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을 몸에 묶고 추락하는 번지점프가 현대인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목숨을 건 '짜릿한 맛' 뒤에는 풀기 힘든 우리 뇌의 비밀이 담겨 있으니….
과학으로 풀어보는 레포츠
외줄 자일에 몸을 맡기고 무작정 꼭대기로 향하는 암벽등반, 가파른 계곡의 험한 급류를 헤쳐가는 레프팅, 비행기에서 떨어져 고공을 바람 부는 대로 날아다니는 스카이서핑…. 험한 세상살이 속에서 더욱 강한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목숨을 걸고 즐기는' 모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늘고 있다.
지난 여름 레저전문 업체 점보클럽이 대전 엑스피아월드에 문을 연 번지점프타워도 모험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명소가 됐다. 주말에는 2백-3백 명이, 평일에도40-50명의 인원이 일부러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 위해 기꺼이 1만8천원을 지불하고 T자형 탑꼭대기에 오른다.
점프대 높이 일정하지 않아
고무줄에 신체 일부를 묶고 수십m 아래로 '추락'하는 번지점프는 원래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인 바누아투(전에는 뉴헤브리즈라고 불림)의 펜테코스트섬 원주민들이 성인식과 얌 수확축제기간동안 벌였던 '담력 시험'에서 유래한 것이다(아프리카 일부 종족에서도 이와 유사한 성인식이 있었음). 이들은 탄력이 전혀 없는 칡이나 나무줄기 등을 엮어 발목에 묶고 맨 땅에 뛰어내림으로써 어른이 됐음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웹스터 영어사전에도 안나오는 번지(bungee, 혹은 bungy)란 단어는 이곳 원주민들의 발목을 묶었던 칡의 이름.
원주민들의 이 통과 의례는 80년대 중반 뉴질랜드에서 현대 스포츠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이보다 앞선 79년 영국 브리스톨에 있는 클리프론 서스펜션 브리지에서 시작됐다.
번지점프는 절벽이나 다리 등에서 강물로 뛰어드는 방식에서 차츰 고층건물의 옥상이나 건설 현장의 크레인 등 고정된 지형지물에서 지상에 설치된 안전판 위로 떨어지는 방식으로 변했다. 본격적인 대중화가 시작된 것은 사시사철 언제라도 점프가 가능한 번지점프 전용 타워가 등장하면서부터.
번지점프의 경기 방법은 안전띠를 묶는 방식에 따라 뉴질랜드식과 미국식으로 구별된다. 뉴질랜드식은 발목 부분을 묶고 떨어지는 방식. 이는 매우 위험하지만 '간 큰' 선남선녀들은 "위험한만큼 짜릿함도 더하다"며 이 방식에 열광한다. 반면 미국식은 신체 위 아래를 연결하는 안전벨트를 가슴에 묶고 뛰어내린다. 이는 발목을 묶는 것보다 더 넓은 면적을 묶음으로써 안전하게 체중을 지탱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안정감도 제공해 번지점프가 본격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엑스피아월드 점프타워 설계에 참여한 점보클럽 한정훈씨에 따르면 뉴질랜드식은 전세계적으로 1년에 10여 건의 사고가 보고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미국식은 아직 '무사고 운행 중'이라고 한다. 국내에 설치된 번지점프대 역시 미국식이다.
번지점프가 벌어지는 지상 높이에는 뚜렷한 기준이 없다. 전세계적으로는 뉴질랜드에 있는 1백5m짜리가 가장 긴 추락거리를 가진 고정식 번지점프대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록 도전에 나선 사람들이 열기구나 헬기를 타고 고공에서 점프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10월15일 3천m 상공에 열기구를 타고 올라가 1천m 번지점프를 실시한 우리나라 항공스포츠 전문가 송재일씨(35)의 기록이 현재 수립된 세계 기록.
모험가들이 아닌, 일반인이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내릴 수 있는 '심리적 마지노선'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굳이 찾아보자면 번지점프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공수부대의 점프연습장(일명 막타워) 높이가 11m인 것은 이 높이에서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란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실제로 10m나 12m 높이에서는 오히려 11m에서 느끼는 것보다 공포감이 줄어든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안전 관건은 생고무줄
안전띠를 어디에 묶든 간에 미국식 뉴질랜드식 모두 번지점프에 사용하는 기구는 대동소이하다. 물론 번지타워를 설치하는 회사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21m 높이의 엑스피아월드 번지점프 타워를 설치한 미국 인트레드(Intrade)사 제품을 예로 알아보자.
이 회사는 번지점프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대략8세 이상(18세 미만은 부모의 서면 동의 필요)으로 36㎏에서 최고 1백9㎏사이의 체중을 가진 남녀로 사용자를 제한하고 있다. 이 기준을 충족시킨 사람은 몸에 안전띠를 장착하고 이를 번지코드(cord, 줄)와 연결한 뒤 지상 높이 3m의 에어백 위로 뛰어내린다. 번지 코드는 지름 1.2-1.3㎜ 의 생고무줄을 최소 8백가닥에서 1천4백가닥씩 묶어 만드는데, 하나의 길이는 4.5m이며 최대 3배까지 늘어난다. 고무줄 가닥수는 체중에 따라 4단계로 나뉜다.
이에 따라 점프자는 번지코드의 길이 만큼인 4.5m를 자유낙하하고 그 다음부터는 고무줄의 탄력을 받으며 에어백 최상부 1m지점 부근까지 떨어진다. 일단 떨어지면 꼭대기에서 이 고무줄을 지탱하고 있는 쇠줄에 연결된 유압시스템의 조작을 통해 4-5회의 반동이 이루어지는데, 매번 70%씩 감소된 탄성으로 점프한 사람의 추락속도를 줄여나간다.
번지점프의 안전을 확보하는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번지코드 자체에 달려 있다. 각 회사들은 어떤 요소보다도 코드의 결함으로 인한 사고를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3백번 이상 사용하거나, 그 횟수만큼 사용하진 않았어도 설치한 지 6개월이 지나면 코드를 교체하기로 정했다. 당연히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손상을 입은 경우도 마찬가지.
0.2초 동안의 무념무상
'성인이 되기 위한 강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왜 목숨을 걸고 점프대에 오르는 것일까. 인간이 항상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이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위험을 자초하는 이른바 '모험 스포츠'에 대해서 당사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 눈에는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번지점프를 경험한 사람들은 "겁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발이 허공으로 떨어지는 순간의 그 짜릿함은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무념무상의 상태는 불과0.2-0.3초로 끝난다. 떨어지는 자세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해도 대략 평균 초속95m 이상의 속도로 낙하하기 때문에 21m의 높이라면 안전판 위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다.
여기서 잠시 번지점프에 의한 추락이 인체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자. 앞서 소개한 송재일씨는 세계기록 도전 준비 과정에서 하루 동안에 무려 28회의 번지점프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가 겪은 신체 이상은 가벼운 목 뻐근함과 관절 이완에 따른 근육통이 전부였다고 한다. 송씨는 실제 기록도전 당시 낙하과정에서 오른쪽 허벅지에 강한 충격을 느꼈는데, 이는 허공에 떴던 몸이 줄에 잡아 채여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기 보다는 줄에 맞은 것 같다는 것.
그러나 송씨의 경우 그가 14년 동안 줄기차게 운동을 계속해온 강건체질임을 고려할 때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일반화해 적용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번지점프를 경험한 사람들 대부분은 에어백에 안착하고 나서도 멍한 느낌이 한동안 지속됐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멍한 느낌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지구상에 있는 물체는 모두 지구 중심을 향해 떨어진다(지구중력). 그리고 지구 인력에 의해 발생하는 가속도는9.8m/${초}^{2}$로 항상 일정하다(중력 가속도, g). 다시 말해 지구 상공의 진공 공간에서 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무게나 부피에 관계없이 그 속력이 매초9.8m씩 증가하면서 낙하, 결국 땅에 떨어지는 것인데, 흔히 1g로 표현되는 이 가속도는 인체의 다리 부분에 작용하며 대부분의 사람은 5g까지 견뎌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번지코드가 몸을 잡아채는 순간에는 속도가 급속히 감속되는 -g현상이 일어난다. -g에 노출되면 인체는 두부의 동맥압과 정맥압이 증가되고 심장 박동수가 줄어들면서 정신혼란과 의식상실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상태가 되기까지 -g가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는 정확히 측정되진 않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고되고 있는 대부분의 번지점프 사고는 줄의 결함보다는 점프자의 심장마비가 압도적으로 많다.
공군 항공의학 적성훈련원의 초내성훈련부장 박원서 중령의 설명을 들어보자. "+g상태에서 사람은 머리에 피가 도달하지 못해 현기증 등을 일으키는 블랙아웃(black out)현상이 일어나고, -g상태에서는 안구에까지 피가 몰려 온통 세상이 벌걸게 보이는 레드아웃(red out)현상이 일어난다. 점프한 사람이 다시 반동해 올라가는 순간의 줄 장력에 몸무게가 얼마나 실리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급격한 가속도가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물론 번지점프처럼 순간에 추락이 끝나는 경우라면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 인간이 급격한 추락속도 감소에서 견딜 수 있는 내성 한계가 정확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영국에서 수행된 한 연구는 -2g에서 5분까지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번지점프는 일종의 각성제?
번지점프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은 공포와 쾌감이다. 공포에 노출되면 뇌의 교감신경계가 흥분해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들 호르몬의 작용에 따라 인체는 땀이 나고 혈관수축으로 인해 맥박과 혈압이 올라가는 등의 생리반응을 보인다.
공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이를 피하거나 또는 적극적으로 맞서는 두가지 뿐이다. 번지점프는 이 가운데 후자에 속한다. 심리학에서는 '항공포방어'(counter phobic defence)메커니즘이라는 용어로 적극적인 공포 체험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위험천만한 놀이는 공포와 스릴, 그리고 이를 극복해냈을 때의 희열감을 통해 가장 극적으로 살아있다는 쾌감을 맞보게 한다고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 뇌는 공포를 쾌감으로 변화시키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뇌의 어떤 부위에서 공포와 쾌감을 느끼고, 어떻게 이를 변화시키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서울대 의대 약리학과 서유헌 교수에 따르면 쾌감을 관장하는 1차 중추는 A10신경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유력한 설이라고 한다.
A10신경의 말단은 시상하부와 대뇌 변연계 등 인간의 정신활동을 담당하는 신경계와 통하는데, 여기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한다. 도파민은 고도의 정신작용과 쾌감작용 및 각성작용을 하기 때문에 '쾌감물질'이라 불린다. 분자구조 역시 각성제와 유사하다.
결국 공포와 쾌감이라는 극과 극의 현상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번지점프는 고단하고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각성제와 같은 효과를 준다고 볼 수 있다.
위험성을 둘러싸고 수없는 논쟁을 거치면서도 날이 갈수록 목숨을 건 각종 모험 스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