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의 축소판인 PC통신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들락거린다. 돈벌이나 공부 등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단지 즐기기 위한 장소를 찾아 이 세계에 들어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이들은 자신들이 헤매고 다니는 이 가상의 공간(cyber space)을 실제 세계처럼 '인간적인 냄새' 가득한 곳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방 얼굴조차 모르는 무미건조한 이 공간에서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유사한 관심을 가진 사람끼리 모이는 동호회(포럼)을 만들고, 여기서 활동하며 실제 공간과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흔히 동호회를 '통신의 꽃'으로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2만명 넘는 대식구가 한 자리에
현재 국내에서 제공되는 대형 PC통신 서비스에 등록된 동호회는 대략 3백여개. 여기에 사설 BBS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 가운데 하이텔과 나우누리, 포스서브 등에 둥지를 틀고 있는 윈도우 동호회는 그 왕성한 활동으로 명성을 쌓고 있는 곳.
3년전 하이텔 내의 OSC 동호회에서 활동하던 윈도우 사용자 5명이 주축이 돼 만든 이 동호회는 이제 운영체계인 윈도우 3.1에 기반을 둔 모든 것, 이를 테면 활용법에서 프로그래밍에 이르기까지를 완비하고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장소로 변모했다.
현재 확보하고 있는 회원은 하이텔에만도 1만7천명, 나우누리와 포스서브에 각각 2천5백명 정도. 총 2만명 이상의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동호회답게 시삽(SYSOP)진만도 20여명이 넘으며, 비공식 집계이긴 하지만 하이텔 내에 있는 포럼이나 게시판 형태의 공간 중 이용시간에서 3위 안에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동호회의 대표시삽을 맡고 있는 윤석호씨(blueice)는 현재 한양대 전산과 3학년에 다니다 휴학 중이다. 서울 현대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산반에서 활동하면서부터 통신에 맛을 들인 그는 천리안의 아트미디어 동호회에서 부시삽으로 활동하다 이곳에 입성한 이래 '법 없는 동네'인 이 공간을 특유의 '애교'를 무기로 장악하고 있다.
윤씨의 하루 평균 통신 접속시간은 대략 1시간 정도. 길다면 긴 시간이겠지만 시삽이란 위치를 생각한다면 결코 긴 시간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막연하게 시간보내는 것이 아까워 통신에 들어가기 전 미리 해야 할 일을 정해놓음으로써 1시간안에 동호회 유지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힌다. 즉 새로운 신청자의 가입을 결정하고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이야기를 둘러본 다음 미련없이 나간다는 것.
모인 인원이 많다 보니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시삽진은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포럼을 운영한다. 전인미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개척의 여지가 남아있고, 또 남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활동으로 스스로의 성장과 공동선을 함께 찾겠다는 것이다.
이런 자부심과 사명감이 없다면 종종 시삽진을 당황하게 하는 유무 형의 어려움이 닥쳤던 초기에 이미 그만두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동호회 한계 뛰어넘을 변신 모색
동호회 회원간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논쟁 등도 그렇지만, 이들이 난감해 하는 문제는 운영체계로서의 윈도우가 과연 우리에게 최선책이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동호회 내 외부의 논란. 이는 대체로 전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차지하는 영향력을 줄여야 한다는 이른바 '반마이크로소프트' 기류와 함께 제기되는 문제로, 윈도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동호회의 존립 근거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에 대해 시삽중 한명인 장연욱씨(고대 전산과 4학년)는 "윈도우란 운영체계가 비록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현재 논의되고 있는 다른 운영체계 역시 외국의 것이고, 이중 윈도우가 대세를 규정하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적극적인 활용으로 내 것을 만드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특히나 아직 발표되지도 않은 윈도우 95에 대부분의 사용자들이 걸고 있는 높은 기대를 본다면 '윈도우의 모든 것'을 표방한 윈도우 동호회가 계속 남아 있을 충분한 아유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편 윈도우 동호회는 그동안 고속모뎀이나 하드드라이브, 윈도우용 프로그램 등을 공동으로 구매하는 기획을 통해 회원들의 소속감을 높였고, 여기에 업체와 제휴한 각종 윈도우 관련 세미나를 개최함으로써 회원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 특히 지난 4월 KOEX에서 연 '윈도우 95 세미나'에는 7백명이나 되는 인원이 몰려 시삽진을 흥분시키기도.
요즘 동호회 시삽진은 지금까지 벌여온 활동의 중간 결산으로 일종의 잡지 성격을 띤 CD-롬 타이틀 제작의 막바지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약 7만장 정도를 만들어 회원 등에게 무료로 배포할 예정인 이 타이틀에는 윈도우 어플리케이션과 셰어웨어에 대한 분석은 물론이고 '톡스(talks)'란 이름의 자체 제작한 윈도우용 에뮬레이터를 비롯해 4명 정도의 소그룹이 즐길 수 있는 통신 게임도 수록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향후 이들은 포럼의 형태를 벗어나 정보 제공자(IP, information provider)로의 변신도 생각중이다. 확장이 가능한 한도 내에서 현재의 비영리적 성격을 유지하는 한편, 윈도우용 각종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대기업의 지원을 바탕으로 '고급스런 서비스'를 지향하겠다는 것이다.
규모가 이 정도 되는 동호회라면 당연히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게 시삽진의 생각이다.
하지만 현 시삽진은 동호회가 남아 있는 한 어떤 경우라도 원칙 한가지만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인간적인 냄새가 남아 있는 동호회' 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