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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덕후가 알려주는 입덕 가이드

정한결 네이버 카페 ‘엔레일’ 회원 ‘흔한철덕’

미국 드라마 ‘빅뱅이론’의 주인공 쉘든 쿠퍼는 유명한 철덕(철도덕후)이죠. 그는 비행기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린다 해도 철도를 탑니다. 철덕들은 가지각색의 이유로 철도에 빠져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철도 촬영부터, 철도 노선 연구, 물품 등 모형 수집, 노선 탐방, 심지어 엔진과 관련된 소리를 구분하는 등 다양한 덕후들이 한데 모여있습니다.

 

“지금 새마을호는 새마을호가 아냐”


너무나도 다양한 철덕. 이 중 옛날 철도 관련 물품을 모으는 청소년과 엔진 소리를 구분하는 어른을 7월 31일 경기도 의왕 철도박물관에서 만났습니다. 네이버 카페 ‘엔레일(Nrail)’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두 사람입니다. 15살 정한결 군(별명 ‘흔한철덕’)은 대전 하기중 2학년 학생이고, 31살 최현일 씨는 한국특허전략개발원 특허동향팀의 연구원입니다. 각각 8년 차, 21년 차 철덕이죠. 엔레일은 카페 회원 수가 2만 7416명으로(8월 8일 기준) 한국 최대 규모의 철도 동호인 카페입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걸까요.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자, 스파크가 튀었습니다. 현일 씨가 “너도 알지, 지금은 자주 볼 수 있는 기차인데”라며 스마트폰으로 찍은 철도 사진을 보여주면, 한결 군은 “아직 북한에는 3등 열차가 있는데”라며 티키타카가 이어졌습니다. 현일 씨가 “지금 새마을호는 새마을호가 아냐”라고 하자 한결 군은 “맞아요”하며 맞장구쳤고요.


한결 군은 전국의 간이역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어 왔는데요. 2년 전부터는 철도 관련 물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기차 레고 모형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온·오프라인 중고장터를 기웃거리면서 수집품을 모았다고 합니다. 한결 군 집의 다락방 사진을 보면 철도 수집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진을 인스타그램에도 올리고 엔레일 카페에도 올리고 있죠. 폐역이 되면 사유지로 변하기도 하는데, 땅 주인과 접촉해서 철도 관련 물품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고물상에 찾아가 물건을 둘러본 적도 있죠. 그렇게 그는 통표 케이스, 채송함, 박스 자물쇠, 좌석 안내판, 수신호 깃발, 역명판 등을 모았습니다.

 

 

보물 1호는 사라진 판대역의 명판


한결 군의 철도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간이역에서 찍은 사진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철도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가 목표입니다. 진정한 덕업일치의 삶을 꿈꾼달까요. 소장품 중 보물 1호를 묻자, 바리바리 싸들고 온 행선판 콜렉션 틈에서 1970년도쯤 만들어진 판대역의 명판을 가리켰습니다. 판대역은 사라진 역명인데, 현재는 경기도 양평에 있는 삼산역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래전에 제작된 만큼 지금은 볼 수 없는 특징이 있어요. 밑에 광고도 찾아볼 수 있죠.” 21년차 철덕인 현일 씨도 한결 군이 철도박물관에 가져온 각종 소장품을 보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와, 이렇게 모으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철덕의 분야가 이만큼 다르다는 거죠.


현일 씨도 한결 군에게 철도 에피소드를 이야기했습니다. 현일 씨는 2012년 마지막 PP동차 새마을호가 운행될 때쯤 ‘새마을호의 마지막을 보자’는 심정으로 수험공부를 포기(?)하고 부산 구포역에 있는 새마을호를 보러 갔습니다. 과거 새마을호에는 양 끝에 유선형 디젤기관차가 달려있었는데요, 엔진이 열차를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끄는 형태여서 PP(Push-Pull)형이라고 불렸습니다. 초반 가속이 더디고 경사로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2013년 1월 5일을 마지막으로 운행이 종료됐죠.


부산 지하철의 시민기관차 체험도 해봤습니다. 종점에서 열차를 멈출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이후 희귀한 열차를 보기 위해 짬짬이 기차를 탔고, 촬영도 했습니다. 이런 여정 중 KTX 기장에게 기장용 작업모를 받기도 했습니다.


현일 씨가 사진을 하나 보여줬습니다. 집 옥상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노량진 근처에 빼곡한 철길이 한가득 담긴 풍경입니다. “지하철과 기차를 항상 볼 수 있어서 선택한 자취방이에요. 남들은 시끄럽다고 하는데, 저한테는 기차를 바라볼 수 있어 최고죠.” 철도를 하도 오래 봐서 그럴까요. 현일 씨는 “기관차마다 다른 엔진을 쓰는데, 엔진의 음성을 듣고 구분할 수도 있어요”라고 합니다. 엔진의 고유진동수가 다르다는 거죠.


두 철덕의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철도박물관 휴게실에서 인터뷰 도중 철도가 지나가기만 해도 두 명 다 고개를 돌렸습니다. 마치 철도 더듬이가 있는 것 같았죠. “이 기차는 7500호대 기차예요.(현일)” 철도 구분은 어떻게 하냐 묻자, 카페를 통해 정보를 얻고, 거기에 없을 때는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찾아본다고 합니다. 예전엔 NX로지스라는 철도 검색 사이트를 이용했지만, 최근에는 시운전과 같은 정보 검색이 힘들어졌다고 아쉬워합니다. 특수한 열차를 보려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대전 신탄진역에 갑종회송(폐차, 시운전, 퇴역 등의 이유로 열차가 다른 열차를 끌고 가는 것)을 보러 갔어요. 일종의 철도 배달이죠. 열차가 너무 안 와서 지치고 있을 때쯤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어요. 평범한 무궁화였죠. 그런데 바로 뒤에 진귀한 ‘에코레일’이 지나갔어요.(한결)”

 

진정한 철덕은 선을 지킨다


두 철덕은 철도덕질을 할 때 적절한 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역 내에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고, 물품을 모을 때 불법으로 가져가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폐쇄된 역도 아닌 시골역이었어요. 어떤 분이 역명판을 가져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제지했던 경험이 있어요. 그런 분들 때문에 철도덕질의 인식이 안 좋아질까봐 걱정돼요.(한결)”


‘입장권을 끊으면 역 어디서든 촬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일부 있는데,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역무원 책임이 됩니다. 그래서 역장의 허가를 받고 사진 촬영을 했으면 좋겠다고 한결 군은 말합니다. 현일 씨도 고개를 끄덕이네요. 철도덕후들이 노선에 관한 민원을 넣는 등 철도 역무원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한 일도 있다고 합니다.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최근 들어 작은 간이역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차의 종류도 많이 사라지면서 퇴역한 옛 기차들이 그리워지는 거죠. KTX 등 철도 공학의 발전으로 사람들이 편리함을 누리게 됐지만, 느림의 미학을 즐기는 철덕들은 철도의 역사가 사라짐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왜 철도를 사랑할까요. 철도에 빠진 계기를 묻자 현일 씨는 말합니다. “거대한 쇳덩어리 구조물이 엄청난 동력으로 무거운 물건들을 끌고 가면 가슴이 뛰어요.” 한결 군이 덧붙였죠. “기차의 웅장함과 레트로한 느낌에 빠졌어요.”


그들에게 철도의 매력은 ‘일상’이었습니다. 철도는 역사 속에서 변하고 있고, 기차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매력이라는 것이죠. 또한 기차가 가진 역동성과 함께, 의외성이 매력이라고 했습니다. 매번 같은 기차 속에서 가끔 보이는 화물열차나 진귀한 열차를 바라볼 때 느끼는 즐거움도 있다고 합니다.


철도 촬영을 잘할 수 있는 팁을 물어보자 한결 군은 “기차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가 진짜 예뻐요. 특히 눈이 오면 훨씬 더 예쁘죠”라고 말했습니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철도의 모습도 풍경에 녹아드는 모습이 일품이라고 합니다. 철도를 사랑하면 전국의 간이역을 다니며 여행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하네요. 증기기관부터 시작된 오래된 공학의 산물인 철도. 그 잔잔한 매력에 함께 빠져봐도 좋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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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과학동아 정보

  • 한삼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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