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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30주년 따스한 백열전구 역사 속으로

해마다 12월 31일이 되면 서울 종로보신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다. 130년 전 미국 뉴저지에서도 이처럼 독특하게 새해를 맞는 행사가 있었다. 1879년 12월 31일 멘로파크에서 열린 백열전구 시연 행사였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2년 동안 준비한 자신의 야심작을 이 자리에서 드라마틱하게 공개했다.

뉴욕 시에 새로운 빛을 선사하겠다는 에디슨의 호언장담이 어떻게 실현될까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에디슨의 멘로파크 발명공장과 길거리를 밝힌 53개의 백열전구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이날 모인 사람은 3000명 정도였고, 이들을 나르기 위해 특별 수송 열차까지 편성됐다고 한다. 원래 시연 행사를 하기로 한 날짜는 31일 하루였지만, 새해 첫날에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행사는 하루 연장됐다. 가스등과 달리 연기가 나지 않고, 아크등과 달리 빛이 강렬하지 않은, 은은한 백열전구의 오렌지 빛에 사람들은 감동을 금치 못했다.



필라멘트에 백금보다 탄화 판지가 우수

이날의 시연은 백열전구가 실험실을 벗어나 일상 공간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됨을 의미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과학자나 발명가, 기술자는 아크등처럼 전기를 이용해 실내를 밝힐 수 있는 전구를 개발하는 일에 매달려 왔다. 1845년에 이미 탄소와 토리첼리안 진공 튜브를 이용한 백열전구 특허가 나와 있었고, 영국인 물리학자 죠세프 윌슨 스완도 1870년대 중반에 진공 유리구와 탄화 종이 필라멘트로 만든 전구 실험에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전구는 아직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무렵 1878년 9월, 에디슨은 “하나의 기계로 1000개, 아니 1만 개의 전등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호언장담했다. 에디슨은 개개인이 여러 개의 전구를 각각 따로 켜고 끌 수 있으려면 전구를 병렬로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병렬 회로에서 에너지 손실을 줄이려면 구리 도선의 단면적이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도선을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전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전압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로에 연결되는 전구의 필라멘트가 높은 저항을 가져야 했다. 에디슨은 백금으로 만든 필라멘트가 그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금 필라멘트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에디슨과 멘로파크 발명공장의 연구원들은 저항이 높으면서 백열광을 낼 수 있는 필라멘트를 찾아 실험을 수천 번 거듭했다. 백금 대신에 탄소를 이용하기도 하고, 면, 린넨 실, 판지, 여러 형태로 감긴 종이, 흑색 램프, 탄소를 타르와 섞어서 만든 철사를 실험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79년 10월 22일 에디슨의 조수 찰스 배철러는 탄화 오븐에서 구운 무명실로 필라멘트를 만들면 14시간 동안 백열광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에디슨은 이를 바탕으로 진공 유리구에 나선형 탄소 필라멘트가 아치 모양으로 들어가는 전구를 개발해 11월 4일 특허로 등록했다.

에디슨은 그 이후로도 실험을 계속해 탄화 판지 필라멘트와 탄화 대나무 필라멘트를 개발해냈다. 이것들은 처음 개발한 필라멘트보다 수명이 훨씬 길어 제품으로도 개발될 수 있었다. 12월 31일 시연에 썼던 백열전구가 바로 탄화 판지 필라멘트를 이용한 전구였고, 1880년에서 1893년까지 판매된 백열전구에는 탄화 대나무 필라멘트가 들어갔다. 백열전구가 실험실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에디슨, 특허 침해 소송에 휘말리다

에디슨의 백열전구가 가장 먼저 빛난 곳은 증기선 컬럼비아 호였다. 1880년 2월 컬럼비아 호에 설치된 백열전구에 에디슨은 따로 개발한 전등 소켓을 부착하고,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에 대비해 퓨즈와 스위치도 함께 설치했다. 단순히 전구만 개발하는 게 아니라, 전구를 안전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조명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1878년 백열전구를 구상할 당시부터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백열전구가 기존의 가스 조명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오래가는 필라멘트뿐 아니라 발전기, 전선, 전기 계량기 같은 부대기기도 동시에 개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에디슨은 백열전구를 개발하는 동안 발전기 연구를 계속했고, 전기 계량기 개발에도 결국 성공했다. 그가 개발한 기기들 덕분에 백열전구는 좀 더 빨리, 그리고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에 녹아들 수 있었다.

백열전구를 이용한 완벽한 조명 시스템이 첫선을 보인 곳은 뉴욕 금융가 펄스트리트255~257번지였다. 그는 이곳에 중앙 발전식 조명 시스템을 설치해 백열전구가 기존의 가스 조명 시스템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에디슨은 1882년 9월, 구상 중이던 중앙 발전식 조명 시스템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이목이 집중될 수 있는 뉴욕 금융가에 설치했다. 여기엔 예상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었다.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전선을 모두 땅에 묻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조명 시스템은 5년 동안 수익을 단 한 푼도 내지 못했지만 그 대신 홍보 효과를 톡톡히 냈다. 이때부터 백열전구 조명 시스템은 인구가 작은 소도시로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로는 실내 가스등으로 인한 폭발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실생활에 적용하기까지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에디슨은 특허 침해 소송에 많이 휘말렸다. 사실 백열전구는 에디슨의 단독 발명품은 아니었다. 에디슨은 탄소 필라멘트가 들어간 진공 유리에 구리 봉인을 한 백열전구에 대해 특허를 받았는데, 여기에 들어간 요소 기술들은 각각 발명한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전구 개발 분야의 경쟁자였던 윌리엄 소여는 자신이 특허 낸 ‘탄화 판지 필라멘트’ 기술을 에디슨이 도용했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1885년에는 독일의 발명가 하인리히 괴벨과의 소송이 7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다. 괴벨의 아들은 에디슨이 특허를 받은 백열전구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 이전에 개발했던 전구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은 에디슨의 손을 들어줬다. 1893년 괴벨이 탄소 필라멘트와 진공 유리로 유사한 실험을 했지만 실생활에서 쓰일 수 있는 전구를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괴벨의 실험이 에디슨의 발명보다 선행한다는 증거도 불충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소송의 결과는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실생활에 활용될 수 있는’ 백열전구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툭하면 고장 난 ‘건달불’의 추억

미국과 유럽을 매혹시켰던 백열전구의 오렌지색 빛은 개화기 우리나라에서도 화젯거리였다.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절단(報聘使節團)은 발전소와 전신국을 방문하면서 전기의 위력, 특히 에디슨의 백열등이 발하는 밝은 빛에 매료되고 말았다. 밀초나 쇠기름으로 켠 희미한 촛불에 익숙하던 그들에게 백열등의 밝은 빛은 개화된 문명의 빛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귀국 후 고종에게 자신들이 받은 강렬한 인상을 전달했다. 전기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고종은 전등 설치를 허가했고 그로부터 3개월 뒤 조선 정부는 정식으로 설비 공사를 발주했다.

공사는 1887년 3월 마무리됐다. 국내 최초의 백열전구 점등은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천궁에서 이뤄졌다. 건천궁에 설치된 전등은 100촉짜리 전구 2개가 전부였지만, 이 공사로 경복궁 내부에는 16촉 전등이 모두 750개가 설치됐다. 조명에 필요한 전기는 향원정 물을 이용하는 30kW의 가스 전동기 한 대와 직류 발전기로 공급했다.

건천궁의 전등 점화는 성공적이었지만, 그 이후로 진행됐던 전등 사업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설비 자체의 비용과 발전 시설을 운전하기 위해 필요한 석탄 비용, 외국 기술자 초빙에 따른 비용이 너무 높았기 때문에 전등을 켜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게다가 설치한 전등은 툭하면 고장이 나서 불이 꺼지거나 소음이 발생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전등을 ‘건달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궁궐 내의 전등 사업은 계속돼 1903년에는 마침내 경운궁에 자가 발전소가 들어서고 궁 안에 900개의 백열전구가 밝혀졌다. 한편 1900년 4월에는 한미 합작회사인 ‘한성전기’가 종로 네거리에 국내 최초의 가로등을 설치했다. 한성전기가 서울 진고개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일본 상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벌이면서 저잣거리에도 전등이 걸리기 시작했다. 다음 해인 1901년 5월에는 진고개 일대에 600개의 전구가 설치됐다.

건달불이 일상이 된 시기는 건천궁에서 첫 점등이 이뤄지고도 한참 뒤인 해방 이후였다. 그 뒤로 60여 년간 백열전구는 우리의 밤을 함께 밝혀왔다. 그러던 백열전구가 이제 곧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온실가스를 감축하기 위해 효율이 높은 조명으로 교체되기 때문이다. 유럽은 올해부터 100W 백열전구 판매를 금지했고, 오는 2012년까지는 40W, 25W 전구까지도 판매금지를 할 예정이다. 한국도 백열전구를 새로운 LED 조명으로 대체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때는 근대 문명을 선도했던 백열전구가 환경의 시대를 맞아 조용히 퇴임을 맞고 있다.
 

200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박진희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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