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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죽는 사람에게도 권리 있다

뇌사자는 뇌만 죽은 것이지 심장이나 폐장, 간장 등의 장기가 살아 있는 상태다. 조만간 '죽을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직 '죽은 사람'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났다 죽는다. 출생과 사망은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시작과 끝의 정확한 시기를 언제로 보느냐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 특히 죽음의 시기에 관해 요즘 '뇌사'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함으로써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뇌사설'에 따르면, 대뇌 소뇌 뇌관 등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면 조만간, 즉 늦어도 2주 이내에는 사람이 죽는다. 따라서 죽음의 시기를 심장사보다 앞당겨 뇌가 죽은 때를 사람의 죽음으로 보자는 것이다.

법에서는 사람이 출생과 더불어 권리 능력을 갖게 되고 사망과 더불어 권리능력을 상실한다고 돼 있을 뿐, 언제 사람이 태어나고 죽느냐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 사람이 새로 태어났다는 사실과 의사의 사망 진단서가 첨부된 사망사실을 관청에 신고하면, 법률상 사람은 태어나고 사망한 것이 된다. 그때부터 죽은 사람은 출생과 더불어 갖게 된 모든 권리 능력을 상실한다. 계약당사자가 될 수도 없고, 물건에 대한 소유권도 가질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 그리고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법률문제, 예컨대 상속의 개시나 유언의 효력발생, 생명보험금이나 연금의 청구권 발생 등 죽음을 전제한 모든 법적 효과가 생기게 된다.

또한 형법상의 문제로서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그의 의사에 반해 죽이면 살인죄가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의사에 따라, 즉 그의 승낙이나 촉탁을 받고 죽이는 경우도 촉탁·승낙살인죄가 성립한다. 이처럼 법률적으로 볼 때 생과 사는 대단히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런 문제들은 뇌사설이 대두되기 전까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심장사가 죽음으로 인정되고 있으므로 의학적으로, 법률적·윤리적으로, 그리고 일반인의 인식에서도 아무런 차이나 충돌이 생기지 않았다.

사망진단서 뗄 수 없어
 

세계 최초로 간 심장 신장 등 3개 기관을 이식받은 여인과 그의 남편.


그러나 뇌사자의 장기이식이 가능해지면서 죽음의 시기에 관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장기이식은 살아 있는 장기를 적출하여 이식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이미 심장사한 사람의 장기는 이식이 불가능하다.

뇌사는 뇌만 죽은 것이지 심장이나 폐장, 간장 등의 장기가 살아 있는 상태다. 즉 뇌사는 인공심폐기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아직 심장이 뛰고 있고 호흡을 하며 영양섭취도 가능하고 체온도 유지되는 상태다.

따라서 뇌사는 조만간 심장사에 이어진다고는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예컨대 교통사고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가 뇌사상태에 빠져 의식은 없고 조만간 죽을 사람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인공심폐기의 도움을 받아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체온도 유지하고 있다면 누가 그 환자를 죽은 사람이라고 볼 것 인가.

이때 의사도 법적 죽음에 필요한 사망진단서를 뗄 수 없다. 뇌사자는 의학적으로는 사망했을지 모르지만 법률적으로나 일반인의 상식에 비추어서는 아직 죽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조만간 '죽을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직 '죽은 사람'은 아니다.

뇌사자 장기이식이 야기하는 법적 문제는 생명의 존엄성과 생명권의 불가침성을 기본적 인권으로 보장하는 법정신에 반한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행해지는 뇌사자 장기 이식은 현행 법체계상 명백한 위법 행위다. 우리 헌법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권을 불가침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으며, 형법은 이에 따라 살인죄 및 촉탁·승낙살인죄를 처벌하고 있기 때문이다.

뇌사자 장기이식에서 생명과 생명이 충돌하는 비극적 상황을 법도 원만하게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외면해서도 안된다. 법은 뇌사자의 죽음의 과정을 법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법적 통제 없이 내버려둘 때 최고의 법가치인 생명권의 침해는 막을 수 없다. 뇌사자의 승낙 없이 장기적출을 한다거나, 뇌사판정이 객관성을 상실한다거나, 장기이식이 장기를 팔고 사는 매매행위를 통해 행해진다거나, 또는 생체실험용으로 이용된다거나 할 때,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소멸되며 생명은 목적가치를 상실해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의학의 발달로 살려낼 수 있는 생명은 더 많이 살려 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존엄하게 죽는 것도 살려내는 것만큼 중요하다. 의학의 관심은 살려내는 쪽에 있겠지만 법학의 관심은 존엄하게 죽는 쪽에 있다. 즉 죽는 사람에게서 어떤 권리가 침해되고 어떤 법가치가 파괴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 관심사다.

뇌사자의 장기이식을 인권의 침해 없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법이 개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장기이식의 특별법 제정이 불가피하다. 우리나라도 지금 장기이식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 가고 있는데, 늦기는 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뇌사자와 식물인간은 달라

뇌사자 장기이식 특별법에는 최소한 다음의 사항들이 반드시 규정돼야 한다.

첫째 형법 제252조의 촉탁·승낙살인죄의 적용을 배제하는 규정을 두어야 한다. 이런 규정을 두지 않으면 장기이식이 피해자 본인이나 가족의 승낙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현행법상 위법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뇌사가 무엇인가를 법적으로 명백히 규정하고 그 판단기준을 명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단순한 식물인간상태와 뇌사를 구별할 수 있다. 식물인간과 뇌사자는 의식 없이 혼수상태에 빠져있기는 마찬가지지만, 전자는 뇌간이 아직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몇 달 혹은 몇 년이고 그러한 무의식상태에서 살 수 있다. 그러나 뇌사자는 대뇌 소뇌뿐만 아니라 뇌간까지 기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길게 살아도 2주 이상은 생존이 불가능하다.

셋째 뇌사판정의 객관성이 보장돼야 한다. 이를 위해 최소한 3인 이상의 전문의로 구성되는 뇌사판정위원회가 설치돼야 한다. 뇌사판정의 공정성을 위해 주치의는 이 위원회에서 배제돼야 한다.

넷째 장기매매의 금지규정을 두어야 한다. 장기매매는 인신매매와 같이 위법이다. 따라서 장기는 오로지 기증에 의할 때만 제공한다.

다섯째 장기배분의 공정성을 위해 장기이식을 필요로 하는 환자를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미리 조사해 배분순위를 정해놓도록 한다.

여섯째 피해자 본인 또는 가족에 의한 승낙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승낙 없이 뇌사자의 장기를 적출하는 것은 살인행위이며, 살인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피해자 자신이 승낙하는 경우, 또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가족의 승낙이 있는 경우는, 승낙살인죄의 적용을 특별법에서 배제하는 한 위법이 아니며 또한 윤리적으로도 정당한 자기결정권과 자기처분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 승낙은 자기의 생명을 포기함으로써 남의 생명을 소생시키는 차원 높은 도덕적 살신성인의 행위로서, 그 희생의 윤리적 순수성이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도 권리침해를 수반하지 않는다. 따라서 피해자의 승낙은 뇌사자 장기이식을 법적·윤리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열쇠로써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의학의 발달로 뇌사자의 장기이식은 법이 있건 없건,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이며, 다행히 피해자의 정당한 승낙에 따라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살리는 행위를 뉴스로 접할 때마다 우리는 숙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자기를 초월하는 도덕적 행위가 법에 의해 보장되지 않으면, 명백한 살인행위가 뇌사자 장기이식의 미명하에 은폐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장기이식 특별법 제정의 필연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의술의 발달로 살려낼 수 있는 생명은 더 많이 살려 내야 한다. 그러나 죽어가는 뇌사자의 생명도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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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심재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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