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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특실 즈베즈다 도킹성공의 내막

갈팡질팡 국제 우주정거장 제자리 찾나

최근 국제우주정거장 거주모듈 '즈베즈다'가 도킹에 성공했다.즈베즈다의 주목적은 우주인이 장기간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하지만 예정보다 일정이 2년정도 늦었다.1984년 초 미국의 발표 이후 국제우주정거장 계획은 갈팡질팡해왔다.그 속사정을 들춰보자.

인류가 지구 밖에서 살아가는 일은 이제 SF영화나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주정거장은 작은 시작이었다. 1984년 초부터 미국이 주도한 국제우주정거장은 가히 인류의 외계식민지라 할 만하다.

우주정거장에 우주인들이 머물기 때문에 고장난 위성을 쉽게 고칠 수 있고 위성발사체에 연료를 재충전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장차 건설될 월면기지나 화성기지를 향한 전초기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16개국이 참여하는 국제우주정거장 계획은 인류역사상 가장 복합적인 과학기술프로젝트이다. 하지만 규모나 계획이 방대한 만큼 우여곡절 또한 상당히 많았다.

15년만에 첫모듈 발사


발사 2주 뒤 즈베즈다(왼쪽)가 자르야(중앙)와 유니티(오른쪽)에 도킹된 모습의 상상도.


지난 7월 12일 오랜 기간 동안 지연됐던 러시아의‘즈베즈다’(러시아어로 ‘별’) 모듈(우주정거장을 구성하는 소형우주선)이 카자흐스탄에 있는 바이코누르 발사장에서 발사됐다. 그리고 2주 후 국제우주정거장의 본체와 도킹에 성공했다. 이제야 비로소 국제우주정거장은 우주인을 맞을 준비가 된 것이다. 즈베즈다 모듈은 그동안 러시아에 축적된 장기 우주체류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국제우주정거장의 첫 거주모듈이다.

즈베즈다 모듈이 우주정거장 계획에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발사 자체가 이렇게 늦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즈베즈다는 원래 1998년 4월에 발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제가 무너지고 발사체인 프로톤로켓에 문제가 생기면서 먼저 발사된 우주정거장을 거의 2년간이나 허공에 떠돌게 만들었다.

사실 국제우주정거장 계획이 지연된 적은 이번만이 아니다. 미·소의 우주개발경쟁이 한참이던 1984년 1월 레이건 당시 미국대통령은 80년대에 우주정거장을 건설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거의 15년 후인 1998년 11월에야 러시아의 프로톤로켓에 실린 자르야 모듈이 국제우주정거장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같은해 12월 미국우주왕복선 엔데버호에 의해 유니티 모듈이 덧붙여졌다. 그 뒤로 국제우주정거장은 또다른 모듈을 기다려왔지만 계획은 순조롭지 못했다.

급기야 올해 5월에는 우주정거장의 수리와 궤도조정을 위해 미국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가 우주정거장을 방문했다. 발사 후 1년반 만에 불안정한 전원공급을 보인 자르야 모듈에서 전지(사실 말이 전지지 74kg이나 되는 25만달러짜리 전지)를 교환했고 유니티 모듈에서는 안테나를 수리했다. 또 그동안 고층대기의 마찰로 인해 1주일에 2.4km씩 고도가 떨어지던 우주정거장의 궤도를 자체 분사엔진을 이용해서 약 43km 상승시켰다. 이 모두가 러시아의 즈베즈다를 맞기 위한 준비였다.

이렇게 보면 아틀란티스호의 방문은 러시아가 즈베즈다를 일찍 발사했더라면 필요치 않았을 비행이었다. 국제우주정거장의 건설일정이 지연되면서 쓸데없는 수리비용과 유지비용이 들고 있는 것이다.


국제우주정거장의 거주모듈인 즈베즈다가 금년 7월12일 러시아의 프로톤로켓에 실려 발사되는 모습.


미·소의 우주개발경쟁


국제우주정거장에 거주할 첫승무원들.선장인 미국의 빌 쉐퍼드(가운데),러시아의 세르게이 크리칼레프(왼쪽)와 유리 기드젠코(오른쪽),이들은 손을 잡고 있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협력관계는 순조롭지 못했다.


1957년 10월 4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옛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성공으로 인류의 우주시대가 열렸다. 이 사건을 미·소간의 관계로 좁혀서 보면 제2차 대전 직후 시작된 미·소의 로켓 개발경쟁이 12년만에 옛소련의 승리로 결판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름 57cm짜리 금속구인 스푸트니크가 미국에게 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미국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이후 10년간 의회의 예산배정시 과학교육과 우주개발분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다음해 1월 미국은 익스플로러를 쏘아올렸고 10월에는 NASA를 공식출범시켰다. 하지만 옛소련도 이에 뒤질세라 1961년 유리 가가린을 우주공간으로 보내 최초의 우주비행사를 탄생시켰다. 같은해 미국은 이에 맞서 케네디 대통령이 10년 내에 달로 사람을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1969년 7월 20일 인류역사상 최초로 아폴로11호의 우주인 암스트롱이 달표면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완승으로 끝나는 분위기였다.

유인 달 탐사를 미국에 선점당한 옛소련은 사람이 우주에서 생활할 수 있는 우주정거장을 건설하는 쪽에 힘을 쏟았다. 1971년 최초의 우주정거장 살류트를 우주공간에 띄웠다. 이후 살류트 계획은 7호까지 계속됐고 옛소련은 우주정거장의 노하우를 착실히 쌓아나갔다.

이에 자극받은 미국은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의 달착륙 선언을 상기시키듯 80년대에 우주정거장을 건설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천명했다. 이는 옛소련보다 더 뛰어난 우주정거장의 건설을 통해 우주개발의 주도권을 21세기까지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표명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우주정거장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프리덤’이라 불리는 초기의 우주정거장 건설계획은 80억달러를 예상한 8년짜리 프로젝트였지만 추정비용과 계획기간은 계산착오였다. 우주정거장 건설에 대한 추정비용은 해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결국 현재는 전체사업비가 6백억달러까지 늘어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여러차례 사업검토와 감사로 인해 건설계획은 지연됐고 계획 자체가 바뀌기도 했다.

급기야 1986년 1월에 일어난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사건은 다시 미국의 우주정거장 계획의 발목을 잡았다. 반면에 이로부터 한달 뒤 옛소련은 보란듯이 세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며 본격적인 우주정거장 미르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옛소련이 우주개발에 있어서 미국보다 한수 위임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으로서는 지금까지 들여온 공을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하자고 해도 미국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물론 수억달러의 ‘포기’ 비용이 필요했다. 미국은 자존심과 비용문제 사이에서 1993년 9월 ‘알파 우주정거장 계획’을 내놓았다. 이것은 전문가 실사팀에 의해 제시된 비용절감방안 중 기존의 성능이 입증된 하드웨어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안을 채택하라는 클린턴 대통령의 공표에 따른 것이었다.


2005년경 완성될 국제우주정거장의 상상도.미국이ㅡ 주도 하에 러시아를 포함한 16개국이 동참하고 있는데 우주정거장의 노하우를 가진 러시아의 참여자세가 소극적이다.


러시아, 구원자인가 방해꾼인가

그런데 1993년 말 러시아가 국제우주정거장 계획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옛소련 붕괴 이후 심각한 재정난으로 우주개발경쟁에서 뒤쳐져 있던 러시아가 우주정거장을 새로이 건설하는 것보다는 ‘훨씬 적은 비용으로’ 국제사회에 생색을 내며 도와주겠다는 의도였다. 미르호를 통한 우주정거장 운영의 경험이 축적돼 있는 ‘형님’으로서 한수 도와주는 꼴이었다.

러시아의 손길은 어려운 처지에 있던 미국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또 러시아는 1991년 3대의 미니 모듈을 제공하며 국제 파트너로 참여하겠다고 했던 이탈리아와는 비교가 안되는 원군이었다. 거기에다 이탈리아는 참여하는 대가로 자국의 우주인을 6년마다 90일씩 태워줄 것을 요구했었다.

러시아에게는 예의도 최대한 갖추었다. 1993년 11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국제우주정거장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각국 우주개발기관의 총수들이 모여, 12월에 러시아의 참여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1994년 러시아의 참여가 확정되면서 ‘알파 우주정거장 계획’은 비로소 현재의 ‘국제우주정거장 계획’으로 명명됐다.

그런데 러시아에게는 다른 속셈이 숨어 있었다. 러시아는 미르호의 운영에 많은 재정적 문제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미르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미르호의 스펙트르와 프리로다 모듈을 국제우주정거장의 기초로 제안했다.

하지만 NASA는 설계변경에 따른 비용과 일정문제를 이유로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후 NASA는 러시아가 오래된 미르호의 유지에 돈을 퍼붓기보다는 국제우주정거장에 힘을 쏟아주기를 요구했다. 물론 러시아가 미르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러시아는 두마리의 토끼를 쫓느라 갈팡질팡했다. 이 와중에도 NASA에 제공하기로 한 모듈을 자신들의 미르호에 투입해 계속 미르호를 살리려 했다. 간신히 1998년 11월 첫모듈인 ‘자르야’를 쏘아올렸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제가 무너지자 당초 1998년 4월에 발사예정이었던 국제우주정거장의 거주모듈‘즈베즈다’의 발사는 연기됐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는 1999년 프로톤로켓의 잇단 발사실패로 인해 그해 말로 연기했던 ‘즈베즈다’의 발사를 또다시 연기해야만 했다. 그 결과 NASA의 국제우주정거장 계획은 러시아의 이중적 태도로 1998년 말 첫모듈을 발사한 이래 1년반이 넘게 공회전을 했다.

급기야 NASA는 올해 초, 러시아가 또 발사에 실패하거나 연기한다면 미국의 모듈을 올리겠다고 독촉성 협박을 했다. 분명 러시아의 태도는 국제협력 파트너로서 문제가 있었다. 현재 미국의회 일각에서는 러시아에게 피해보상을 받아내야 한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우주정거장 계획에 재정적 어려움이 있고 러시아가 우주정거장에서의 장기체류에 관한한 한수 위이기 때문에 러시아를 무시하기도 힘들 것이다.

재정문제와 발사연기문제만이 국제우주정거장 계획을 지연시킨 것은 아니었다. 정치판에서와 비슷하게 우주정거장에서도 선장을 누가 하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였다. 배에서 선장의 명령이 곧 법이듯 우주정거장에서도 선장의 권한은 대단한 것이다.

러시아는 미르호에서 장기체류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미국은 돈을 많이 제공했기 때문에 서로 자신이 선장직을 맡겠다고 나섰다. 우주정거장의 터줏대감인 러시아로서는 기껏해야 우주왕복선이나 타고 잠시 왔다갔다 하는 ‘뜨네기’ 미국우주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초기에는 우주정거장에 러시아의 모듈이 미국의 모듈보다 더 많이 올라가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돈을 쥔 미국의 요청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미국은 자국의 빌 쉐퍼드에게 우주정거장의 선장을 맡기기로 하고 러시아에게는 두명의 우주인 솔로브요프와 크리칼레프를 지목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자국의 영웅인 솔로브요프가 외국인의 명령을 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그래서 다소 급이 낮은 기드젠코를 보내기로 했다. 국제우주정거장의 통제권은 휴스턴의 NASA에서 갖기로 했다. 우주정거장의 공식통용어도 영어로 정했다. 국제우주정거장의 건설로 재정적 어려움에 허덕거리는 미국이나, 옛소련의 붕괴 후 재정난에 허덕거리는 러시아나 모두 자존심마저 버리기는 싫었던 것이다.


1998년 1월 미국 워싱턴에 모인 15개국(브라질 제외)정부고위관계자들의 모습.이들은 국제우주정거장 건설에 대한 구체적인 협력관계를 설정하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보잉747 객실 크기의 거주공간

이러한 각고의 과정을 거쳐 상당히 지연되기는 했으나, 러시아가 지난 7월 12일 ‘즈베즈다’ 모듈을 발사함으로써 국제우주정거장 건설의 초석이 다져지게 됐다. ‘즈베즈다’는 우주정거장의 첫 거주모듈로서 궤도를 조정하고, 주거공간을 제공하는 신경조직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가깝게는 오는 10월말이나 11월초에 3명의 첫승무원들이 국제우주정거장을 방문하는 등 그동안 기다려왔던 15회의 유인·무인의 비행계획이 내년까지 봇물터지듯 이루어질 전망이다. 이 거대한 계획에 참여하고 있는 16개국은 향후 15년 동안 우주정거장에서 체류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도 러시아는 미르호에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고 우주관광객을 유치해왔다. 또 15회 생일을 맞는 2001년 2월까지는 미르호를 계속해서 유지하겠다는 계획이다. 앞으로 국제우주정거장에 대한 러시아의 행보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우주정거장 건설계획은 한 국가가 감당하기에는 애초부터 무모한 계획이었는지 모른다. 처음 계획수립단계에서부터 기존의 하드웨어를 최대한 살리면서 세계 각국이 참여하는 국제적 협력체계로 세밀히 계획했더라면 상당한 예산과 인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시행착오를 겪게 마련이지만, 우주개발에 있어 최정상급인 NASA가 하는 일이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2005년경 국제우주정거장이 완성되면 우주공간에 잠실축구장 정도의 면적을 차지하며 보잉747 여객기 객실 정도의 거주공간을 가질 것이다. 또 그때가 되면 밤하늘에 가장 밝은 별 중에 하나로 빛날 것이다. 그날을 기다려보자.

◆ 설계변경 거듭한 우주정거장 골격 ◆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이 80년대에 우주정거장을 건설하겠다는 연두교서 발표 직후, NASA의 여러 연구센터들은 우주정거장 건설을 위한 방안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존슨우주센터의 우주정거장 기획실은 소형우주선인 모듈을 차례로 결합시키는‘모듈식 첨가방식’이라는 점진적인 건설방식을 제안했다.

처음에 구상된 우주정거장은 5개의 모듈로 구성되고 고도 5백km, 경사각(우주정거장의 궤도면에 대한 각도) 28.5°의 궤도를 갖는 형식이었다. 그뒤 2년여에 걸쳐 NASA에서는 지상과 우주공간(예를 들어 스카이랩)에서 여러가지 실험을 통해 우주공간에서 자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자체사이클에 의한 생명유지시스템은 지상에서 실어나를 보급물자를 획기적으로 줄여줄 것으로 기대됐다(이것은 실제로 1990년대에 현실화됐다). 대신 이 계획에는 1996년까지 10개의 모듈이 추가로 필요했다. 이로써 우주정거장의 예상질량은 처음보다 두배 이상 증가됐다.

우주정거장의 전체구조에 대해 그루만이라는 계약직연구원은 ‘전력타워’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전력타워구조는 전체적인 모양이 T자형으로 타워를 연상시키는데, T자의 머리부분에 양쪽으로 길이가 1백20m인 태양전지판이 놓여 있다. 이 구조에서는 지구방향을 바라보는 동시에 천체방향을 바라볼 수 있다. 또 육중한 태양전지판은 궤도상에서 60%의 시간 동안 태양을 향할 수 있다. 타워에서는 각종 실험이 동시에 가능한 것은 물론, 우주왕복선이나 보급선이 훨씬 쉽게 접근·이탈할 수 있고 모듈 추가에 따른 자세불안정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1985년 말 NASA는 전력타워 개념을 제쳐두고 록히드사와 맥도널드 더글러스사의 설계에 근거한 ‘듀얼킬’개념을 채택했다. 듀얼킬은 소형의 T형 전력타워를 유지하면서 태양전지판을 양쪽 가장자리에 붙인 형상이다. 이 구조는 모듈을 중앙에 배치하고 좌우로 태양전지판을 둠으로써 전력타워구조보다 좀더 안정적이다. 전력타워구조에서는 태양전지판의 움직임에 우주정거장 전체가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듀얼킬구조에는 안정된 미소중력의 형성, 거주공간의 확장, 자세정밀도 향상, 모듈간의 이동거리 축소 등 많은 장점이 있다. 1986년 5월 이 엄청난 설계변경이 발표됐다.

설계변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6년 9월에는 예산 절감을 위해 우주정거장 주변을 감싸는 트러스 구조를 없애기로 했다.이는 또한 1986년 1월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후,예산 삭감에 따른 조처였다.

2000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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