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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는 가파른 언덕이 있었다. 언덕은 나무가 빽빽하고 항상 낙엽이 두껍게 쌓여있어 작은 숲을 방불케 했다. 언덕 주변을 빙 둘러 인도가 나 있었지만, 학교를 마치면 언제나 언덕길을 택해서 집에 돌아갔다. 주변의 나무를 잡아가며 네 발로 기다시피 올라야 하는 길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천연색의 화려한 동물대백과사전이나 시이튼 동물기 같은 책들을 읽으며 막연히 나도 생물학자가 되겠다고 얘기하고 다니기는 했다. 그러나 처음 생물에 구체적인 의문을 가졌던 건 이 언덕에서였다.

 

굳이 언덕을 기어올랐던 건

 


어느 여름날 열심히 언덕을 기어오르다 앞에 있던 나무줄기를 잡았는데 무언가 오돌토돌한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손을 떼고 보니 진딧물 한 무리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어, 왜 얘들은 이렇게 모여있지?’ ‘이 나무가 다른 나무와 뭐가 다른 거지?’ ‘왜 하필이면 이 자리인 거지?’ 생물과 관련해 명확하게 기억나는 첫 번째 질문이었다. 물론 당시 가지고 있는 책을 뒤지는 정도로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고,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는 동안 그리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다. 교과서보다는 문학부터 과학, 인문학까지 관심이 가는 분야들의 책을 읽었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천문동아리 활동을 한다며 과학실에서 보냈다. 주말에는 산이나 들로 놀러 다니며 곤충이나 새를 관찰했다. 학업은 약간 뒷전이었지만, 겁 없이 시도하고 호기심을 늘리며 관심사를 보다 명확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대학에 가서는 거미를 분류하는 연구실에 들어갔다. 스위핑넷(잠자리채와 비슷한 채집도구)을 들고 자연에 나가 거미를 채집하고, 돌아와 현미경을 보며 표본을 분류하는 일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채집을 매번 기다리는 나를 보며, 후에 이런 일을 직업으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원은 실험실 안에서 실험하기보다는 밖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연구를 하는 행동생태학 연구실에 진학했다.

 

기다려지고 설레고, 신나고 재밌었다


대학원은 중고등학교나 대학과 좀 달라서 알아서 정보를 찾아가며 공부할 것도 많았고, 야외조사 일정이나 계획도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신나고 재밌었다. 석사과정에서는 귀뚜라미 소리를 연구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야외조사를 했다. 연구실에 돌아와서는 사육하는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녹음했다. 매 순간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연구를 계획하고 진행하고 정리하는 과정 전반이 즐거웠다. 그렇게 박사과정으로 진학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처음부터 박사과정으로 돌고래를 연구하겠다고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성 선택과 관련된 연구만 할 수 있다면 어떤 동물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관련 연구실들을 한참 찾아보던 중에 석사 때 지도교수님의 연락을 받았다. 특별히 지금 하는 일이 없으면 연구실에 나와서 돌고래 연구에 참여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수족관에서 쇼를 하던 남방큰돌고래인 ‘제돌이’의 방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있던 프로젝트에서 돌고래의 행동을 관찰하고 야생 돌고래와 얼마나 행동의 차이가 있는지, 제돌이가 방류에 적합한 대상인지 행동으로 파악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에는 해양포유류 행동 연구를 하던 연구진이 국내에 없었던 터라 모든 걸 처음부터 시행착오를 거쳐 익혀가야 했다. 배도 처음 타봤다. 고백하자면 야생 돌고래 실물도 방류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후 처음 봤다.


밤새도록 책과 논문을 뒤지고, 해외의 돌고래 연구자들에게 e메일을 쓰고 낮에는 돌고래를 관찰하는 빠듯한 일정으로 몇 개월을 보내다가 이 동물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고래는 커뮤니케이션의 복잡성과 다양성에서 최고 수준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했고, 국내에서는 행동 연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부채질했다. 분명 힘들 거라고 만류하던 지도교수님을 설득하고 설득해서 돌고래 행동 연구라는 분야에 뛰어들었다.

 

돌고래 초보에서 해양동물연구단체 대표까지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의욕은 가득했으나 난관이 많았다. 이 개체군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제주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다. 장비를 살 연구비도 없었다. 그래서 연구 주제를 제주 남방큰돌고래가 서식지를 어떻게 이용하는지와 행동 패턴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결정했다. 


110마리가 넘는 것으로 알려진 한국의 남방큰돌고래는 제주도 주변 바다를 서식지로 삼는다. 그러나 제주도 바다라는 넓은 서식지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장소마다 선호하는 다른 행동이 있는지,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공간도 서식지로 사용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나의 궁금증은 이런 것들에서 시작했다.


첫해는 해양포유류의 행동을 어떻게 관찰하고 기록할지 등 연구 방법을 정하느라 다 보냈다.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누구도 명확하게 기준을 정해줄 수 없으니, 직접 시도해보고 다른 연구들과 비교한 뒤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부분을 수정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 뒤에는 하루에 10~12시간씩 차를 타고 제주도 해안도로를 돌며 돌고래를 찾아다녔다. 3월부터 11월까지 1년에 약 8개월씩 몇 년을 돌고래를 따라다니다 보니 이제는 조금씩 제주 남방큰돌고래의 삶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남방큰돌고래는 제주도 주변을 유영하며 살아간다. 다만 모든 공간을 동일하게 사용하지는 않는다. 어떤 장소는 그냥 지나가는 통로처럼 이용하기도 하고, 어떤 장소는 주로 먹이를 먹고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 오랜 시간 머무르기도 한다. 그런 특정한 행동을 하는 장소와 시간을 기록하고 분석해 핵심 서식지를 알 수 있었다. 제주도의 남서부와 북동부 연안이 이들의 주요 서식지로 나타났다. 이 지역들은 개체군이 건강하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데 매우 중요한데, 이런 핵심 서식지들이 연구를 시작한 이래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파편화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이유는 인간의 활동이다. 인간이 이용하는 선박의 이동이 잦아지고 연안을 개발하는 일들이 늘어나면 돌고래는 그 지역을 서식지로 이용하길 꺼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 바닷속의 소음이 커지면 돌고래들이 내는 소리도 조금씩 변한다.


막연히 ‘바다는 넓으니 잘살고 있겠지’라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연구를 진행할수록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 그래서 같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동료와 해양동물의 연구와 보전을 위한 비영리단체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MARC)’를 만들어 돌고래의 생태와 연구를 알리고, 보전을 위한 활동도 시작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다른 활동을 하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쉽지는 않지만, 사람들에게 우리와 다른 생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리는 것은 또 다른 보람을 느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야생 돌고래 개체군의 행동을 관찰하며 사람의 접근에 행동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어떤 소리를 내는지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방류된 돌고래들이 여전히 잘 살아남아 새끼를 기르고 친구를 사귀는 모습도 계속 지켜 보고 있다. 하고 싶었던 연구를 위해 조금씩이나마 다가가고 있는 것 같고, 그리 많지 않은 제주 남방큰돌고래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알릴 수 있는 뿌듯함이 크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바다 현장에서 직접 이 동물들을 관찰하며 행동, 음향, 사회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성장기

2000년 
동국대 생명과학부 입학

2006년 
이화여대 에코과학부(석사) 입학

2010년 
이화여대 자연사박물관 근무

2013년 
이화여대 
에코크리에이티브협동과정(박사) 입학

2013년 
남방큰돌고래 제돌이 
방류 사업 참여

2018년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MARC) 결성
저서 ‘저듸, 곰새기’ 출간

2020년 
MARC, 해양보호생물 보호보전 
유공 장관 표창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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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글 및 사진

    장수진 해양동물생태보전연구소(MARC) 대표
  • 에디터

    서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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