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30대 건강한 한국인 남성의 게놈을 해독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3일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창립 100주년기념 종합학술대회에서 서정선 서울대 의대 교수(유전체의학연구소)는 ‘깜짝 발표’를 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개인의 게놈을 해독하고 있다는 것. 현재 해독률은 약 85%다. 서 교수가 한국인 게놈 해독에 뛰어든 이유는 뭘까.
‘30대 건강한 남성’의 게놈 해독 중
서 교수는 “앞으로는 개인의 유전체를 해독해 의료 정보로 활용하는 개인 유전체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며 “한국도 개인 유전체학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 유전체학(Personal Genomics)은 사람마다 유전체 차이가 얼마나 큰지, 이런 차이가 질병과 개인의 특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다.
서 교수는 현재 ‘30대 건강한 남성’의 게놈을 평균 4차례 시퀀싱(염기서열 분석)한 상태다. 염기 수로 따지면 약 120억 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양을 판독한 셈. 시퀀싱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20번 염색체는 염기 서열을 12차례나 분석했다. 이 작업이 곧 완료되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개인의 게놈이 해독된다.
서 교수는 “개인의 게놈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개인별 맞춤의학의 문을 여는 토대를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는 한국을 아시아 개인 유전체학 연구의 ‘허브’로 키우겠다는 포부도 담겨 있다. 지금 당장은 한국인의 게놈부터 해독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아시아 게놈 프로젝트’를 꾸리겠다는 것.
서 교수는 “한국인 100명을 포함해 아시아인 300명의 게놈을 분석할 계획”이라며 “우선 20명의 게놈을 먼저 해독하고 차츰 그 수를 늘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서 교수는 한국인의 ‘혈통’을 밝히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DNA로 한국인의 계보를 추적하겠다는 것. 이 과정에서 가령 한국인과 중국인이 유전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답을 찾을 수도 있다.
게놈 정보를 의료용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다. 서 교수는 “아시아인의 유전적인 기질에 적합한 약물을 개발하거나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 마커를 찾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를 위해 그는 최근 조지 처치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처치 교수는 개인 유전체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이 분야의 대가다. 그는 지난해 비영리 연구 활동인 ‘개인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10명의 지원자를 받아 게놈을 해독하고 있다.
의협 창립 100주년기념 종합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한 처치 교수는 기자 회견에서 “인종별, 민족별 유전자 지도가 다를 수 있다”면서 “미국이 백인들을 중심으로 개인의 게놈을 분석하는 만큼 한국이 동아시아인의 게놈 분석을 주도한다면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질 것”이라며 서 교수의 연구를 지지했다.
이미 미국 국립인간게놈연구소 프랜시스 콜린스 소장을 중심으로 이뤄진 다국적 연구팀은 3년 동안 1000명의 게놈을 해독하겠다는 ‘1000 게놈 프로젝트’를 지난해 말 발표했다. 중국 역시 지난해 10월 중국인의 기원을 연구하는 ‘얀후앙(Yanhuang) 프로젝트’에 자신의 게놈을 제공할 지원자 99명을 모집했다.
서 교수는 “개인의 게놈을 해독하는 연구가 ‘제2의 인간게놈프로젝트’로 떠오르고 있다”며 “‘아시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이 미래 개인별 맞춤 의학 연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웟슨, 벤터 다음은 누구?
개인 유전체학 ‘열풍’은 지난해부터 그 조짐이 보였다. 지난해 6월,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제임스 슨의 게놈이 세계 최초로 해독됐고, 그의 DNA 염기서열 전체는 작은 컴퓨터 디스크 한 장에 담겨 주인의 손에 건네졌다. 9월에는, ‘셀레라’를 설립해 인간 게놈을 해독한 크레이그 벤터의 게놈이 두 번째로 해독됐다.
이런 현상에 대해 미국의 과학저널 ‘사이언스’는 지난해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로 ‘개인 유전체학’을 꼽았다. 도널드 케네디 ‘사이언스’ 편집장은 “유전체의 연구 대상이 인간 전체가 아닌 개인으로 넘어갔다”며 “개인의 유전적 다양성은 의학 분야에서 새로운 틈새시장을 형성할 것”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자신의 게놈이 해독될 영광을 누릴 사람은 누굴까. 현재 ‘넘버 3’ 자리를 놓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하다. 해독 속도에서는 서 교수가 분석 중인 30대 건강한 한국인 남성일 가능성도 있다.
처치 교수도 후보 중 하나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나를 포함해 유럽인, 아프리카인, 중국인 등 6명의 게놈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면서 “이르면 올 여름 쯤 분석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스위스의 백만장자인 댄 스토이세스쿠는 지난 1월 35만 달러(약 3억 5000만 원)를 들여 아예 자신의 DNA 염기서열 전체를 ‘구입’하기로 했다. 그는 지난 3월 4일 미국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벤틀리(스포츠카)나 비행기 대신 내 유전자에 돈을 쓰기로 했다”면서 “주식 포트폴리오처럼 앞으로 매일 내 유전자를 점검해 질병 위험에 대비하겠다”고 자신의 게놈 ‘구입’ 이유를 밝혔다.
실제로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개인 유전체학을 이용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댄 스토이세스쿠가 게놈 분석을 의뢰한 회사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놈’(Knome)이다. ‘놈’은 처치 교수가 설립한 회사로 지난해 세계에서 최초로 개인 게놈을 시퀀싱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35만 달러라는 거금을 내야 하지만 ‘부자’들의 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의 ‘23andMe’는 개인별 염기서열의 차이를 나타내는 단일염기다형성(SNP)을 분석한 뒤 의뢰인의 조상이 누구인지, 가족 간에 누가 유전적으로 더 가까운지 유전적 혈연관계를 알려주는 흥미로운 서비스를 제공한다. 가령 내가 칭기즈칸의 후예인지, 아빠와 엄마 중 누구를 더 닮았는지 SNP를 대조해 알 수 있다. 가격은 999달러(약 100만 원).
개인별 맞춤의료 가능해
해독된 개인 유전체는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개인에게 특정 질환이 발생할 위험도를 미리 알아내거나 개인의 체질에 맞는 치료법을 개발하는 ‘개인별 맞춤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인간은 누구나 23쌍의 염색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중 17%는 왼손잡이이며, 14%는 절대음감을 갖고 있고, 13%는 하지불안증후군에 시달리며, 22%는 젖당을 소화시키는 효소가 없어 우유만 마시면 배탈이 나고, 67%는 암을 가족력으로, 19%는 알츠하이머병을 가족력으로 갖고 있다.
이는 전체 DNA 염기서열의 0.1%인 염기 300만 개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염기 300만 개는 개인의 생김새부터 체질, 질병의 감수성 등 내가 남과 다른 이유를 담은 ‘유전자 신분증’인 셈이다.
아주대 의대 김현주 교수는 “21세기는 유전의료 시대”라며 “개인의 게놈 정보가 유전질환은 물론 심장병, 고혈압, 당뇨병 같은 흔한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뿐 아니라 예방하는 데도 중요한 기초 자료로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 유전체학 연구는 이제 막 돛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했다. 해독한 염기 서열을 어떻게 해석할지, 개인의 유전정보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윤리적이고 법적인 장치를 어떻게 만들지 정해진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인간게놈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조용히 시작된 ‘유전체혁명’이 이제는 ‘개인 유전체학’이란 이름으로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DNA 시퀀싱 (염기서열 분석) 방법은 영국의 프레더릭 생어가 개발했다. DNA 중합효소가 DNA를 복제할 때 OH기가 없는 특정한 핵산이 끼어들면 중합이 끝나게 해 염기서열을 찾아내는 방법이 핵심이다.
해독 비용 뚝 떨어뜨린 병렬시퀀싱 기술
DNA에 유전정보가 담겨 있다는 단순한 진리는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세포 속에 단백질과 DNA, 지질, 탄수화물 등 다양한 성분이 존재하며 DNA에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이라는 4가지 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 단순한 구조 때문에 DNA는 유전정보를 담기에 충분치 않으며 좀 더 복잡한 단백질이 유전정보를 전달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933년, 물리학자인 에르빈 슈뢰딩거는 당시 이런 생각에 반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이론적으로 A, G, C, T라는 일종의 4진수 조합만으로도 거의 무제한적으로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컴퓨터가 0과 1이라는 2진수의 조합만으로 모든 연산을 수행하고 정보를 저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 염기서열을 어떻게 판독(시퀀싱)하느냐는 점이었다. 이때 영국의 프레더릭 생어가 단백질과 DNA의 염기서열 분석법을 개발했고,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58년과 1980년 두 차례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생어가 개발한 DNA 시퀀싱 방법은 지금까지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DNA 중합효소는 DNA가 한 가닥 있을 때 여기에 상보적인 나머지 한 가닥을 만들어 두 가닥의 DNA를 만드는데, 이 원리를 이용해 몇 번의 복제과정을 거치면 원하는 DNA 염기서열을 알 수 있다.
사실 개인 유전체학 발전에는 시퀀싱(염기서열 분석) 기술의 역할이 컸다. DNA 정보량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판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자연히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결국 문제는 비용이다. 더 싸게, 더 빨리 시퀀싱하는 기술이 개인 유전체학 발전에 필수인 셈.
2006년 미국의 X-프라이즈 재단은 100명의 인간 게놈을 10일 안에 한 사람당 1만 달러(약 1000만 원) 이하의 비용으로 해독하는 기관이나 연구팀에 1000만 달러(약 100억 원)를 상금으로 주는 ‘아콘 X-프라이즈’를 발표해 시퀀싱 기술 개발을 독려하고 있다.
다행히 인간게놈프로젝트를 통해 시퀀싱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0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시드니 브레너는 인간게놈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시퀀싱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려면 한 번에 DNA를 한 조각씩 시퀀싱하는 기존의 방식을 뛰어넘어 한 번에 여러 개를 동시에 시퀀싱하는 병렬시퀀싱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숫자 10개가 위에서 아래로 나열돼 있다고 하자.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 숫자들의 합을 구하는 일이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맨 위부터 숫자를 하나씩 더하면 된다. 기존의 시퀀싱 방법은 이렇게 한 번에 한 열의 숫자를 더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숫자 열이 100개가 있고 이를 동시에 계산할 수 있다면, 숫자 열 1만 개, 10만 개를 동시에 계산할 수 있다면 훨씬 많은 데이터를 저렴한 비용에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불행하게도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완료된 2003년까지 이런 병렬시퀀싱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장비는 마련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 여러 회사에서 병렬시퀀싱 방법을 개발했고, 제임스 슨의 DNA는 그 중 하나인 ‘454 시퀀서’를 이용해 해독됐다.
‘네이처’ 4월 17일자에 따르면 인간게놈프로젝트에서 하나의 게놈을 해독하는 데 총 27억 달러(약 2조7000억 원)가 들었다. 크레이그 벤터의 경우 1억 달러(약 1000억 원)를 썼다. 벤터는 기존의 시퀀싱 방법을 이용했지만 자신의 연구팀이 개발한 실험기법과 생물정보학 기법을 이용해 해독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제임스 슨은 세계 최초로 병렬시퀀싱 방법을 이용해 해독 비용을 150만 달러(약 15억 원)로 뚝 떨어뜨렸다.
현재 미국 국립보건연구원(NIH)은 혁신적인 DNA 염기서열 분석 기법을 개발하기 위해 두 가지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2009년에는 약 1억 원으로, 2014년에는 약 100만 원만 내면 자신의 게놈을 해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