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의 과학기술 코드는 나노로 통한다. 생명기술, 정보통신기술 등의 첨단 과학기술이 나노단위(10-9m)로 통합되면서 나노기술은 과학기술계 구심점으로 부상했다. 이런 까닭에 지금 세계는 나노기술을 선점하려는 경쟁에 휩싸여 있다.
하지만 소수의 탐험가들이 남극, 북극, 고산 등의 극지로 나가갈 때 죽음을 무릅써야 했듯이 새로운 세계의 탐험은 언제나 위험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나노기술도 마찬가지다. 나노세계로 접근하는 연구계와 산업계는 생존의 위험부담을 지고 있다. 가는 길은 막막한데, 들여야 할 노력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특히 원자, 분자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각종 장비와 시설이 필요한데, 이런 장비와 시설은 개별 연구자들이 확보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가다.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연구계와 산업계가 제각각 나노관련 시설을 모두 갖춰야 한다면 나노세계로의 접근은 무척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까닭에 세계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정부가 나서서 나노팹(nanofab.) 센터를 구축해가고 있다. 나노팹은 나노관련 장비와 설비, 그리고 환경을 한데 갖춰놓은 시설을 말한다. 이를 통해 연구계와 산업계는 위험부담을 적게 느끼며 나노기술을 활발히 연구할 수 있다.
미국 5개 대학 네트워크 형성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1993년에 과학재단이 5개 대학을 연계해 ‘국가 나노팹 사용자 네트워크’(NNUN, National Nanofabrication Users Network)를 형성하는 나노팹을 설치했다. 나노팹은 NNUN에 속하지 않는 다른 대학이나 기업에도 개방을 한다. 그 결과 나노과학자들이 가진 새로운 발상을 빠른 시간 내에 시험해볼 수 있어 나노기술의 발전속도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NNUN의 5개 대학은 코넬대, 스탠퍼드대, 하워드대,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산타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대 등이다. 이들 대학은 연구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나노공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장비, 시설, 인력을 제공한다. 또한 나노팹의 연구원들은 나노공정에 대한 숙련도와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짧은 시간 안에 사용자의 아이디어가 첨단 나노구조물로 제조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놓고 있다. NNUN은 대학뿐 아니라 나노기술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는 인텔과 같은 대기업과 이제 막 초기 아이디어를 갖고 나노시장에 뛰어든 벤처기업들까지 활발히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일본도 세계최고의 나노기술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1992년 나노팹에 해당하는 ‘원자기술을 위한 협력연구소’(JRCAT, Joint Research Center for Atom Technology)를 설립했다. 나노 관련기술 중 소자관련 재료와 새로운 물질의 개발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향후 새로운 연구과제를 도출할 수 있는 리더십이 있는 전문가의 양성도 중요 목표로 하고 있다. JRCAT는 연간 예산만 2천5백만달러(약 3백25억원)로 비영리로 운영돼 여러 대학과 연구소 등 외부기관이 활용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는 대학을 중심으로 나노팹 구축이 추진되고 있다. 와세다대, 동경공대, 히로시마대, 오사카대, 첨단산업과학기술 국립연구소(AIST, National Institute of Advanced Industrial Science and Technology)를 중심으로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나노기술 관련 장비와 시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나노인프라를 형성함으로써 세계적인 나노기반그룹으로 성장하고자 한다.
3천억원 규모로 2011년까지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아직 우리나라에는 나노팹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현 단계는 나노팹 시설 구축의 초기단계다.
지난해 정부는 우리나라가 21세기 과학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나노기술에 집중할 것을 밝히며 나노원년으로 선포했다. 그러면서 나노인프라인 나노팹 센터 건립 계획을 과학기술부에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 계획은 나노종합팹 센터 구축사업으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이 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이 사업에는 정부가 1천1백84억원, 민간이 1천7백20억원으로 총 2천9백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나노종합팹 구축사업은 2002년 10월부터 2011년 9월까지 9년간 3단계로 구분해 추진을 계획하고 있다. 제1단계(2002-2005년)는 기반조성기이고, 제2단계(2005-2008년)는 이용활성화기, 제3단계(2008-2011년)는 자립화구축기로 구분해 추진한다.
제1단계 기반조성기에는 나노기술핵심시설을 갖춘 나노팹을 구축하고 이를 이용한 안정되고 빠른 공정서비스를 시작한다. 연구자들은 2005년부터 나노팹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제2단계에는 이용자 네트워크와 나노기술 협력기반을 구축하고, 나노기술관련 공정, 장비, 재료의 전문교육과 실습체계를 구축해 고급인력을 양성한다.
제3단계에는 나노기술관련 공정, 장비 및 재료개발을 통해 서비스 수준을 향상시킨다. 그리고 나노팹을 통해 개발된 기술을 이용한 신사업 창출을 유도하며, 최종적으로 센터의 자립화를 달성한다. 궁극적으로 3단계가 종료되는 2011년에는 우리나라가 나노기술분야에서 선진5개국 진입을 실현할 전망이다.
구체적으로 나노과학자들이 나노종합팹에서 누릴 수 있는 시설들을 살펴보자. 나노종합팹은 말 그대로 종합적인 나노기술 연구환경을 제공할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나노전자소자, 나노물질을 조작하고 기초적인 특성을 알아내는 물질원천연구, 원자나 분자를 조작하는 생물화학연구, 나노전자기계시스템 기술인 NEMS(NanoElectroMechanical Systems) 등 다양한 나노기술 분야를 비롯해 특성평가까지 종합적 환경이 구축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나노종합팹 시설을 이용함으로써 아이디어의 도출에서부터 실험, 특성평가, 그리고 시제품 제작까지 한자리에서 이뤄낼 수 있다. 나노종합팹 센터는 나노기술 신산업 혁명을 통한 국가경제 부가가치 창출의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10nm급 전자소자 구현하는 나노소자·소재실
회로 선폭이 10nm급인 나노전자소자의 개발을 위한 기본적인 나노수준의 반도체 장비가 설치된다. 회로 선폭을 5nm까지 그릴 수 있는 전자빔 리소그래피, 나노단위의 미세한 전자소자의 통제에 필수적인 원자층 증착(ALD), 원자 하나하나를 관찰할 수 있는 투과전자현미경(TEM) 등과 더불어 일괄공정에 필요한 장비들을 구축한다.
나노소자 일괄공정은 탄소나노튜브와 같은 나노구조물이 전기적으로 동작하기 위해 일련의 반도체 공정과 잘 결합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10nm급 나노전자소자 구현 기술이 필요하다. 또한 나노물질을 이용해 테라비트(1012비트)급의 고용량 저장장치를 만드는 연구 역시 일련의 반도체 공정을 거쳐야 비로소 전기적으로 의미있는 소자가 만들어진다. 나노종합팹 센터의 나노소자·소재실에는 새로운 나노구조 물질이 전자소자로 구현되도록 일련의 공정장비가 갖춰진다.
나노입자 하나하나를 연구하는 물리원천기술실
나노종합팹 센터가 구축하고 있는 물리원천기술실의 기본 목적은 나노팹이 운영되는데 필요한 소재와 소자를 제작하고 필요한 원천기술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나노구조체, 나노자성체 및 나노튜브 형성과 나노물성, 양자선, 양자점 연구 등 나노분야 원천기술의 연구개발을 지원한다.
이를 위해 크게 3개 분야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장비가 구축된다. 첫째는 소자와 소재 실험실에서 제작되는 시료들을 측정하고 이들의 물리적 특성과 현상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물리원천기술실에는 각각의 원자 하나, 그리고 각각의 나노입자 하나를 세분해 연구하는 실험장비가 구축될 예정이다. 여기에 속하는 장비로는 원자, 분자를 증착하는 MBE, MOCVD 등이 있다. 또한 소자의 기본 성질을 이해하기 위한 극저온, 고자기장, 극미세 자성체의 측정장비도 필요하다.
둘째는 소자와 소재의 제작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현상을 원천적으로 이해해 이들을 원자단위로 제어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장비로는 플라스마 측정 및 제어 장비, 그리고 극한 리소그래피 장비 등이다. 이들 장비는 소재 및 소자의 제작보다는 제작에 필요한 공정조건을 좀더 정확하게 측정·제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제작과정에서 어떤 물리적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하는데 쓰인다.
셋째는 아직 상용화된 소자는 없으나 앞으로 정보통신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다줄 양자컴퓨터 연구개발을 위한 장비들이다. 이 연구에서의 결과는 나노소자와 소재의 제작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장비와 기술의 도출과 개발로 이어져 기술기반의 획득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나노와 바이오 융합연구 수행하는 생명화학실
최근 들어 전세계적으로 나노기술과 바이오기술의 융합에 의한 신산업 창출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산업체, 연구소, 대학에서 나노기술과 바이오기술의 융합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정부가 최근 대규모 투자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형 고가 장비가 많이 필요한 이러한 융합연구의 특성상 산·학·연이 각각 연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형편이다. 따라서 이러한 나노기술과 바이오기술의 융합연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가 장비들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나노종합팹 센터의 생명화학실에는 각종 나노와 바이오 융합 연구개발, 즉 DNA 소자, 자기조립 분자소자, 생체센서 연구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장비들이 구축된다. 우선 연구대상이 되는 DNA, RNA, 단백질, 펩타이드 등을 분석할 수 있는 기기들이 구축되고, 이후 응용 연구에 필요한 장비들을 도입할 계획이다.
나노와 거시세계 연결하는 NEMS실
NEMS는 미세 센서와 엑츄에이터(actuator)와 같이 나노와 거시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분야로 나노연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한 예로 나노세계의 손과 발이 되는 원자현미경의 가장 핵심부품인 나노팁도 NEMS 공정을 통해 제작된다.
NEMS실에는 실리콘 웨이퍼를 수십-수백μm까지 수직으로 깊게 식각하는 특수 장비를 갖춰 다양한 구조체를 제작할 수 있게 한다. 또 마이크로 단위로 구조물을 만드는 마이크로머신 장비도 설치해 일반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하지 않는 두꺼운 포토레지스터 등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 연구자들은 이를 이용해 미세금속 구조물을 자유자재로 제작할 수 있다.
한자리에서 성능 테스트하는 특성평가실
특성평가실에는 나노소자·소재의 특성을 나노팹에서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는 장비를 구비한다. 이를 통해 나노관련 연구개발주체들의 특성평가를 지원한다. 즉 아이디어에서부터 개발, 그리고 마무리 과정인 평가까지 나노종합팹 센터에서 이뤄지게 하려는 의도다. 세계적인 선도 연구의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나노물질의 구조분석에 쓰일 원자현미경인 STM, AFM, TEM 등,그리고나노물질의조성을분석하는SIMS, XPS,FT-IR 등, 소자 특성분석들을 위한 장비들을설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