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소화기관은 두뇌의 일방적인 통제를 받는 것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소화기관에도 두뇌 못지 않은 지각과 반응 기능을 갖는 '뇌' 가 있다. 신경안정제를 먹으면 설사가 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무대에 오르기 전 배우들의 위(胃)가 긴장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또 입시를 앞두거나 입사 면접이 가까워 오면 왜 장(腸)은 경련을 일으키곤 할까.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복통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이 인체가 두개의 뇌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잘 알려져 있듯이 두개골에 있는 뇌이고, 다른 하나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생명유지에 필요한 '소화관 뇌' 다. 이들 두개의 뇌는 서로 연결돼 있어 하나가 탈이 나면 다른 것에도 이상이 생긴다.
소화관 뇌의 두가지 신경망
소화 안되면 악몽을 꾼다
장 신경계(enteric nervous system)라 불리는 소화관 뇌는 식도와 위, 소장, 대장의 내막(內膜) 조직에 위치한다. 이 신경계는 두뇌와 마찬가지로 뉴런과 신경전달물질, 그리고 뉴런 사이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백질 등으로 구성된다.
소화관은 두뇌의 신호를 어떻게 감지할까. 장 조직 내부의 두 층에 걸친 신경조직(근층간 신경총과 점막하 신경총)이 두뇌의 정보를 전달받는다. 두뇌가 이곳에 있는 소수의 '명령 뉴런' 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이 뉴런은 다시 '중간 뉴런' 에게 신호를 보낸다.
이 신경조직들은 당, 단백질, 산도 등에 대한 감지 장치를 갖고 있어 소화가 얼마나 진행됐는가를 알고, 소화관이 어떻게 내용물을 혼합하고 내보낼 것인지를 결정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소화관은 두뇌와 마찬가지로 복잡하고 통합적인 연결망을 갖는다.
런던 대학의 위장한 교수인 데이빗 박사는 "소화관 뇌와 두뇌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을 때 같은 패턴으로 행동한다" 고 말한다. 잠잘 때 두뇌는 90분 간격으로 꿈을 꾸는 렘수면(rapid eye movement)상태에 이른다. 소화관 뇌도 마찬가지다. 밤에 음식물이 없을 때 소화관 근육은 90분 간격으로 서서히 수축되다 요동치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 사이클을 통해 두 개의 뇌가 서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한 예로 위장 장애 환자들은 비정상적인 렘수면을 갖는다. 이는 '소화 불량에 걸리면 악몽을 꾼다' 는 속설과도 일치한다.
윈게이트박사는 "진화의 시각에서 볼 때 신체가 두개의 뇌를 갖는 것이 타당하다" 고 말한다. 동물들은 먹이를 많이 찾고 번식을 잘하기 위해 좀더 복잡한 뇌가 필요했고, 그 결과 중추신경계가 발달됐다. 그러나 출생직후부터 신생아가 먹고 소화시키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에, 소화관 뇌를 갓 태어난 동물의 머리 속에 '집어 넣기'는 곤란했다. 이 때문에 고등동물의 경우 소화관 신경계는 하나의 독자적인 회로로 보존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신경계는 중추신경계에 느슨하게 연결돼 있어 두뇌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발생학자들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배(胚)가 형성되는 초기에 신경릉이라는 조직이 형성되는데, 그 한 부분은 중추신경계가 되고 다른 부분은 이동해 소화관 신경게가 된다는 것이다.
두뇌처럼 명석한 뱃속 신경계
그러나 "창자에 뇌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 콜롬비아 장로교 의료원의 해부학 미치 세포할 교수인 마이클 거손 박사는 말한다. 거손 박사는 '신경 위장병학' 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개척자다.
거손 박사에 따르면, 궤양이나 만성적 복통을 앓거나 음식을 삼키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이제까지 그 증상들이 순전히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신경성 문제라는 말만 들어왔다. 따라서 병을 고치기 위해 정신과 출입만 계속해야 한다.
"의사들이 이 증상을 뇌의 탓으로 돌린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들은 '엉뚱한' 뇌를 지목하고 있다"고 거손 박사는 말한다. 그는 "대장염이나 과민성 대장증상과 같은 위장 질병의 상당수는 소화관 뇌에서 이상이 생긴것" 이라고 주장한다.
최근까지 학자들은 소화관의 근육이나 지각을 담당하는 신경섬유가 두뇌에 직접 연결돼 있고, 두뇌의 소화관의 활동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소화관을 통제한다고 생각했다. 소화관은 단순히 반사 기능만 갖는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소화관에 있는 신경섬유를 헤아려 보지 않았다. 그러나 한 실험에 따르면 소화관에는 무려 1억개의 뉴런이 있는데, 이는 척수에 있는 것보다 많은 숫자다.
두뇌 활동을 돕는 거의 대부분의 물질도 소화관에서 발견된다. 소화관에도 세로토닌, 도파민, 글루타민산염, 노르에피네프리느 산화질소 등과 같은 주요 신경전달물질이 존재한다. 또 뇌 단백질 24가지와 면역체계의 주요 세포들도 소화관에 존재한다. 인체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아편제의 한 종류(enkephalin)도 발견된다. 한 연구에서는 소화관이 신경안정제 역할을 하는 벤조디아제핀의 풍부한 공급원임이 밝혀져 연구자들을 놀라게 했다.
두가지 뇌사이의 연관 회로에 대한 연구 덕분에 학자들은 인간이 왜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느끼는 가를 보다 많이 알게 됐다. 무서운 상황에 처했을 때 두뇌는 신체가 저항하거나 달아날 준비를 하도록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한다. 이 화학적 자극 때문에 소화관 내 감각 신경은 위의 긴장감을 일으킨다. 만일 상황이 급박해지면 두뇌는 소화관 뇌에게 작동을 멈추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래서 겁에 질려 도망가는 동물은 아무리 급해도 대변을 보려고 멈추지 않는다.
변비가 일어나는 이유
여러가지 약물이 일으키는 부작용도 두뇌 사이의 회로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다. 거손박사는 "현재 프로작이나 이와 유사한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사람중 4분의 1을 설사, 변비 등의 위장 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한다. 즉 정신질환 관련 약물이 소화관에 예상치 못한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거손 박사는 돼지 결장(結腸)을 대상으로 몇가지 실험을 수행했다. 먼저 결장의 한쪽 구멍에 작은 환약을 수행했다. 먼저 결장의 한쪽 구멍에 작은 환약을 집어 넣었다. 이때 결장은 인체에서와 마찬가지로 환약을 '항문' 쪽으로 내려보냈다. 그런데 결장에 프로작을 조금 첨가하자 환약의 이동 속도가 두배나 빨라졌다. 이는 프로작으로 인해 설사가 종종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프로작의 양을 훨씬 많이 투여하자 환약의 움직임은 멈췄다. 거손 박사는 "이는 결장 기능이 정지된 것으로, 이 약물을 복용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변비가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한다" 고 말한다.
이외에도 에리트로마이신과 같은 일부 항생제는 소화관을 진동시켜 경련을 일으킬수 있다. 또한 모르핀, 헤로인 등의 마약은 소화관의 아편제 수용기에 결합해 변비를 일으킨다. 즉 두뇌나 소화관 뇌 모두 아편제에 중독될 수 있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스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변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소화관에 있는 신경도 두뇌에 있는 신경만큼 손상됐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의 소화관에서 두뇌 고통을 완화해주는 벤조디아제핀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두뇌는 벤조디아제핀에 반응하는 수용체를 갖는다. 메릴랜드 국립위생연구소 신경화학자인 안토니 바질 박사는 몇년전 이탈리아의 간기능 장애 환자에게 발견된 흥미로운 현상을 소개했다.
환자들은 종종 깊은 혼수상태에 빠지곤 하는데, 이들에게 벤조디아제핀의 작용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자 몇 분 안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간에 손상이 오면 평소 간에서 분해되던 물질이 곧바로 뇌에 도달한다. 그 물질 중 일부는 '스컹크가 내뿜는 냄새' 를 피우는 메르캅탄이나 암모니아과 같은 유해한 화합물이다. 그러나 벤조디아제핀이 곧장 뇌로 가 환자들의 의식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바질 박사는 "이것이 소화관 내 박테리아가 만든것인지, 음식물에서 온 것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고 말한다.
윗속 뇌도 학습능력이 있을까
소화관 뇌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 됐음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의문점은 남는다. 소화관 뇌에도 학습 능력이 있을까. 소화관 뇌도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까. 거손 박사는 하반신 불수 환자들을 돌보던 한 간호사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환자들은 척수가 손상된 탓에 변을 제대로 못봐 장에 변이 가득 차곤 했다.
간호사는 배변에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던지 매일 아침 10시에 환자들에게 관장을 시켰다. 얼마 후 그가 다른병동으로 옮겨가자 그의 후임자는 관장을 매일 시키지 않고 대변이 장에 꽉 찼을 때만 시행했다. 그러나 매일 아침 10시 환자들은 관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변을 보았다. 결국 간호사가 환자들의 대장을 훈련시킨 것일까. 아직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창자에 좋고 싫은 여러가지 감정이 담겨있다고 믿었다. 아마도 두뇌의 감정 상태가 소화관의 뇌에 반영되고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