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국가 시절부터 우리 조상들은 살결을 건강하게 가꾸고 얼굴의 미백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화장품과 화장술을 개발해 사용했다. 돼지기름과 백반, 연지 등이 바로 그것이다.
화장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잠정 결론은 인간의 생존과 동시에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우월과 과시 욕구가 인간의 본능이므로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화장 역시 본능이다. 이밖에도 보호를 위하여 혹은 종교적인 필요성에서 태고적부터 화장은 시작되었다. 단지 미·추의 개념이 다르고 문화 수준에 따라서 화장과 화장품의 개념이 변화했을 뿐이다.
오줌과 돼지기름
한국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일찍이 고도의 문화를 창조한 한국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남다른 미의식을 향유하였고 화장과 화장품의 수준이 뛰어났다.
북부지방에 거주했던 읍루인들이 돼지기름(豚膏)으로 피부의 동상을 예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말갈인들이 오줌으로 세수했다고 한다. 피부를 희게 가꾸기 위하여 미백(美白) 효과가 큰 오줌으로 세안하는 미용법은 최근까지 산간지방에서 활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궁중의 비방 그리고 돼지기름은 일소(一燒)와 설소(雪燒), 즉 피부의 부드러움과 동상예방에 효과가 높은 바 AD200년경 로마의사 가렌이 제조한 콜드크림의 원형(原型)도 돼지기름을 가공한 것이다. 읍루인들이 가공한 돼지기름을 피부보호제로 사용하였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보다 진보한 미용사례가 단군신화에 나타나 있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한민족의 첫 주거지가 단목(檀木 : 박달 나무) 근처라고 하는데 이는 향나무인 박달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등 향료가 생활과 밀접했음을 말해준다(태백산을 묘한 향내가 나는 묘향산이라고 한 대목에 주목). 그 밖에도 이 신화는 고조선 사회의 한국인들이 피부를 희고 아름답게 가꾸었음을 밝히고 있다.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준 쑥과 마늘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랫동안 애용해 온 피부 미백제였다.
민간에서 널리 행해진 미용 처방을 보면 쑥을 달인 물에 목욕함으로써 살결을 건강하고 하얗게 가꾸었다. 마늘을 삶은 물에도 목욕했는데, 마늘탕 목욕 역시 피부를 희고 탄력있게 해주는 것으로 기대되었다. 한편 짓찧은 마늘을 꿀과 혼합하여 하룻밤 정도 재웠다가 얼굴에 골고루 펴바른 후 씻어내어 미백효과를 내고, 잡티 기미 주근깨 등을 제거하기도 하였다(오늘날의 팩임). 특히 혼인을 앞둔 처녀들은 반드시 쑥과 마늘을 이용한 목욕과 팩을 하였는데, 가무잡잡한 살빛을 기피하는 풍조 때문에 흰 피부로 가꾸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화장문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그의 왕비인 알영(閼英)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바, 매우 주목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그 내용을 간추리면,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루, 6부의 우두머리들이 각기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위에 모여서, 통치력의 한계를 느껴 강력한 왕을 옹립하기로 합의하였다. 의논을 마치고 높은 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나정(蘿井) 곁에 이상한 기운이 전광처럼 땅에 비치는데…… 그 자리에 붉은 알 한개가 있어 알을 깨자 용모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므로 그를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마침 이날 사량리 알영정(閼英井)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여아를 낳았다. 몸매와 얼굴이 유달리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아서 월성 북천(北川)에 데려가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졌다. 두 성인의 나이 열세 살이 되자 혁거세는 왕이 되고 알영을 왕후로 삼았다(기원전 57년).
여섯 소국가의 왕들로부터 추대된 통일국가의 임금인 박혁거세가 아름다운 남자였으며 알영 역시 빼어난 미녀였다는 이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박혁거세는 '뭇 사람들이 놀랄 만큼 아름다운 남자'(形儀端美驚異)였으며 알영의 몸매와 얼굴이 '남달리 아름다웠다'(姿容殊麗)는 사실, 그리고 그들을 동천과 북천에서 목욕시키자 혁거세는 '몸에서 광채가 났으며'(身生光彩), 알영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미인이 되었다'(姿容絶大)는 사실로 미루어 다음과 같은 몇가지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첫째 지도자는 지혜와 용기 못지 않게 미모를 갖추어야 한다.
둘째 흰 피부를 호상(好尙)하였다. 박혁거세를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다는 것은 희디흰 피부를 가리키며, 눈부실 정도로 흰 탓에 혁거세라 이름지었다지 않는가.
셋째 박혁거세와 알영은 목욕을 해 미모를 가꾸었다. 즉 한국인들은 이미 2천여년 전부터 목욕을 미용수단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가지 특징은 신라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한민족의 미의식(美意識)으로 고착되었다.
박혁거세와 알영의 일화가 보여주듯이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靈肉一致), 즉 미모와 지혜, 용기가 함수관계에 있다는 이 사상은 고려 조선 시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나이가 얼마가 되든지 고매한 인품을 소유한 사람이나 고관(예를 들면 이퇴계 이율곡 등)들을 가리켜 표현할 때 한결같이 관옥(冠玉)같았다고 하는데, 이 때 관옥 같다는 표현은 바로 살결이 아름다운 남자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영육일치사상으로 인해 일 찍이 신라시대부터 화장과 화장품이 발달하였다.
검고 윤기나는 머리카락
신라 여인들은 가체(加髰:다리, 가발)를 사용하였는데, 이를 금은주옥(金銀珠玉)과 오색 비단으로 꾸몄다고 한다. 신라 여성의 가체 사용은 장발의 처리 기술이 고도화한 것으로서 신라인의 뛰어난 미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더욱이 신라여성의 가체는 중국의 가체보다 장발이고 미발이어서 중국(당) 여인들이 탐낸 탓에 국가간의 교역품으로 여러 차례 보내졌으며 상인들에 의해서 수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라인의 화장기술과 화장품 제조기술이 중국보다 앞섰음을 뜻한다. 신라인의 가체가 중국인의 가체보다 미발이었던 까닭은 두 가지로 짐작된다. 단오 유두에서 나타난 것처럼 세발이 미용세시화(美容歲時化)할 정도로 세발을 중시한 점과, 고급 머릿기름 때문이다. 신라인들은 동백 아주까리 수유 열매로 머릿기름(헤어오일)을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는 검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가꾸는 데 매우 적합했다.
신라에서는 또 백분(白粉)의 사용이 대중화돼 있었고 따라서 그 제조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백분은 안면을 희어 보이게 하며, 잔주름과 작은 흠을 위장시키는 장점이 있어서 한국인들이 1960년대까지 가장 애용해 온 화장품이었는데, 백색 피부를 선호한 신라인들도 널리 이용하였다. 일본의 한 고문헌에, 신라의 한 승려가 서기 692년에 일본에서 연분(鉛粉)을 만들었기에 후한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일본인들이 제조하지 못하는 연분이 신라에서는 서기 692년 이전에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종래의 백분은 글자(粉)가 의미하는 대로 쌀(米)로 만든 가루(分)였다. 또 쌀 서속과 같은 곡식의 분말, 혹은 분꽃 씨앗의 분말, 칡뿌리의 분말, 조개껍질을 태워 빻은 분말, 백토(白土), 활석의 분말 따위로 만들거나 여기에 동물의 뼛가루를 약간 혼합하의 만들었다. 이러한 재료로 제조한 백분은 부착력과 퍼짐성이 아주 약한 단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화장하기 전에 면도(칼 혹은 실을 사용하였는데, 실면도는 실을 꼬아 올리거나 내림으로써 안면의 솜털을 제거함)하거나, 족집게로 얼굴에 난 솜털을 뽑은 후 백분을 물에 개어서 바르고 20 - 30분간 잠잔다. 잠자는 동안에는 피하지방 분비가 왕성하다. 피하지방 분비가 왕성해야 분이 잘 스며들고, 안면의 움직임이 적기 때문이다. 백분은 이렇게 절차가 복잡하면서도 골고루 펴발라지지 않는 단점이 있고, 아예 실패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백분에 납(鉛)을 화학처리하면 부착력이 좋아지고 쉽게 펴바를 수 있었다. 따라서 연분의 제조는 화장품의 발달사상 획기적인 대발명으로 평가되는데, 신라에서는 692년 이전에 제조와 사용이 대중화 됐다.
백분에 버금갈 만큼 대중화된 화장품은 연지(臙脂)다. 화장의 목적은 아름다운 부분은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감추거나 위장하기 위해서다. 한국인의 고정 관념으로는 가장 젊고 건강한 연령은 15 - 16세이며, 이 무렵의 여성은 입술이 앵두빛이고 뺨은 도화빛이라고 한다. 따라서 젊음과 건강이 절정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하여 입술과 볼, 이마에 붉은 색깔의 연지를 발랐다. 연지를 바르지 못하는 형편인 사람은 아래 위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서라도(살핏줄이 확장되어 붉은색이 됨) 붉은 입술을 만들었는데 입술색이 허연 사람은 병약하고, 자주빛이면 음탕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술과 볼을 치장한 이 연지는 홍화(紅花, 잇꽃)로 만들었다.
한편 고구려인의 연지는 신라와 달리 광물성인 주사(朱砂)로 만들었는데, 이들의 연지는 고품질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연단술(鍊丹術)이 중국인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미묵으로 만든 반달눈썹
신라인들이 제조한 회장품 중에는 미묵(眉墨)이 있다. 미묵은 눈썹을 그리는 화장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눈썹의 모양을 중시하였다 눈썹의 숱이 지나치게 많거나 뻗친 모양이면 성질이 포악하든지 성욕이 과다하다고 믿어 기피하였으며, 반대로 부드럽고 가느다란 눈썹을 선호하였다.
이른바 반달눈썹 아미눈썹이 미의 기준이 되었는데 조선 시대 여성들은 무려 열가지나 되는, 다양한 형태의 눈썹을 그렸다. 빙허각 이씨가 지은 '규합총서'를 보면, 원앙 소산 오악 삼봉 수주 월능 분초 함연 불운 도훈형이 있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얼마나 눈썹화장을 중시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남자들은 진하고 팔자(八字) 모양의 눈썹을 으뜸으로 쳤지만, 여자의 눈썹이 진하고 숱이 많은 경우에는 족집게로 일부를 뽑거나(삼국시대의 출토 유물 가운데 족집게가 있고, 조선시대에도 개인의 필수품이었음. 족집게로 뺨의 솜털을 뽑기도 함) 가다듬은 다음, 화황(花黃)을 발라 부드러우면서도 엷은 색깔을 표현하였다.
반대로 눈썹의 숱이 적고 흐린 경우에는 나뭇결이 단단한 굴참나무 혹은 너도밤나무 목탄을 사용하였다.
이보다 고급스러운 미묵은 관솔에서 얻은 유연(油煙)을 평지씨 기름에 갠 것이었다. 이밖에 목화의 꽃을 태운 재를 참기름에 개기도 하고 보리 깜부기를 솔잎 태운 유연과 개어 만들기도 하였다. 때로는 약간 붉은 기가 감도는 검푸른 흙을 미묵 대신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먹과 눈썹먹(미묵)의 제조방법은 대동소이하다. 일찍이 중국의 소동파가 우리 나라 먹의 품질을 예찬한 사실로 미루어 볼때, 미묵의 품질 또한 고급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랍과 일본에 향료 수출
미묵을 속눈썹에 바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길고 진한 속눈썹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속눈썹에 바르는 예는 흔치 않았다. 요즘에는 눈두덩이에 푸른색 보라색 노란색 등 화장품을 발라 음영을 줌으로써 입체감을 살리고 있으나 예전에는 화황을 눈두덩 혹은 이마에 발라 입체감을 약간 살렸을 뿐이다.
중국문헌은 신라의 남녀노소가 신분의 귀천에 가림없이 향낭(香囊)을 패용하였는데 주로 난사(蘭麝:난향과 사향)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 최근에 주목할만한 논문이 발표됐다. 무함마드 깐수 교수는 '신라·서역 교류사'(新羅·西域交流史)에서 아랍이 신라로부터 수입해 간 물품에 비단 검(劍) 외에도 사향 침향 도기 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신라가 아랍지역에 사향 침향(沈香)등 향료를 수출한 것이다. 한편 신라가 일본에 수출한 물품 가운데 침향 의향(衣香) 청목향 (靑木香) 사향 향로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가 일본 아랍에 향료를 수출할 만큼 고품질의 향료를 제조했음이 분명하다. 특히 일본에는 훈의향(薰衣香) 잡향(雜香) 훈향(薫香) 등 배합향료가 포함되어 있다. 향료의 다양함도 다양함이지만 배합향을 제조하여 수출했다는 사실은 신라의 향료 제조기술이 건조에 의한 분말, 압착에 의한 화정유(花靜油) 추출 등 초보적인 단계를 넘어섰음을 시사한다.
고려는 신라의 문화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여 발전시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데, 향수 향료 등 화장품 분야에서도 그러하다. 서기 1123년 고려에 온 송나라 관리 서긍이 목격한 바로는 궁중에서 사향 용뇌향 독누향 전단향 침수향 따위를 살랐으며, 30근의 은으로 만든 자모수로(子母獸盧)에서 향을 내뿜었다고 한다. 이는 커다란 짐승이 웅크리고 앉아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인데, 그 입으로 향기를 뿜어냈다고 한다. 용의 모양을 하고 있는 박산로는 습기와 향기를 혼합시켜 향의 연기를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또 고려의 귀부인들이 향유(香油) 바르기는 좋아하지 않았으나 비단 향낭을 패용하는 것은 좋아했다고 했다. 패용한 수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자랑했다고 한다. 이상은 '고려도경'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밖에도 고려인들은 난초를 우린 물에 목욕(난탕)하거나 향수(방향물질을 넣은 물)에 목욕함으로써 몸에서 향내를 발산시켰으며, 초에 난초 향유를 혼합함으로써 향내가 방안에 그윽하도록 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향을 먹이기도 하였다. 고려 가요 '만전춘 별사'중에 "약든 가슴을 맞춘다"라는 대목이 있는 바, 향을 복용한 사람을 포옹함으로써 조정(助情)을 기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향을 어떻게 먹었다는 것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향의 이름만은 알려져 있다. '고려사'에 기록된 만전향(滿殿香)이 바로 그 향일 것이다. 만전향은 사향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향을 복용함으로써 (실은 향을 복용한 향낭-香娘, 동정녀-을 부여안고 잠) 회춘 혹은 조정(助情) 효과를 기대하였는데, 향낭각시는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것 같다. 신라 원성왕 8년(서기 792) 7월에 미녀 김정란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그녀의 몸에서 향내가 났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 귀부인의 난탕
고려인들의 청결 관념은 하루에 서너 차례나 목욕할 만큼 독특했는데 부유층의 여인들은 난초를 삶은 물에 목욕함으로써 희고 부드러운 피부를 간직하고자 하였고 늘 몸에서 향내가 나게 하였다. 또 갓난 아기를 복숭아 꽃물에 세수시키거나 목욕시킴으로써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간직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피부손질은 한국인고유의 미의식인 영육일치사상과 백색 피부보호 사상이 발현된 것이지만, 고려사회가 문화나 경제적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재가승(在家僧)의 출가법 팔계재(出家法八戒齋) 항목은 일부 고려인들의 화장이 꽤 사치스러웠고, 이와 같은 사치스러운 치장에 대한 반발도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도식향만(塗飾香鬗) 부저화영락(不著華瓔珞) 불향도(不香塗身) 부저향훈의(不著香薰衣)를 정하여, 신체와 머리카락, 옷에 향료를 뿌리거나 발라서 향내를 배게 하고, 갖가지 보석 장신구를 치렁치렁 늘이고, 여러가지 화장품을 겹겹이 진하게 바른 사람이 사찰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당시 사치스럽고 야한 치장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특기할 사항은 고려시대에 면약(面藥)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과 염모(染毛)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려도경'에는 송나라의 고위사신이 앉는 자리에 은으로 만든 면약호(面藥壺)를 두고, 그 밖의 수행 관리들의 자리에도 구리로 만든 면약호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면약호는 둥근 배에 목이 길며 뚜껑이 다소 뾰족한 모양인데, 높이는 5치(15㎝), 배의 지름은 3치 5푼(약 10.6㎝), 용량은 1되였다고 한다. 이 병은 크기와 생김새로 보아 액체 따위를 딸아 사용하기 쉽게 만든 병이 분명하므로 이 병에 담겨 있던 면약 역시 액체였을 것이다. 내용물은 남녀공용의 안면용 화장품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손과 얼굴을 희고 부드럽게 하기 위한 피부보호제 겸 미백제였으며 요즘의 영양크림과 밀크로션의 중간형태였음직하다.
또 고려 말엽에 불려진 사설시조 중에 "백발에 화냥 노는 년이 젊은 서방하려하고 센(흰) 머리에 흑칠하고 태산준령으로 허위허위 넘어가다가…… (이 시조는 조선 초기의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음)"라는 구절로 미루어 볼때 고려 말엽에 머리 염색이 서민사회까지 확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의 여인들이 늙은 모습을 젊은 모습으로 꾸미기 위해 노력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일본의 '아침이슬'도 조선제
임진왜란 직후에 일본에서 '朝の露'(아침이슬)란 이름의 화장수가 발매되었는데, 광고 문안의 서두가 "조선의 최신 제법으로 제조한 '朝の露'화장수는 …"이고 보면 이미 임진왜란(1592년) 무렵에 고도의 기술로 화장품이 제조되고 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화장품과 화장도구의 종류, 그리고 조선시대의 화장관념을 알아볼 수 있는 소설이 한편 있다. '여용국평란기'라는 한글로 된 소설이 바로 그것인데, 언제 누가 지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동일한 내용의 한문소설인 '여용국전'(女容國傳)도 있는데 '여용국 평란기'를 '여용국전'으로 한역한 사람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소설은 화장품과 화장욕구를 의인화(擬人化)하여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인데 필체의 유려함과 표현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문학작품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또 화장품과 화장도구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이 소설에는 거울(銅鏡), 족집게, 얼굴면도에 사용한 모시실, 양칫대, 수건, 휘건(머리 묶는데 사용), 경대, 빗, 대야 등의 화장구와 백분 연기 머릿기름 밀기름 향수 미안수 윤안향밀 따위의 화장품 등 모두 20여종류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