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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와의 영원한 전쟁

'아웃브레이크'가 남긴 메시지 그리고 그 오류

만약 인류가 멸망한다면 무엇 때문일까? 지구를 단번에 날려버릴 핵전쟁 때문일 수 있고, 대지진 같은 천재지변이나 거대한 혜성과의 충돌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 거창할 필요는 없다. 4백나노미터(nm) 크기의 박테리아나 20nm짜리 바이러스가 인류를 참혹한 질병으로 멸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유사 이래 수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왔다. 장티푸스, 이질, 콜레라 등 치명적이고 전염성이 강한 질병은 인류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특히 기원전 3천년부터 발병되었다는 흑사병은 수많은 인류의 목숨을 앗아갔다.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유럽 인구의 1/3 정도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까지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현대의 흑사병이라 불리는 에이즈(AIDS)가 등장하여 한동안 잠잠했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다시금 고개를 들게 되었다.

바이러스에 대한 집단공포

SF 영화 중에는 인류가 바이러스에 의해 멸종 위기를 겪게 되는 끔찍한 가상의 영화들이 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에서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바이러스의 우연한 등장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영화는 실감나게 그려낸다.

‘아웃브레이크’(Outbreak)는 바이러스와의 끔찍한 전쟁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영화다. 아프리카 원숭이 한 마리가 무역선을 타고 우연히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원숭이 체내의 바이러스가 수많은 미국인들을 살상하게 된다는 줄거리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누구나 몇 시간 이내에 즉사하게 되고, 다양한 경로로 질병은 전염된다. 게다가 이 바이러스는 숙주를 옮길 때마다 돌연변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백신조차 만들 수 없다. 결국 마을을 통째로 폭발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바이러스는 한때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던 ‘에볼라 바이러스’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영화는 왜 이렇게 바이러스에 대한 집단 공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내내 있어왔고, 앞으로도 충분히 계속되리라 생각되는 바이러스 공포의 근원은 무엇일까?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전형적인 형태로 다룬 ‘아웃브레이크’의 줄거리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바이러스 영화들의 줄거리가 이미 인류가 겪었던 ‘흑사병에 의한 중세 몰락’의 시나리오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양인들에게 흑사병은 무의식의 트로마(trauma :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가 되어, 아주 조그마한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인류를 멸종시키는 것을 과학으로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편집증적 공포를 형성하게 된 것은 아닐까?

‘페스트’라고도 불리는 흑사병은 간균인 페스트균(Yersinia pestis ) 이 일으키며 쥐벼룩에 의해 매개되는 전염병이다. 중국과 아시아 내륙에서 유래한 페스트가 유럽으로 전파된 것은 1300년대 일이다. 1347년 킵차크 군대가 크림에서 제노바 교역소를 포위하고, 페스트 환자의 시체들을 대포를 이용해 도시로 쏘아보냄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전파되었다. 그 후 유럽의 수많은 국가들에서 페스트가 유행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1400년대 유럽에서 2천5백만명이 페스트로 사망했으며, 영국의 경우 1천개의 마을이 통째로 사라졌다. 그 후로도 1600년대까지 수천만명의 인구가 페스트로 사망했다.

이 무서운 재난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전쟁이 중단되고, 무역은 갑작스런 부진을 겪게 되었다. 노동자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경작지는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 결과 노동력의 부족으로 지주들은 파산했으며, 기술자나 소작농의 임금은 상승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그때까지의 엄격한 사회 계층 구조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한 사회와 계속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사람들은 지나치게 미신에 의존하면서 불건전한 정신병적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이러한 위기에서 영적인 지도를 해줄 수 없었다. 게다가 페스트로 성직자들의 수가 많이 줄게 되자,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교양없는 사람들이 성직자로 뽑혀 14세기 후반에는 성직자들의 수준이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또 신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인 신뢰가 의심받게 되었다. 열심히 기도하고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가자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이 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페스트로 인해 파생된 불안정한 사회구조나 미신 등의 정신적 혼란, 기독교에 대한 회의가 중세가 몰락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역사가들의 추측은 일면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20세기인 지금에도 에이즈가 발생하자 사람들이 동요되고, 마약이나 동성애로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신의 저주니 천형이니 하면서 말세론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페스트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바이러스와의 영원한 전쟁
 

현대판 페스트

'아웃브레이크'에서 중세 페스트의 징후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우선 '우연한 바이러스의 유입'이다. 영화는 한 무역선박(우리나라 태극호로 나온다)의 선원이 원숭이를 짐 칸 속에 별 생각 없이 들여오면서 아프리카 오지의 바이러스가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설치류의 질병이었던 페스트가 우연히 인간 생활사의 한 단계로 끼어든 것 처럼 현대판 페스트도 선박을 통해서 유포된다.

이것은 작고 사소한 부주의가 얼마나 치명적인 재해로 커져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과연 바이러스의 유입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을까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아무리 벼룩과 설치류를 없애고 위생적인 환경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떤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전파하는 상황이나 계속해서 죽어 가는 인간들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과연 인간이 신의 축복을 받은 ‘만물의 영장’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페스트의 종말을 유발한 사건’으로 생각되는 역사적인 사건을 모방하고 있다. 1600년대까지 페스트의 만연을 막기 위해서 런던에서 취해진 방역법 중의 하나는 고양이, 개, 쥐 등을 태워 죽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그 규모가 너무 작고 상당히 뒤늦은 조치였다. 그러던 중 1666년 9월 2일, 런던의 가장 인구가 밀집한 지역의 중심부인 ‘푸딩 레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나흘이나 맹위를 떨쳤고, 시가의 4/5를 초토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그 후로 그 지역에는 페스트가 급속히 줄게 되었다. 그 불길이 전염병의 만연을 부채질했던 ‘비위생적인 환경’도 함께 불태워 없애준 것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페스트는 극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는데 아직도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666년에 일어난 영국의 화재 사건은 우리에게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최후의 전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다.

‘아웃브레이크’가 중세의 페스트를 현대로 옮겨 놓았다는 명백한 증거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결말을 차용한 데 있다. 바이러스의 백신을 만들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도 계속 실패로 돌아가고, 뒤늦게 백신은 개발되었지만 온 도시는 바이러스로 쑥대밭이 되었다. 온도시를 화염 속에 날려 버리려는 작전이 진행된다.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다 태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결말은 약간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것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혼동한데서 비롯된다. 박테리아는 70℃이상에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고온 처리가 가장 좋은 멸균방법중의 하나다. 박테리아의 한 종류였던 페스트균에 의한 흑사병은 소각이 멸균에 굉장히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웃브레이크’에 등장하는 것은 박테리아가 아니라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는 신체 외부에서는 휴면상태로 존재하다가 숙주세포 내에서 활동을 하고 복제를 하기 때문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숙주세포를 죽이는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 그러나 인간을 죽여야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다는 충고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 물론 도시를 화염으로 날려버리면 바이러스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사람 몸 안에 바이러스가 살아있었다면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것이다. 화재로 인간을 태워 죽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백신 개발’에 힘쓰는 장면이 계속 등장한다. ‘아웃브레이크’는 결과적으로 이미 항체가 형성된 숙주(원숭이)를 찾아내 그 항체를 감염자에게 주사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인간의 몸은 스스로 외부 바이러스에 저항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동물세포는 ‘인터페론’이란 물질을 분비해서 바이러스 증식을 스스로 억제한다. 또 인간은 바이러스에 대해 항체를 형성하여 바이러스에 대항하게 하는 면역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면 바이러스를 억제할 수 있다. 약화되었거나 활성이 없는 감염성 바이러스 균주를 몸에 투입하면, 이러한 바이러스는 심한 질병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면역세포와 항체를 형성하도록 자극하여 독성 바이러스를 면역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백신을 이용한 능동면역요법’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해 인류를 오래도록 괴롭혔던 천연두는 근절되었다.
 

원인모를 바이러스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방역반이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
 

깨어나고 싶은 악몽

‘바이러스에 의한 멸망’을 다룬 또하나의 영화는 테리 길리엄(T. Gilliam) 감독의 최근작 ‘12 몽키즈’(12 Monkeys)다. 2035년 필라델피아. 인류를 거의 전멸시킨 바이러스를 피해 지하세계로 피신한 일군의 과학자들은 범죄자들 가운데 한 명씩을 골라 정기적으로 지상상황을 살피러 보낸다. 그 일을 자청하고 나선 인물은 제임스 콜이란 거칠고 반항적인 죄수. 콜의 관찰력과 무지막지한 집요함을 안 과학자들은 바이러스의 발생지를 추적하는데 그가 적임자라고 판단한다. 1996년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된 다음부터 수집한 자료에 따라, 과학자들은 바이러스 발생의 책임자라 자칭하는 ‘12 몽키즈 군대’의 정체를 밝히러 콜을 과거로 보낸다. 정체 불명의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의해 순식간에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행성이 되어 버렸고, 이제 남아있는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단복’을 입고 시간여행을 떠나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그러나 ‘12 몽키즈 군대’는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죽어간 동물들을 보호하는 집단이었고, 그들의 계획은 과학자를 동물원에 가두고 도시에 동물들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바이러스의 정체는 엉뚱한 곳에서 밝혀지게 되는데….

‘12 몽키즈’는 정신분열적이며 광기어린 이미지 속에 “우리 모두는 결국 바이러스에 의해 멸종될 것”이라는 묵시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바이러스의 살포로 인해 치르게 된 수많은 인명 피해의 비장함을 통해서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는 억압적인 사회와 그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능적인 외계인과의 전쟁을 다룬 많은 SF영화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지구를 거의 점령하기에 이른 외계인들이 원시적인(?) 지구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멸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문명이 아무리 발달한 외계인들이라 할지라도 난생 처음 경험하는 지구의 바이러스들에 대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점령하기 위해 그들의 영토로 쳐들어갔을 때 그 지역의 풍토병으로 인해 무참히 죽어갔던 경험을 SF적으로 재구성한 것뿐이다(심지어는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컴퓨터 바이러스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엉터리 결말도 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과학이나 문명의 발전이 바이러스의 무지막지한 공격에는 속수무책일 수 있다.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잠재의식 속에 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세기의 천형이라는 에이즈가 세기말적 징후를 부추기는 지금 바이러스는 깨어나고 싶은 악몽, 그 이상이 된 것이다. 백신 개발을 통해 천연두를 지구 위에서 몰아내었던 과학의 위력을 다시금 기대해 본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콜이 면역주사를 자신의 팔에 놓고 있다.
 

바이러스(Virus) : 살아있는 동식물 혹은 미생물 세포를 숙주세포로 삼아 그 안에서만 증식할 수 있는 크기가 작고 성분이 간단한 감염성 병원체.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세포의 외부에서는 휴면입자로 존재하나 적당한 숙주 세포 안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바이러스를 생산하기 위해 숙주세포의 대사활동을 파괴할 수 있는 활성을 갖게 된다. 즉 바이러스는, 그 자체가 세포인 박테리아보다 원시적인 미생물인 셈이다.

박테리아(Bacteria, 세균) : 거의 모든 환경에 존재하는 현미경적 크기의 단세포성 생물. 자연계에 있는 복잡한 화학물질을 식물과 동물이 이용할 수 있는 단순한 화학물질로 바꾸기 때문에 자연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식품을 부패시키거나 금속을 부식시키기도 하고, 사람의 방어체계를 뚫고 침입하여 폐해를 입히는 병원성 세균도 있다.

흑사병(Black death, pest) : '페스트'라고도 불리는 흑사병은 간균인 페스트균이 일으키며 쥐벼룩에 의해 매개되는 전염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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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정재승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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