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내가 원하는 것을 대부분 이룰 수 있는 이 세상에 발을 들여 놓은 지도 벌써 8년째다. 인터넷 사용자라면 누구나 느끼는 일이지만, 인터넷을 통해 알게된 사람과 많은 대화와 편지를 주고 받다가 실제로 만날 때 느끼는 실망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아브락사스(Abraxas)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나를 직접 만났을 때의 소감들도 가지각색이다.
나는 해커가 아니다
아브락사스의 명성만 듣고 있던 사람들은 해커의 이미지로 나를 상상한다. 두꺼운 안경에, 머리 길고, 수염 안 깎고, 비쩍 말랐으며, 단지 초롱초롱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 같다. 작달만한 키에 어깨만 떡 벌어진, 머리만 ‘딥따’ 큰 중학생같이 생긴 녀석일거라고는 상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인터넷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자기가 상상한대로 생겼다고 대답하던 사람은 딱 한명밖에 못봤다.
인터넷에서 나는 해커로 유명하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해킹도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해킹을 많이 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이 한 일들을 내가 다 뒤집어 쓴 기분도 든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재학할 당시, 직접 컴퓨터 여러 대를 관리했기 때문에 해킹을 막는 쪽에 신경을 썼지, 해킹할 필요도 전혀 없었다. 단지 이곳저곳에서 나오는 ‘뛰어난 해커’ 라는 호칭은, 그저 시스템을 공부하다가 알게된 인터넷의 취약점이나, 여러가지 해킹의 가능성들을 떠벌이고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놀라운 것은, 내가 안했다고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친한 친구들까지도 내가 해킹을 했을 것이라고 믿어버린다는 점이다.
하나비의 터줏대감이 된 이유
KAIST를 다니다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1994년 미국에 왔는데 너무 심심했다. 그래서 사람을 사귀기 위해서 인터넷BBS를 시작했고, 그 덕에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당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는 언더비(underbbs)라는 인터넷BBS가 있었는데, 그 BBS프로그램을 ‘케빈’ 이라는 사람이 버클리대학으로 가져와 ‘하나BBS(hanaBBS)’ 를 만들었다. 난 그저 ‘새로 시작하는 마당이니 새로 짭시다’ 라고 제안했다가 프로그램을 하게 됐고, 지금의 하나BBS가 돌아가게 됐다. 이때 발을 잘못 들여놓은 나는 지금도 하나BBS에서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 가 됐다.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닌데. 아이고 내 팔자야.
여하튼 ‘하나BBS 공식 프로그래머’ 라는 명칭이 붙어버린 나는 또 다른 ‘해커이미지’ 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오프라인(off-line)모임에 나가보면 모두가 이렇게 말한다. “아, 저 사람이 BBS를 만든 프로그래머구나. 그런데 생각보다 되게 젊어 보인다.” 응당 프로그래머라고 하면 삼사십대의 중견기술자 이미지를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좀 꾀죄죄하긴 하지만 키작고 ‘영계틱’ 한 사람이 프로그래머라고 하니까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차라리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좀 머리도 길고, 말도 별로 하지 말고, 수염도 깎지 말고, 청바지에 구멍난 티셔츠를 입고 다닐까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이미지들을 벗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 덕분에 이제 나를 ‘해커’ 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터넷에 매료되다
인터넷은 89년 한국과학기술대(현재는 KAIST 학부과정)에 입학하면서 알기 시작했다. 첫 학기 과목으로 C언어를 들으면서 접한 유닉스 시스템은 처음으로 다뤄보는 멀티프로세싱 시스템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컴퓨터를 공유하면서 정보교환을 할 수 있다는 점은 나를 매료시켰다.
친구들과 함께 유닉스를 공부하려고 ‘유저그룹’ 이라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약 20여명 되는 친구들이 유닉스에 하나의 정보교환 장소를 만들고, 거기에 메시지나 새로운 프로그램, 유틸리티, 게임들을 깔아놓고 우리들끼리 유닉스를 즐겼다. 재미있는 나날이었다.
유저그룹과 함께 1학년 1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우리들이 숨어 지내던 정보교환 장소가 어느 누구에 의해서 박살이 나 버렸다(해킹을 당한 듯 하다). 학기가 끝날 무렵이어서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그냥 모임이 없어지나 싶었는데, 그때 유닉스를 좋아하던 친구들 넷이 모여 우리들만이라도 계속 공부를 해 나가자며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의 이름이 아브락사스였다(물론 지금은 나의 ID가 됐지만). 우리는 일주일에 두번정도 만나 자기가 공부한 유닉스의 구조에 대해서 논의도 하고, 공부한 내용을 응용해 여러가지 유틸리티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또 그것들을 아브락사스의 이름으로 학생들 사이에 사용하도록 돌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만들었던 오락게임들은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그 기간이 시스템에 대해서 가장 많이 공부한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다 2학년이 됐다. 그 무렵 외국의 ftp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 게임 프로그램들과 IRC를 가져와 학교 인터넷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과거 한 호스트에서만 하던 hunt라는 게임과, NetHack이라고 하는 게임이 대표적인 것이었고, 머드(MUD)를 가져와서 실행한 것도 이때였다. 약 10여가지의 MUD를 가져와서 하나씩 해 보겠다고 계획을 세웠는데, 알파벳으로 순서를 매기다 보니 AberMUD가 첫번째 희생양이 됐다. 몇몇 학부생들 사이에 머드가 알려진 것도 그때였다. 학교 터미널실에서 붙어서 오락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게임을 하다가 방학을 했는데도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서 숨어 사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왜 나는 해충두목인가
그 2학년 봄학기가 끝나갈 무렵 웃지 못할 사건이 벌어졌다. 나와 일종의 경쟁관계에 있던 해커가 있었는데, 그는 걸핏하면 시스템을 다운시켜서 컴퓨터 작업을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과 함께 그 현장을 잡아내기 위해서 동분서주했고, 물론 여러번 확실한 증거도 잡았다. 하지만 같은 학생 처지에 처벌은 할 수 없는 노릇.
그러던 어느날 한 후배가 기숙사에 있는 나에게 달려와 “전자계산소 앞에 어떤 편지가 붙었다” 고 알려줬다. 익명으로 누군가 시스템 관리자에게 보낸 편지인데, 계산소에서는 별로 확인해보지도 않고 알아서들 해결하라며 아예 게시판에 붙여 놓은 것이다.
그 편지의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모군은 이러한 해킹을 하고 있으며, 모모군은 이러한 해킹을 하고 있다(증거와 함께). 그들은 해충과 같은 존재들이며 컴퓨터 시스템에서 추방돼야 한다. 그중에서도 두목격인 문정훈이라는 작자는 사용자가 ID와 암호를 치는 것을 다른 곳에서 읽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작자는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걸리지도 않는다.”
하긴 이미 유닉스 시스템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후배들이 해킹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고, 내가 키보드를 읽는데 대한 가능성을 말한 것도 사실이었으나, 편지는 황당무계 그 자체였다. 계산소에 여러번 항의도 해 보았으나, 계산소의 반응은 냉담했고, 당시 가을학기 수강신청을 하러 계산소에 온 전교생들이 그 편지를 보는 바람에 난 졸지에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 돼버렸다. 그래서 그때 생긴 ‘해충두목’ 이란 별명을 6년이 넘게 사용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가능성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생각이 든다. 랜(LAN)에서 가능한 패킷 트레이싱 방법을 쓰면 실제로 네트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입력이 추적 가능하다. 그 점이 바로 인터넷의 취약점이었다. 실제로 약 2년 후에 내 친구 중 한명이 그것을 실험해 성공하기도 했다.
2학년 2학기부터 전산과 컴퓨터실의 컴퓨터 관리를 하게 됐고, 인공지능 연구센터의 시스템 관리자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 기간 동안 관리하던 시스템들은 매우 안정된 상태였는데, 아마 해킹을 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부분의 해커들이 내가 아는 후배들이었기 때문에 그냥 건드리지 않고 놔 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머드가 가장 번창했던 시기는 4학년이 됐을 때쯤이다. 당시 나는 ‘진실’ 이라는 컴퓨터를 관리하고 있었는데, 디꾸(DIKU)머드를 돌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한글엘피(LP)머드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머드를 즐겨왔던 머드 광들은 ‘진실머드’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프로그램 개발에 너무 많은 시간을 무절제하게 투자한 나머지, 학점은 바닥을 헤매게 됐고 결국은 최악의 사태를 맞게 됐다(최악의 사태란 학교를 그만 다녀야만 했다는 것이다).
원하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나는 지금 미국에서 다시 대학을 다니고 있다. 얼마 전 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갔을 때 친구들이 나보고 많이 변했다는 말을 했다. 하긴 이제는 수업도 빠지지 않고 시간 관리도 하면서 학점에 신경쓰는 나는 그때의 나와 엄청나게 달라졌다는 생각도 든다. 컴퓨터에 푹 빠져서 ‘배째신공’(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로 공부를 등한시 하는 사람을 일컫는 속어)을 연마하던 내가 시험문제의 정답여부를 놓고 교수님과 왈가왈부를 하게 되었으니(그것도 영어로) 얼마나 큰 발전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 가운데서 가장 암흑기라고도 할 수 있는 KAIST 시절이 나한테는 굉장히 크나큰 발전의 발판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 때문에 인터넷에서 방황하게 된 수많은 후배들에게는 정말로 미안한 마음 뿐이다.
지금의 인터넷은 예전의 덤 터미널(dumb terminal)시절의 인터넷이 아니다. 요즘은 월드와이드웹이 인터넷의 대명사가 돼 버렸지만, 아직도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프로그램들이 많은 호응을 얻고 있고, 그것이야 말로 진짜 인터넷의 참 맛이 아닌가 싶다. 아직은 한글로 운영되는 IRC나 기타 응용프로그램들이 한국에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지는 않지만, 급속히 퍼지고 있는 네트워크 마인드에 힘입어 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자기 앞가림만 잘 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난 지금 공부하는 학생이니까 공부에만 열중해야 하겠다. 앗, 잠시 편지좀 체크하러 BBS에 들어가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