게 밝혀진 병원성 곰팡이는 2백여종에 달한다. 하지만 지구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곰팡이가 사람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몸의 면역기능이 떨어지면 평소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던 곰팡이가 기승을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목동이 피부병에 많이 걸리는 이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가장 '고전적'이고 흔한 곰팡이 질환은 피부병이다. 피부에 질병을 일으키는 곰팡이 종류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곰팡이가 자랄 수 있는 조건인 기후, 주민의 영양 상태, 위생 상태가 지역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 곰팡이는 사람뿐 아니라 소, 개, 말, 쥐, 닭과 같은 동물을 감염시키기 때문에 이들과 가깝게 생활하는 목동이나 양계업자에게 많은 피부질병을 일으킨다.
필자가 1950년대 중반 10세 전후의 소년이던 시절, 학교에서 귀가하면 오후에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소를 몰고 강가에 나가 풀을 뜯게 한 목동이었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다 보니 위생이나 영양 상태가 좋을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에 기생하는 각종 곰팡이가 목동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목동의 대부분은 소버짐에 감염돼 보기에도 흉측스러웠울 뿐만 아니라 몹시 가려워 못견뎠던 기억이 있다. 또 동네의 깨끗하지 못한 이발소에서 소독되지 않은 이발기 때문에 까까중 머리 한복판에 허연 반점이 생긴 경험이 흔했다(기계충). 이런 모습은 당시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양상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지만 같은 곰팡이라도 인종에 따라 질병을 일으키는 정도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가벼운 피부병을 주는 곰팡이가 흑인에게는 쉽게 낫지 않는 심각한 염증질환을 일으키는 식이다.
곰팡이는 손, 발, 손·발톱, 사타구니, 항문 근처와 같이 다양한 곳에서 피부병을 일으킨다. 특히 여름철에 자주 볼 수 있는 무좀은 발가락 사이의 상처, 그리고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양말이나 신발 탓에 생긴다. 곰팡이 약이 많지 않던 시대에 무좀에 시달리던 사람이 페놀을 발라 피부를 태운 웃지 못할 사건도 이 짓궂은 곰팡이 때문에 생겼다.
건강한 사람도 안심 못해
곰팡이의 무서운 일면은 우리가 무심코 들어마신 공기를 통해 침입해 질병을 유발하는 점에 있다. 대표적인 예가 콕시디오이데스진균증(coccidioidomycosis)이다. 이 질병을 일으키는 곰팡이(Coccidioides immitis)는 흙먼지가 많이 날리는 토양에서 떠돌다 사람의 호흡기로 침입한다.
그러나 초기에는 병의 정도가 아주 약해서 평소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이 병에 걸렸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허파에 침입한 곰팡이는 수시간에서 수일 내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염증을 일으킨다. 그 결과 가슴이 답답해지고 기침을 심하게 하는 등 폐렴이나 결핵과 비슷한 증세가 나타난다. 심한 경우 혈액을 통해 곰팡이가 전신으로 퍼져 피하조직, 뼈, 관절, 내부 장기, 그리고 뇌에까지 질환을 일으킨다. 환자는 열과 오한에 시달리고 점차 쇠약해져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이 병은 기후가 건조해 바람에 먼지가 많이 날리는 지역에서 심하게 발생한다. 특히 흑인, 멕시코인, 필리핀인들과 같이 검은 피부의 인종에게 많이 생기는데, 여자에 비해 남자에게 높은 발병율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에게 직접 해를 미치는 곰팡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 보다 위협적인 존재는 평소에는 잠잠하다 사람의 몸이 약해져 면역기능이 떨어졌을 때 기승을 부리는 곰팡이들이다. 에이즈 환자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곰팡이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흔히 에이즈 환자가 사망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면역결핍바이러스(HIV)의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HIV는 에이즈를 일으키는 병원체일 뿐이다.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곰팡이다.
평화의 상징이 죽음의 사신으로
한가지 사례로 캔디다(Candida albicans)균을 살펴보자. 캔디다는 정상인의 입 안, 소화기, 그리고 여성의 질에 흔히 발견된다. 무서운 것은 평소에 별로 해를 미치지 않다가 사람이 에이즈나 암에 걸리거나 영양결핍에 의해 체력이 많이 떨어지면 세력을 급속하게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즉 캔디다균은 몸이 약해진 '기회'를 틈타 혈액을 통해 신체 곳곳으로 움직여 세포를 파괴시킨다.
에이즈 환자의 혀에 하얀 물질(백태)이 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캔디다균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증거다. 한편 여성의 경우 생식기에 존재하는 탓에 몸이 약해졌을 때 성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메주를 띄우고 막걸리 담그는데 애용되는 누룩곰팡이(Aspergillus)도 에이즈 환자에게는 두려운 존재다. 면역기능이 떨어지면 인체 내에서 거침없이 자라나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누룩곰팡이가 허파에 침입하는 경우 높은 열과 기침을 동반한 폐렴 증세가 나타나며, 뇌에서는 광범위한 괴양성 질병을 일으켜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게 만든다.
누룩곰팡이는 생존력이 강해 주변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특히 건물의 환풍장치나 불순물을 거의 제거한 증류수에서와 같은 미처 생각치 못한 곳에서도 생존한다는 점이 밝혀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도 조심해야 한다. 비둘기 똥에 존재하는 많은 수의 곰팡이(Cryptococcus neoformans)가 몸이 약해진 사람에게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이즈 환자에게 가장 위협적인 곰팡이는 평소 입 안에 상주하는 뉴모시스티스 (Pneumocystis carinii)라는 균이다. 면역기능이 떨어진 사람에게 치명적인 폐렴을 일으키는 곰팡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에이즈 환자의 사망원인을 조사한 결과 이 곰팡이 때문에 사망한 환자가 가장 많다는 점이 밝혀졌다. 외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천재가 아닌 인재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곰팡이성 질환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견되는 보통 곰팡이들이 주범임을 알 수 있다. 평소에는 온순하게 지내다 면역기능이 떨어지면 순간적으로 적으로 바뀐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기회성 병원균'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