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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해외두뇌 유치작업은 개발도상국에서 유례없는 성공작이었다. 최근 국내에 들어오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현실은 60년대 KIST의 성공적인 유치전략 덕분일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설립은 자주적인 기술개발의 터전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해외에 체류하고 있던 많은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을 국내로 유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자원과 자본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경우 다른 선진국에 비하여 두뇌유출 문제는 하루빨리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였다. 두뇌유출은 그 나라 고급두뇌의 손실과 교육투자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상대국의 기술혁신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국제간 경쟁력에서 비교우위를 상실하게 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들 고급두뇌의 유출원인은 경제적 사회적 및 정치적 측면에서 다각적으로 고찰될 수 있으나 결국 선진제국이 연구활동을 포괄한 생활여건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점한다는데 그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실 KIST 설립 이전만 하더라도 난로도 없는 우리나라 대학에 연구를 하러 오라고 해외과학자들을 종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가 연구하던 금속물리 분야의 경우 54년 당시 최소한 2만7천달러짜리 실험기계가 있어야만 연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국비로 보낸 유학생이라 해도 무작정 들어오라고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내가 원자력연구소에 재직하는 동안 유학을 보냈다가 기한을 어기고 눌러앉은 연구원들에 대해 뭐라 할 수 없었던 것도 열악한 국내 사정 때문이었다.

KIST는 설립 초기부터 공업연구에 경험이 있거나 이러한 일을 할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는 과학기술자를 핵심연구원으로 데려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과 능력이 있는 연구요원의 충원을 유능한 연구요원의 절대수가 부족한 우리 대학이나 기업에서 해올 수는 없었다. 당시 여건상 국내에서 이들을 데려올 경우 대학이든 기업이든 그대로 마비상태가 돼버릴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기술의 첨단을 걷고있는 선진국의 최신 지식도 흡수할겸해서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을 유치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우선 해외과학자들이 국내에 들어와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와 법적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한 후 나는 바텔연구소의 협조를 얻어 KIST 안내서를 만들고 이를 8백여 기관 및 단체에 근무하는 해외 과학기술자들에게 배포했다. 그 결과 5백여명의 해외과학기술자들로부터 KIST에 근무하고 싶다는 응모신청을 받았다.

이 가운데 우선 서류심사로 1백50여명을 뽑고 이들 가운데 다시 분야별 우선순위에 따라 2차로 75명을 골라내 현지에서 이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인터뷰 과정은 이들 지원자들에게 산업실태조사에서 파악된 우리나라 산업의 문제점을 분야별로 제시하고 그중 각자가 원하는 과제에 대한 연구계획서를 제출하게 했다. 이 계획서를 바텔기념연구소의 분야별 전문가들에게 넘겨 검토시켜 이 과정을 통과한 18명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다시 면담해 최종적으로 계약을 맺고 채용했다. 과학기술자들을 선발하는 과정이 이처럼 까다롭자 나는 "너무 지나친게 아니냐"는 후배 제자들의 원망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차례에 걸쳐 신중한 검토과정을 거치게 한 것은 최초로 채용되는 이들 책임연구원급 연구자들이야말로 연구소의 장래를 좌우할 핵심이라는 나름대로의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초로 외국에서 돌아오는 이들이 '국내에 와서 정말로 보람을 느끼며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철저히 검토해 한사람의 낙오자도 없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모처럼 조국에 돌아와 만일 자신에게 부과된 업무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국가나 개인에게 그 이상 불행이 없을뿐더러 이로 말미암아 장차 외국에서 과학자들을 유치하는데 좋지못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런 신중함이 적중해 다행히 그때 들어왔던 사람들 중에서 국내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해외로 나간 경우는 드물었다. 연구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도 대학이나 기업으로 가서 한국 과학기술발전에 한 몫을 해냈다.
 

72년 1월 KIST 강당에 모인 KIST 초창기 실장급 연구원들. 당시 KIST는 유치과학자들의 총본산이었다.


"수준이 된다면 반드시 불러주십시오"

초기 해외과학자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지금도 인상이 남는 사람이 한사람 있다. 당시 핵물리학자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던 이휘소 박사(미국 페르미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으로 재직중이던 77년 자동차사고로 사망, 당시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에 올라있었음)한테서 자신도 연구소에서 일해보겠다는 편지를 받은 것이다. 그 편지를 받고 나는 그에게 이런 답장을 보냈다.

"KIST는 아직 기초연구를 할 단계가 아니오. 이곳에서의 연구도 중요하겠지만 노벨물리학상을 타는 일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한사람은 나와야 되지 않겠소."

그랬더니 다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박사님 말씀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KIST가 언제까지 그런 연구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언젠가 기초연구를 할 수준이 된다면 반드시 저를 제일 먼저 불러주십시오." 그의 답장을 받고 나는 그가 매우 합리적이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젊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당시 너도 나도 "아니, 최박사님, 왜 저는 부르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래도 이 분야에서는 내로라하는데 말입니다"하고 불만을 털어놓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결국 불의의 사고로 인해 나는 그를 직접 대면할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그후 과학재단이사장을 겸임하고 있었을때 나는 이박사의 어머니에게 훈장을 수여하도록 했다.

유타대학으로 인터뷰를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유타대학에는 이태규(현 KAIST 명예교수, 한국화학계의 태두) 이용태(현 한국정보산업연합회 회장, 물리학) 천병두 박사(전 KIST 소장, 83년 작고, 금속공학) 등이 있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도착한 다음날 저녁을 먹은 후 이태규 박사가 내게 "이제 가 보시지요" 하는 것이었다. "아니 어디로 가자는 겁니까?" 하고 물으니 "박사님께서는 밤에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면서요. 해서 제가 연구원들에게 한사람도 집으로 가지 말고 남아있으라고 했지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여 유타대학에서는 본의 아니게 밤에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한밤중에도 환하게 밝혀져 있던 유타대학 연구실은 아직도 인상깊게 남아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치된 실장급 과학자들이 1966년까지 75명에 달했다. 이들에 대해 해외에 있던 동료 과학기술자들은 대부분 "당신이 국내에 가봤자 얼마나 버티겠소?"하며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의 추측과는 달리 이들은 국내에서 확고한 기반을 잡았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대접받는 유치 과학자들의 얘기를 듣고 다른 과학자들도 국내로 들어오려고 애를 썼다. 이와함께 해외과학자들의 일시적인 귀국도 늘었다. KIST의 두뇌유치작전이 크게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재미과학자협회」발족

68년 해외과학자들의 유치를 위해 바텔연구소에서 KIST 주최로 심포지움을 개최한 적이 있다. 미국대통령 과학고문이던 호닉박사를 초청하고 재미 한인 과학기술자들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심포지움을 열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재미 과학자들은 "서로 화합이 잘 되지 않는 상태에 있는 한인 과학자들을 어떻게든 조직해 국내와 항시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채널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의견이 일치했다. 이런 취지에서 심포지움을 마련했지만 처음으로 해보는 국제회의인지라 어찌나 신경을 썼던지 나는 개회연설을 해야 하는 당일 병이 나버려 겨우 연설을 마치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내 뒤를 이어 회의를 진행하던 한상준 박사(현 한양대 명예총장, 화학)도 병원에 실려와 결국 사흘째 회의 종료때는 아픈 내가 다시 사회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애쓴 보람이 있어 이 회의를 발판으로 꾸준히 조직화를 꾀한 결과 마침내 1971년 '재미과학자협회'가 발족됐다.

1971년 6월 3일 NASA(미 항공우주국) 기술이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시카고에 있을 때 예기치 않게 과기처장관으로 임명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국으로 오기 전 박대통령을 면담한 적이 있었다. "최박사, 요즘 연구소는 어떻습니까?" 하길래 별 생각없이 "예, 염려하실 것 없이 잘 되어갑니다" 하고 대답한 적이 있다. 생각컨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장관으로 임명된 것 같았다. 이제 KIST에는 더이상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장관으로 임명된 후에도 약속된 행사가 있어 즉시 귀국하지 못하고 6월 14일까지 미국에 머물러야 했다. 이 회의에는 기술이전을 받는 당사자로 윤용구 박사(현 KAIST 교수, 금속재료)와 김형기 과기처 연구조정관이 같이 와 있었다. 나는 장관임명을 받는 즉시 두가지 생각을 했다. 그 하나는 이 기회에 어떻게 하든지 '재미과학자협회'를 조직해야겠다는 것과 연구학원도시 구상을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리서치트라이앵글파크(Research Triangle Park)를 방문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계속 머물면서 직접 협회를 창설할 수는 없었으므로 항공권을 일등석에서 이코노믹 클라스로 바꾸어 그 차액과 회의비 일부를 김 조정관에게 주면서 그 일을 맡겼다. "김 조정관, 어떻게든 이 협회는 만들어야만 합니다. 협회를 만들기 전까지는 귀국할 생각을 마시오." 갑자기 직속상관이 된 나의 명령을 받아 김 조정관은 그 일을 해냈다. 겨우 조달한 4천달러의 경비로 혼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마침내 협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재미과학자협회는 35명의 발기인으로 출범했는데 초대 회장은 김순경 박사(템플대 교수·화학)가 맡았다. 그리고 이어서 73년에 '재유럽 한국인 과학기술자협회'가 설립됐다. 이렇게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이 밀집되어 있는 미주 및 유럽지역에서 한국인과학기술자협회를 조직, 운영함으로써 유출된 두뇌의 국내 유치 및 현지 활용을 보다 원활하게 촉진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7천5백여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재미과학자협회는 3대 회장 함인영 박사(펜실베이니어대 교수, 산업공학)때부터 1년에 한번씩 학술대회를 개최해 국내와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다. 이 활동에 힘입어 83년에는 '재일(在日)과학기술자협회'도 발족됐다. 해외 한인과학자협회들이 설립됨으로써 이를 통해 국내에 앉아서 해외두뇌에 대한 정보를 용이하게 입수할 수 있는 한편, 해외과학자들은 국내에서 자신의 활동가능성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다각적인 두뇌유치활동으로 KIST에서만 10년동안 수백명에 달하는 해외두뇌를 유치했고 이어 한국과학원(KAIS, 한국과학기술원의 전신)의 설립과 한국원자력연구소 등 일부 기존연구기관의 개편으로 KIST에 버금하는 해외두뇌를 유치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80년대 들어 대덕 연구학원도시에 10여개의 전문연구기관이 새로이 설립됨으로써 해외두뇌의 유치작업은 보다 대규모로 행해졌다.

정부는 해외두뇌에 대해 국내 취업처를 마련해주고 귀국을 희망하는 사람에게 귀국여비 체류비 등 재정적인 지원을 하여 1978년 이래 정부가 직접 유치한 사람만도 4백10명에 달했다.

우리의 해외두뇌유치는 아주 예외적으로 성공한 경우였다. 국내에서 학위를 받지 않는 한 인정해주지 않는 일본을 제외하면 개발도상국으로서 해외두뇌유치에 성공한 경우는 우리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내에 들어오기 위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60년대 KIST의 성공적인 유치전략 덕분일 것이다.
 

76년 재미과학자협회와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가 공동 주최한 국내외 과학기술자 종합학술대회(7.26~8.6)
 

기초 연구자가 응용분야 맡기도

그러나 해외두뇌의 활용에는 많은 한계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이 갖는 공통된 문제점인데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연구분야의 불균형이 그 하나다.

초창기 어려움 중의 하나는 실제 기술연구소에서 필요로 하는 기계 금속 등의 분야는 해외에서도 연구자를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론물리는 지원자가 수백명에 달했지만 이들 분야에는 20여명이 고작이었다. 또한 선진국에서 일하고 있는 해외 고급두뇌들은 선진국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훈련돼 있고 또 그 지식과 경험은 너무나 세분화 전문화돼 있다. 따라서 과제에 따라 폭넚게 대처할수 있는 능력이 미흡해 우리 상황에서 요구되는 과업에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간혹 한두사람 전문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룩한 우수한 두뇌를 유치한다 해도 관련 분야의 다른 세부지식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 활용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한 전문분야에서만 하더라도 이러한 파행상태가 일어나는데 KIST 같은 종합연구소에서는 여러 전문분야가 협동해야 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심각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첫째 전문분야별로 핵심연구원군(群)을 최대한 형성하도록 노력했다. 그래도 모자라는 것은 물리 화학 등의 기초지식이 풍부한 과학자들 중에서 그 적성이 인정된 사람을 선발해 이들에게 기계 금속 전자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세부과제를 담당시켰다. 이 전략은 당시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영구적인 것은 못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외국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에서 그 나라 환경과 실정에 맞도록 신축성있게 교육훈련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즉 자체교육과 선진국 유학을 균형있게 배려해야 하며 해외두뇌를 과감하게 받아들이되 이들을 활용해 재빨리 국내에서 인력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과학원의 설립

그러한 대비책 중 핵심이 한국과학원의 설립이었다. 60년대 후반 우리나라 공과대학은 매년 1만명에 육박하는 졸업자를 배출하고 있었지만 고급두뇌양성에 필요한 환경은 대단히 미약한 상태였다. 그 이유로는 첫째 공과대학 교육과정이 실제 응용과는 거리가 먼 이론위주의 교육이었고, 둘째 실험실습시설이 빈약했으며, 셋째 문제해결능력을 증진하는 교육이라기보다는 지식전달에 치중했으며, 넷째 교수진들이 공학(engineering system)에 관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점들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각 대학의 대학원교육은 고급두뇌의 양성기관으로서 질에서는 물론 양적 측면에서도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한국과학원 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된 69년 당시 이공계 대학원 학생 총수는 6백여명에 불과했고 이들 소수 학생들마저도 22개 대학원의 1백52개 학과에 분산돼 있었다.

"대학원 교육은 대학의 장식물에 불과한 것 아니오. 대학원 졸업자나 대학 졸업자나 별다를게 뭐 있습니까?" 하는 식이었다. 실제 산업계에서 대학원 이수자(석사학위 취득자)는 대학졸업자와 동등하게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급과학기술두뇌에 대한 훈련은 전적으로 해외 교육기관에 의존했다. 그러나 해외파견이 단기적인 응급조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영구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는 없었다. 해외훈련 내용이 우리나라의 필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경비와 시간소모에 그치는 경우도 있었다.

한때 국내 기존 대학원의 집중육성으로 고급두뇌를 양성하는 방안이 검토됐으나 당시 대학원교육은 교육방법, 절차 및 체제에 있어서 교육법 등 각종 법령에 의해 장기간 강력히 통제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규정과 형식에 얽매여 내용이 빈곤한 채로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교육체제를 가진 기존 대학원들이 하루아침에 이러한 전통에서 탈피해 우리가 바라는 실질적인 두뇌양성기관으로 개편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60년대말 '특수 이공계대학원 설립이 시급하다'는 의견들이 도처에서 쏟아져나왔다. 전(前) 스탠퍼드대학 부총장 터만 박사(Freder E.Terman) 등 전문가들이 내한해 이에 대한 타당성을 조사했다. 그 결과에 따라 우리 정부는 독립대학원 설립을 결정하고 한국과학원법을 제정하여 1971년 2월 드디어 한국과학원이 발족된다.

한국과학원의 기본이념은 '경직되고 보수적이며 형식적인 기존 대학원의 교육형태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대학원 운영체제를 도입, 발전시킴으로써 고급과학기술 두뇌의 국내 양성체제를 형성하고 기존 대학원 체제의 개선 발전을 유도하며 궁극적으로 고급 과학기술두뇌의 양산체제를 갖추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목표달성을 위하여 한국과학원은 많은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중 중요한 것으로는 첫째 각종 교육법규의 적용을 받지않고 한국과학원법에 의하여 설립운영되는 특수 이공계 대학원이라는 점이다. 종래의 고식적인 대학원 운영형태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학사운영에 의하여 합리적이고 신축성있는 교육체제의 형성이 가능하도록 했다. 둘째 재정은 정부가 출연금 형식으로 부담하지만 정부는 그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운영은 이사회에서 자체적으로 행하도록 되어 있다. 셋째 양적으로 충분하고 질적으로 우수한 교수요원을 확보하며 그 교수가 선정한 최신의 실험실습시설이 주어진다. 이것은 운영의 자율성과 운영비의 적정한 공급에 의하여 가능하다. 넷째 선택된 학생들은 병역상의 특별조치를 받는 동시에 충분한 장학금과 연구비의 지급, 기숙사의 제공 등 특별대우를 받게 된다. 단 졸업자는 국내산업계 교육계 및 연구기관 등에서 3년간 의무적으로 근무한다. 다섯째 산학협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산학제학생' 제도를 두어 산학제학생은 산업계 군기관 학교 연구기관 등에서 직을 가진채 입학하고 그 기관이 소요경비를 부담하며 학위 취득 후 소속기관에 복귀하여 근무한다.

여기서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대학원은 자칫 잘못하면 외부와 유리된 상아탑적인 존재가 되기 쉽지만 한국과학원은 결코 지식추구를 위한 '학문의 전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경제발전을 위한 '고급두뇌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소수정예를 고집

한국과학원은 다른 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획기적인 고급두뇌 양성기관이다. 그러나 이 기관의 출범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기존대학들의 극심한 반발에 봉착했다. "기존 대학원을 보강하는 것이어야지 특수대학원이 뭐가 필요하느냐?" 이런 반발을 무마하느라고 무진 애를 먹었다. 특히 어려웠던 문제는 병역특혜였다. 과학기술개발에 관한 것이면 뭐든지 지원을 아끼지 않던 박대통령도 이 문제만은 완강했다.

"병역은 국민 전부가 평등하게 져야할 의무요, 최박사. 이 의무만은 예외가 있을 수 없오."

"당연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한참 창의력을 개발해야할 연령의 우수한 젊은 두뇌들이 군대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완곡하게 꾸준히 설득을 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73년 처음으로 한국과학원 입학생을 모집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우수한 대학 졸업생들이 5백명 이상 응모했다. 나는 늘 "대학이나 대학원 교육은 양보다 질이 우선되어야 한다. 소수정예를 선발해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교무처장이던 전무식 박사(현 KAIST교수·화학)에게 이렇게 지시하였다.

"가능한 엄격한 시험을 치르도록 하시오. 우리가 생각한 수준에 미달되면 한 사람도 뽑지 않아도 좋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4백50여명이 합격선에 들었다. 그러자 당시 과학원 원장으로 있던 박달조 박사는 "미국에서도 이렇게 우수한 학생들은 드뭅니다. 무리가 되더라도 4백50명 전원을 받아들이도록 합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다수를 평준화시키는 것보다 소수를 정예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겨 결국 1백6명만을 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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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기획

    박진희 자유기고가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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