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생화학적 메커니즘이 밝혀지고 있다. 기억력을 좋게 하거나 나쁘게 하는 생체 물질의 작용을 살펴보자.
우리가 어떤 사실을 기억할 때 뇌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과학자들은 세포나 분자 수준에서 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히기 위해 많은 실험을 수행해 왔다. 현재까지 알려진 연구의 초점은 신경세포 내 핵산의 일종인 RNA, 그리고 신경세포 간 연결부위인 시냅스(synapse)에 맞춰지고 있다. 즉 우리가 기억한 어떤 사실이 RNA 형태로 저장되며, 한 신경세포에서 방출된 신경전달물질이 시냅스에서 다른 신경세포에 작용함으로써 기억 과정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똑똑한 뇌에 RNA 많다
기억이 RNA에 저장된다는 생각은 신경세포의 활동이 많을수록 세포 안에 RNA양이 증가된다는 사실로부터 추론됐다. 이 생각은 여러 가지 동물 실험을 통해 증명됐다.
1963년 쥐를 미로에 집어넣고 스스로 출구를 찾게 하는 실험이 진행됐다. 처음에 길을 못찾고 헤매던 쥐는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출구로 가는 길을 알게 됐다. 이 훈련된 쥐의 뇌로부터 RNA를 추출해서 보통 쥐에게 주입시켰다. 그러자 보통 쥐도 훈련받은 쥐처럼 출구를 잘 찾아냈다. 이에 비해 훈련받지 않은 쥐로부터 추출한 RNA를 주입한 경우 이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즉 한 동물에서 다른 동물로 RNA를 통해 기억의 ‘흔적’이 전달된 것이다.
한편 1982년 미로 찾기를 비롯해 문제 해결 능력이 우수한 쥐가 열등한 쥐보다 뇌 안에 RNA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 보고됐다. 또 1984년에는 쥐를 자극 상황(예를 들어 미로에 잘못 들어가면 자극을 가함)에 놓이게 했을 때 뇌 속의 RNA가 증가하며, 반대로 감각 박탈 상황(미로에서 잘못 들어가도 아무 자극을 주지 않음)에 놓으면 자극 상황인 경우에 비해 RNA가 감소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어떤 과학자는 이 실험을 사람에게 적용시켜, 나이가 들어도 자극 상황이 많은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면 정신 기능이 감소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RNA에 기억의 실체가 담겨있다는 주장은 RNA를 분해하는 효소를 체내에 투입하는 실험을 통해 더욱 힘을 얻었다. 고양이를 대상으로 실험한 예를 보자. 고양이에게 전선을 연결하고 계속 걷게 한다. 고양이 눈 앞에 빨간 불이 들어올 때 고양이가 계속 걸어가면 전기 충격을 준다. 반대로 파란 불이 들어올 때는 전기 충격을 주지 않는다. 몇차례 실험이 진행되면 고양이는 빨간 불이 들어올 때 걸음을 멈춰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과학자들은 이 고양이 뇌의 시각 담당 부위에 ‘RNA 분해효소‘ 를 주입시켰다. 그러자 고양이는 이전에 학습한 내용을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분해효소가 기억이 활성화되지 못하게 만드는 ‘화학적 지우게’ 역할을 한 것이다.
이 분해효소가 몸 속에 많이 존재할수록 그만큼 기억력은 나빠질 것이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은 젊은 사람보다 혈액에 RNA 분해효소를 더 많이 가졌다. 노인들이 자꾸 뭔가를 잊어버리는 이유 중 한가지가 밝혀진 것이다.
만일 RNA 분해효소를 없앤다면 사라진 기억력이 회복되지 않을까. 이러한 추론에 따라 기억 장애 환자에게 분해효소를 없애는 화학 치료가 시도됐다. 먼저 환자에게 많은 양의 효모(yeast) RNA를 주입시켰다. 환자의 뇌에는 평소보다 많은 RNA가 포함된 셈이다. 이때 뇌에서 분해효소에 의해 사라지는 환자 자신의 RNA 양은 아무래도 줄어들 것이다. 이 방법은 일부 환자에게 효과를 나타냈다. 기억 기능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이다.
그러나 효모 RNA는 기술적으로 완전히 정제되지 못하고 종종 불순물과 섞였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자주 고열 증상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효모 RNA의 투입을 중단하고 뇌에서 RNA가 많이 만들어지는 약물을 환자에게 투여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효과가 나타났다. 하지만 약물을 중단하면 환자의 기억은 다시 악화됐다.
훈련된 플라나리아의 비밀
과학자들은 기억 기능을 담당하는 또다른 실체로 시냅스를 지목했다. 시냅스는 신경 신호를 전달하기 위해 신경세포가 서로 접촉하는 부위인데, 이 곳에서 여러 생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
1970년 경 무척추동물 와충류의 일종인 플라나리아를 가지고 기억에 관한 흥미로운 실험이 수행됐다. 플라나리아는 매우 간단한 신경계를 가진 동물이다.
T자 모양의 미로를 물로 채운 후 한쪽 부위는 어둡게 하고 다른 한쪽은 밝게 만들었다. 그리고 플라나리아를 두 집단으로 나눈 후 한 집단은 밝은 부위로, 다른 한 집단은 어두운 부위로 가도록 훈련시켰다.
훈련되지 않은 식인(?) 플라나리아에게 훈련된 플라나리아를 먹이고 난 후 같은 방식으로 훈련시켰다. 밝은 부위로 가도록 훈련받은 플라나리아를 먹은 식인 플라나리아는 밝은 부위로 가도록 훈련받을 때 다른 개체보다 더욱 빠르게 학습했다. 반면 어두운 부위로 가도록 훈련시키자 학습 속도가 떨어졌다. 아무 것도 먹지 않은 플라나리아보다 속도가 더욱 느렸다. 그렇다면 신경조직에 기억을 전달하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닐까.
과학자들은 플라나리아의 신경조직이 무척 단순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신경조직은 수많은 신경세포가 ‘연결’된 형태다. 즉 플라나리아의 신경조직에는 많은 연결 부위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연결 부위에서 기억에 관계하는 어떤 물질(신경전달물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후의 실험들은 이런 가정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현재까지 뇌의 신경전달물질로 거론되는 물질은 40종 이상이다.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아세틸콜린이다. 아세틸콜린은 사람의 기억을 비롯한 지적 기능에 중요하게 관여한다.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여러 치매 증상을 보이는 환자의 경우 대뇌 피질에서 아세틸콜린을 분비하는 신경세포가 대량으로 손상돼 있었다. 최근에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경우 소마토스태틴(somatos-tatin)이나 가바(GABA), 그리고 글루타민산 등의 신경전달물질이 정상인에 비해 감소된다는 점이 보고됐다.
이외에도 콜린성 신경계(아세틸콜린을 만드는 신경세포)와 상호 작용을 하는 신경세포들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이나 도파민, 그리고 세로토닌 등의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는 것을 볼 때 이 물질들도 기억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고 있다고 추측된다. 예를 들어 동물에게 학습을 시킨 후 세로토닌을 해마 부위에 주입하면 학습한 내용이 저장되는 것이 억제됐다. 반면 세로토닌 억제제를 학습 후 24시간이 지나서 주입하면 기억이 촉진됐다. 즉 세로토닌의 농도가 높을수록 기억은 감퇴되는 것이다.
한편 호르몬도 간접적이나마 기억에 관여하는 물질로 떠올랐다. 체내에서 분비된 호르몬은 신경세포에 작용해 특정 신경전달물질이 방출되도록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정상인에게 부신피질자극호르몬을 주입하면 특정한 기억력 테스트에서 좋은 결과를 낳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호르몬이 기억력을 증진시킨다고 일반화시켜 단정짓기는 어렵다.
또다른 예로 뇌하수체 후엽에서 분비되는 두가지 호르몬인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을 들 수 있다. 바소프레신을 쥐에게 주입하면 기억이 상실되는 정도가 약해졌다. 이에 비해 옥시토신을 주입하면 기억력이 증가됐다.
적정량 투입이 열쇠
기억에 대한 분자생물학적 연구가 점차 진행되면서 기억력 회복에 도움을 주는 많은 약물들이 개발되고 있다. 그러나 약물의 사용에는 항상 주의가 따른다. 바로 ‘적정량’의 문제다. 예를 들어 적당한 용량의 콜린성 약물을 정맥에 주사하거나 직접 먹으면 단어를 회상하는 능력이 증진된다. 그러나 많은 양을 주입하자 오히려 인지 기능에 손상이 일어난다.
한편 간질을 일으키는 독성 물질인 스트리크닌은 소량 복용할 경우 커피나 콜라 내에 있는 카페인처럼 신경을 자극하는 속도를 증가시킨다. 예를 들어 쥐를 훈련시키기 전에 아주 소량의 스트리크닌을 주입하면 쥐의 학습 속도가 더 빨라진다. 흥미로운 점은 약물을 투입하는 시간에 따라 기억 효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즉 훈련 후 20분 이내에 스트리크닌을 주입하지 않으면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약물을 이용해 기억을 회복하려면 어느 정도의 양을 어느 시간대에 투여하는 것이 효과적인 지를 본격적인 치료에 앞서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