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를 만들어 수위를 재고, 바람깃대로 풍향과 풍속을 알아내고, 지진 햇무리 달무리 극광의 관측을 통해 농업기상학을 태동시켰다.
●- 수표를 발명하다
비가 오면 강물이 불어난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다. 세종 때의 학자들이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다만 그때까지는 '물이 많이 불어났다','물이 말라 강바닥이 드러났다'는 일반적인 표현을 썼을 뿐이다.
그것은 자연현상에 대한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표현은 아니다. 거기에는 측정이라는 과정이 없고, 그래서 정확한 수량적인 표현이 나타나 있지 않다. 15세기 전반기. 그 때까지는 세계의 어느 지역, 어떤 민족도 다 그렇게 살았고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측우기를 발명한 세종대의 학자들은 강우량을 측정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강물의 수위를 재는 일을 시작했다. 강바닥까지 물의 깊이가 얼마인가를 자로 재자는 것이다. 그 아이디어는 그대로 발명이었다. 하천(河川)의 양수계(量水計) 수위계(水位計)라 할 수 있는 표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수표(水標)라고 이름지었다. 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표는 서울의 청계천과 한강에 설치되었다. 서울의 중심부를 흘러가는 청계천에 설치된 수표는 높이 약 2.5m의 나무기둥에 자(尺)ㆍ치(寸)ㆍ푼(分)의 눈금을 새기고 그것을 돌기둥 사이에 끼워 묶은 것이었다. 그리고 한강의 수표는 강변의 바위를 깎아 눈금을 새긴 것이다.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 서울의 4대문 성안의 한복판을 흐르는 개천은 맑은 물이 흐르는 깨끗한 내였다. 그래서 그 개천의 이름이 청계천(淸溪川)이다. 청계천의 광교(廣橋) 동쪽에 마전교(馬前橋)가 있었다. 수표는 그 마전교 서쪽에 세워진 것이다. 수표가 있어 그 다리 이름도 수표교라 불리게 되었다.
수표교가 있던 자리는 지금은 복개되어 큰길이 되었지만, 수표동(水標洞)의 지명이 남아 있고, 바로 그 다리 건너 자리 잡은 수표동교회가 옛날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한강변의 수표를 새긴 암벽은 흔적도 없다. 필자의 윗 세대도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조선 말에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추측컨대, 노량진 근처의 어딘가로 여겨질 뿐이다.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가설되던 19세기 말 또는 그 이전의 조선 후기 문헌기록에서 필자는 아직 한강변 수표 암벽에 대한 글을 찾아내지 못했다.
수표에 대한 '세종실록'의 기록은 이렇다.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에 박석(薄石)을 놓고, 그 돌 위를 파서부석(趺石)을 세웠다. 그 가운데에 네모난 나무기둥을 끼워 세우고 쇠갈고리로 부석과 함께 고정시킨 후 자ㆍ치ㆍ푼 수를 기둥위에 새웠다. 그리고 본조(本曹)의 낭청(郎庁)이 빗물의 깊고 얕은 푼수를 살펴 보고하게 하였다. 또 한강변의 암석 위에 자ㆍ치ㆍ푼을 새긴 표(標)를 세워 도승(渡丞)이 물의 깊이를 재서 본조에 알려 보고하게 하고…"
15세기 전반기에 쓰여진 이 글은 수표의 발명과 그 구조 및 설치, 측정에 대한 첫 기사이다.
나무기둥에 눈금을 새겨 세워 놓은 청계천 세종 때의 수표는 그 후 돌기둥으로 개량되었다.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수표석'(水標石)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다. 수표는 1441년(세종 23)에서 1494년(성종 25) 사이에 돌기둥으로 개량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 남아 있는 것과 같은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수심을 측정하다
청계천과 한강의 수심측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수표에 의한 수심측정기록이 비록 몇번 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농사철에 강수량을 걱정하고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위정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 보기가 된다.
'선조실록'의 기사에는 "예조에서 아뢰기를 금월 14일에 비가 내렸는데, 수표 수심이 6자 4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슷한 기사는 '인조실록'과 '영조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강 수심에 대한 기사도 나타난다.
기상관측 결과를 담은 보고서와 관측기록들은 조선시대에 강물의 수심을 꾸준히 계속해서 측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기록과 보고서의 원본들은 애석하게도 잘 보존되지 못하고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일부 남은 것들도 해방 이후의 혼란과 6ㆍ25의 참극을 거치는 동안에 없어지고 말았다.
세계의 기상관측사상 유례가 없는 5백년간의 정확하고 빈틈없는 관측기록의 축적이 우리 세대에 사라진 것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지금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는 수표와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가 그 오랜 끈질긴 관측의 역사를 증언하는 유물이다.
이 수표는 높이 약 3m, 폭이 약 20㎝의 화강석으로 된 6면 방추형(方錐形)의 돌기둥이다. 위에는 연꽃 봉오리 무늬를 한 머리돌이 얹혀 있고 밑은 방추형의 초석으로 땅속에 박혀 있다. 기둥의 모양도 자연스럽기 그지 없다. 물이 흘러내려오는 방향을 홀쭉하게 유선형으로 다듬어 놓은 것이다.
돌기둥에는 양쪽 면에 주척(周尺) 1자(尺)마다 눈금을 1자에서 10자까지 새겼고, 3자ㆍ6자ㆍ9자 되는 눈금 위에는 ○표를 파서 각각 갈수(渴水)ㆍ평수(平水)ㆍ대수(大水) 등을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다. 즉 6자 안팎의 물이 흐르는 것이 보통의 수위였으며, 9자가 넘으면 위험수위로 개천이 넘칠 것을 예고하는 데 쓰였다.
지금 남아 있는 이 수표는 오랜 전통을 이어준 기기(機器)로서 가치가 크다. 더욱이 관측기록도 남아 있어서 우리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관측기록이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풍운기(風雲記) 기우기청제등록(祈雨祈晴祭謄錄) 천변초출등록(天変抄出謄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実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등에 기록돼 있는 것이다.
풍운기는 관상감의 관측일지 원부(原薄)이다. 즉 관측에 임한 당직관리가 자기 담당시간에 관측한 모든 현상을 규정에 따라 기록한 것이다.
관측은 24시간 동안 3교대로 했고, 관측자는 관측내용을 기록하고 서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기록은 풍운기를 원본으로 삼았다. 매일 승정원 시강원 규장각 등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해서 집계된 것이다.
이 기록들을 종합하여 분석ㆍ재구성하면 조선시대의 강우량과 서울의 청계천 및 한강의 수위가 통계적으로 파악된다. 한일합방 수년 전에 한국관측소에 와 있던 일본인 천문학자 '와다'(和田雄治)의 보고서는 그 때까지 남아 있던 자료들을 종합ㆍ분석, 서울의 강우량과 하천수위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첫 업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5백년에 걸친 조선시대의 강우량과 하천수위 측정은 근대 농업기상학의 출범을 알려준다. 또한 한국인의 성실한 관측활동을 드러내는 훌륭한 업적이다.
1400년부터 1859년까지 약 4백60년 동안, 서울 지역의 홍수 또는 수표측정에 의한 대수(大水) 기록은 1백72회에 이르고 있다. 월별로는 음력 5월에 6회, 6월에 15회, 7월에 75회, 8월에 47회, 9월에 19회 등이다. 역시 7~8월에 70%가 집중돼 있다.
●- 바람을 관측하다
15세기의 학자 강희맹(姜希孟)은 그의 명저 '금양잡록'(衿陽雜錄)에서 농작물에 미치는 바람의 영향에 대해서 경험적인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조선 땅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광할하다. 북에도 험한 준령이 있는데 그것은 꺾어져서 동쪽을 덮고 남쪽에 이르러 끝나고 있다. 그래서 그 지세는 동과 북은 모두 산이고, 서와 남은 모두 들판이다. 바다를 거쳐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하게 쉽게 구름과 비가 되어 식물을 자라게 한다. 반면 산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차다. 그러므로 그것은 식물에 해를 끼친다. 영동사람들은 농사철에 동풍이 불기를 바라고, 호서ㆍ경기ㆍ호남사람들은 동풍을 싫어하고 서풍이 불기를 바란다. 이렇게 좋고 싫음을 서로 달리하는 까닭은 그 바람이 산을 넘어 불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동쪽에 산맥이 있는 경기지방에서는 동풍에 의한 농작물이 피해가 매우 커서, 심할 때는 논밭의 물고랑이 모두 마르고 식물은 타버린다고 했다. 반면 적을 때도 벼잎과 이삭이 너무 빨리 마르기 때문에 벼이삭이 싹트자마자 오그라들어 자라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비록 내용은 간결하지만, 푄(Föhn)현상을 파악하고 세운 이론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바람에 대한 이러한 농업기상학적 이론의 전개는 세종 때부터 있었던 풍향기에 의한 바람의 관측과 연결된다. 풍향기는 바람깃대, 즉 풍기죽(風旗竹)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 바람깃대는 영조46년(1770)에 석대(石臺)를 2개 만들어서 창덕궁과 경희궁에 각각 설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그 유물을 1960년대 초에 경복궁의 한 돌담 옆에서, 그리고 창경원 장서각 앞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아름답게 조각된 화강석의 받침돌대였다. 그러나 그 풍기대에 꽂혔던 바람깃대는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동궐도(東闕図)에서 마침내 그 그림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나무에 기다란 깃발 띠를 맨 그림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런 바람깃대로 풍향과 풍속을 오랫동안 관측했다. 바람에 대한 오래된 관측기록들이 강우량의 그것과 함께 또 하나의 농업기상 관측의 전통을 세운 것이다.
●- 지진과 햇무리와 극광도
햇무리와 달무리는 우리가 육안으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지진과 극광은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기록을 보면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진은 이미 그 강도에 따라 강진 또는 대진과 지동(地動) 등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일시와 강약의 정도및 진원과 진역 등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관측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주야를 막론하고 발생 즉시 단자(單子), 즉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부 각 기관에 보고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까지의 약 2천년 간에 기록된 지진의 총일수가 1천6백61일에 이른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지진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중에서 상당히 강한 것도 통일신라시대까지 11회, 고려시대 11회, 조선시대 26회, 모두 48회에 달한다. 2천년 동안 50회의 강진이 있었다고 한다면 40~80년마다 1~2회가 발생한 셈이 된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서의 강한 지진발생가능성에 대하여 시사하고 있다.
햇무리와 달무리도 소상하게 관측되었다. 보통 해와 달의 둘레에서 일어나는 둥근 무리는 예사롭게 생각했으나. 흰 무지개가 해나 달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이는 백홍관일(白虹貫日)과 백홍관월(白虹貫月)은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가옥과 인명에 피해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현상은 이상 현상으로 특히 주목되었다.
햇무리와 달무리의 관측은 그 색ㆍ모양ㆍ나타난 시각ㆍ무리 속에 들어간 5성의 이름ㆍ무리의 겹(重) 등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햇무리는 삼국ㆍ통일신라시대에 6회, 고려에 99회, 조선에 2백50회, 합계 3백55회 나타났다. 달무리는 고려에 23회, 조선에 46회, 합계 69회 관측되었다.
기상관측에서 극광(오로라)의 관측기록도 우리의 관심을 끌게 한다. 조선시대의 자료에 의하면, 기원전 35년부터 19세기까지 2백회 이상 극광에 대한 관측기록이 보인다. 그것들은 푸르거나 붉은 구름으로, 혹은 안개, 붉은 뱀 같은 안개, 폭포 같은 흰 안개, 창과 칼들의 행렬 같은 흰 안개로 묘사되었다. 또 붉은 불꽃, 밤에 비치는 햇빛, 뱀 같은 화살, 누각과 같은 푸른 자주빛 구름 등으로 나타냈다.
1519년(중종 14) 6월에 경주에서 관측된 극광을 묘사한 '중종실록'의 기사는 아주 재미있다. 그글의 일부를 옮겨 보자.
"이날 밤 경상도 경주부에는 천변(天変)이 일어났다. 이른 밤에는 달빛이 매우 밝았는데, 서쪽에 조금 구름기가 보였다고 생각될 때 구름 사이로 빛이 나타났다. 번개같기도 했는데 불은 일어나지 않았다. 흐르는 화살과 같은 모양을 하여 하늘을 천천히 움직일 때도 있는가 하면, 혹은 유성과도 같이 삽시간에 지나가 버릴 때도 있고, 혹은 붉은 뱀이 날뛰는 듯도 보이고, 혹은 불꽃이 튀는 듯도 했다.
때로는 힘껏 잡아당긴 활의 현과도 같이 구부러질 때도 있고 때로는 가위와도 같이 벌어질 때도있어, 참으로 천변만화(千変萬化)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서쪽에서 천천히 동북방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밤 3경에 사라졌다."
이것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자세한 극광의 관측기록의 하나일 것이다.
●- 농업기상학이 성립되고
15세기 전반기에 조선에서 강우량과 풍향등을 기기(機器)를 써서 과학적으로 측정하기 시작한 일은 참으로 놀랍다. 그 동기나 배경은 현대적 의미의 과학적인 것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자연현상의 수량적인 측정과 통계적 처리, 기록의 축적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분명 농업기상학의 성립을 뜻하는 것으로 의의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조선왕조의 관리들은 관측활동과 관측규정, 그리고 관측기록과 보고에서 매우 현대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 그들은 기상학에서 선구적인 관측활동을 벌였고, 훌륭한 전통을 세웠다. 5백년의 긴 관측역사는 분명 소중하고 자랑스런 것이다.
그러나 그 관측기기들과 관측기록의 원본이 우리가 소중하게 보존하지 못한 탓으로 거의 없어지고 만 것은 너무도 애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