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2. 인간 흉내일 뿐 기계 한계점 극복 불가능

강 인공지능론자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지능을 갖춘 컴퓨터'는 '인간의 지능을 흉내내는 컴퓨터'로 해석된다. 주어진 법칙에 따라 수행되는 프로그램만으로 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가 진정한 '지능'이나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논쟁의 대상이 돼 왔다. 이러한 논쟁의 바닥에는 각자의 가정과 가설들이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어 대부분의 토론은 끝없는 루프를 도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이러한 논쟁이 건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공통적인 뚜렷한 기준이 설정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특히 정신의 세계에 관해서는 그 기준을 세우기에는 너무나 미약해 논쟁은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과연 지능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지능을 이루는 요소로 많은 사람들은 이해력 창의력 통찰력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 이외에도 감정 지각 혹은 개성 등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쯤 도달하면 벌써 지능의 정의는 애매해지기 시작한다. 인간에게 지능과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기계의 경우에도 이 관계는 마찬가지일까?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능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사실 요즈음엔 지능이라는 단어가 과잉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지능형 냉장고 청소기 밥솥등의 가전제품이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지능형 빌딩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지능이란 단지 몇가지 센서를 추가해 기존의 제품보다 약간 더 효율적인 운용을 하는 것이 고작이다.

간단한 온도조절장치를 생각해 보자. 이를 에어컨이나 보일러에 부착시키면 원하는 온도를 유지하도록 이 기계가 작동하게 할 수 있다. 적당한 온도에서 자동으로 꺼지기도 하고 켜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 장치가 없는 기계에 비하면 매우 '지능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온도조정절치에 과연 지능이 있는 것인가? 만일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네' 라면 이미 논쟁은 끝났다. 컴퓨터에는 이보다 훨씬 고도의 지능이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인공지능의 목적은 이러한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윈스턴(Patrick Winston)은 인공지능을 '컴퓨터가 지능적이도록 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규정하고 인공지능의 목적에 대해서 ▲ 컴퓨터를 더욱 유용하게 사용하고 ▲ 지능이 가능하도록 하는 원칙이 무엇인가 알아내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MIT의 마빈민스키 박사는 개와 고양이를 구별하는 컴퓨터를 만들어 선보인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70년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인조인간

그런데 근자에 컴퓨터로 인간의 지능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보는 이른바 '강한 인공지능'(strong AI)론자 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완전한 지능과 이에 필요한 마음도 아주 복잡할 뿐 궁극적으로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으며, 언젠가는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컴퓨터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논쟁은 다시 시작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현재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지능의 궁극적 기준으로서 튜링 검사(Turing test)를 들 수 있다. 이 검사의 골자는 컴퓨터와 인간의 대화를 제삼자가 모니터해 둘중 어느 쪽이 인간이고 어느 쪽이 컴퓨터인가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가 될 때 그 컴퓨터는 튜링 검사를 통과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튜링 검사를 통과한 컴퓨터는 인간에 필적하는 지능을 가졌다는 객관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즉 외적인 반응 형태를 기준으로 지능의 유무를 판단한다고 보면 이 방법이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 방법 외에 지능을 판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뚜렷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영국의 한 뇌성마비 환자는 그 정도가 대단히 심해서 자기의 의사를 외부에 표현할 방도가 전혀 없어 가족들은 그가 저능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장님 한 명을 우연히 만났는데, 이 사람은 놀랍게도 뇌성마비 환자의 신음같은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장님의 통역으로 그는 삼십이 넘어 처음으로 외부 세계와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후 그들은 세계 여러나라를 같이 다니며 순회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 예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객체에 지능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길은 어떤 형태로든 의사교류를 하고 이를 기반으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래의 튜링 검사는 모니터하는 제삼자는 당연히 대화에 참여한 양쪽을 볼 수 없게 돼 있다. 그러나 이 제한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의 외모를 복사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해지거나, 그것이 정 불가능하더라도 인간에게 로봇의 탈을 씌움으로써 같은 효과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인조 인체는 인조 정신에 비해 훨씬 구현하기 쉽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러한 가정 하에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하는 몇가지 캐릭터를 대상으로 가상적인 튜링 검사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우선 가장 완벽하게 검사를 통과할 수 있다고 보여지는 대상은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인조인간들이다.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사고력 감정 개성뿐만 아니라 생활 철학까지 있어서 자신들의 인권을 요구할 정도로 인간화돼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을 능가하는(기계적 초능력까지 보유하므로) 족속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두번째로 '에일리언'에 등장하는 인조인간으로, 이들도 쉽사리 류링 검사를 통과할 것이다. 그들이 인조인간이라는 선입관을 갖기 전까지는 분간이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인조인간이라고?" 라고 놀라움을 표시하는 주인공의 대사는 그가 이미 튜링 검사를 통과했다는 선고라고도 볼 수 있다.

'로보캅'의 캐릭터는 그가 비록 인간두뇌를 사용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상대적으로 가장 기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외모나 목소리를 떠나서 대화내용에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많이 있고 그것이 관객에게 어필하고 있다. 목소리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사람들도 스티븐 호킹의 예와 같이 경우에 따라서 기계합성음성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의 예에서 보면 로보캅은 가상의 튜링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로보캅은 지능이 없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한 정도의 지능을 얻는 것은 어쩌면 인공지능의 궁극적 목표인지도 모른다. 튜링검사는 다만 하나의 궁극적 기준을 설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기계적 지능의 정도를 직선 스펙트럼으로 표시했을 때 온도조절장치가 한쪽(왼쪽) 끝에 있다면 튜링검사의 통과는 다른쪽(오른쪽) 끝에 있고 현재 인공지능 수준은 왼쪽 끝에 가까운 어느 위치에 있으며 로보캅은 오른쪽 부분의 어느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끝으로 갈수록 마음의 구현성 여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강인공지능론자들은 컴퓨터에서 마음의 구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아직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 완전한 지식이 부족하다 뿐이지, 그 요소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이를 프로그램화하면 결국 마음과 동일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IBM이 선본인 음성인식 시스템. 지능적이긴 하지만 지능 그자체를 갖춘 것은 아니다.


고장난 컴퓨터를 위한 장례식

물론 마음의 요소중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부분은 이미 많이 분석이 되었고 자동학습도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에 있다. 전문가의 지신이 컴퓨터에 입럭돼 사용되고 있고 글자나 영상 인식 음성 인식 등 감각적인 면의 연구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리고 요즈음에는 의도(intention) 상식 등 컴퓨터의 취약점으로 지적되던 부분들에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중이다. 언젠가는 감정을 결정하는 요소들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질 것이고 이들이 다른 요소들과 어떻게 연계되나 하는 문제도 해결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와 같이 연구된 프로그램을 종합하면 과연 마음과 동일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잠시 마음을 소유한 기계가 난무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우선 번식에 관한 것을 생각해 보자. 우리의 감성에 번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높다. 남녀간의 사랑은 그 기저에 번식에 대한 본능이 도사리고 있고 모성애라는 것도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는 번식본능의 발로다. 본능과 지능은 무관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일반 동물의 행동양식을 살펴보면 번식을 위한 행동에서 가장 지능적인 면을 발견할 때가 허다하다. 인간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번식의 본능을 논외로 치더라도 만일 기계에 감정이 있다고 가정하면 온갖 새로운 형태의 사회문제가 등장할 수 있다. 컴퓨터를 사고 파는 문제는 팔려가는 기계가 느낄 허탈감과 배신감을 염두에 두어야 되고 수십년간 정들었던 기계를 폐기해야 될 때에는 새로운 형태의 장례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기계들이 인권(?)을 주장할지도 모르고,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의 반란을 대비해야 될 때가 올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우리가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 마음을 샅샅이 분석한다 할지라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를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컴퓨터는 소위 튜링 기계(Turing machine)에 기반한 기계로서, 전자식이건 기계식이건 그 구현방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이 프로그램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계산가능하다는 조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1930년대에 제안된 튜링 기계는 아직도 현대 컴퓨터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수학모형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모형의 특징은 무한한 테이프 상에서 조정기를 한칸씩 옮겨가며 테이프 위에 숫자를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함으로써 계산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정기가 움직이는 규칙은 유한하도록 돼 있다. 현대의 컴퓨터가 처리속도와 메모리의 용량, 병렬처리 등의 기능이 급속도로 발달하고는 있지만 아무리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더라도 기본 튜링 기계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구현하는 프로그램이 아무리 어마어마하더라도 결국은 유한한 크기의 프로그램으로 표시된다.

강인공지능론자들은 그러한 프로그램의 수행을 추상적으로 통칭해 마음이라고 부른다고 주장한다. 이들중 가장 설득력있는 주장은 MIT대학 교수인 민스키(Minsky)가 그의 저서 '마음의 사회'(Society of Mind)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마음이란 수많은 작은 독립된 에이전트(agent)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하나의 사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조화있게 작동하는 상황을 우리는 의식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법칙에 따라 수행되는 프로그램만으로 의식이 생성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에게는 등골반사신경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기능이 있다. 프로그램의 수행은 이보다 복잡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이러한 반사기능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즉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의식의 흉내낼 뿐이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미국의 철학자 설(Searle)과 홉스태터(Hofstadter)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설은 그의 '중국어 방'(Chinese room)이라는 논의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상황을 제시했다. 어떤 밀폐된 방안에 자기 자신이 앉아 있고 그 앞에는 커다란 책이 놓여 있다. 작은 창문을 통해 중국어로 된 이야기가 그에게 주어진다. 그는 중국어를 하나도 모르지만 책(영어로 된)에 나와 있는 명령에 따라 답에 해당하는 기호를 골라 밖으로 던져준다. 밖에서 이를 본 사람들은 방안에 있는 사람이 그 이야기를 이해하였다고 생각하겠지만 자기 자신은 중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컴퓨터는 흉내를 낼 따름이지 진정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지능은 인간의 특권

'괴델, 바하, 에셔'의 저자로도 유명한 홉스 태터는 '아인슈타인의 두뇌와의 대화'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정했다.

"만일 마음을 프로그램화 할 수 있다면 아인슈타인의 마음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서 이를 책으로 만들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튜링 기계에서 계산 가능한 알고리즘은 어떤 구현방법을 통하더라도 상관없기 때문에 단순한 책을 이용하더라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그 책에 나와 있는 설명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 책은 아인슈타인과 똑같이 이해하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굉장히 느릴 따름이지 원칙적으로는 아인슈타인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확히 언제 의식이 생성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 책이 펼쳐질 때인가, 아니면 책에 어떤 변화가 주어질 때인가? 만일 책이 전혀 펼쳐지지(읽혀지지) 않는다면 그 차이를 본인(책)이 인식할 수 있을까? 만일 두 사람이 동시에 책을 펼쳐본다면 어떻게 될까? 의문은 꼬리를 물게 된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강인공지능을 근본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 어쩌면 영국의 수리물리학자 펜로즈(Penrose)가 '황제의 새마음'(Emperor's New Mind)이라는 책에서 주장한대로 현재의 물리학적 지식만 가지고는 마음이라는 현상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언젠가 마음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물리적 체계가 확립된다면, 그리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튜링 기계가 아닌) 형태의 계산체계에 기반한 컴퓨터가 등장하게 된다면 논의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기계는 기계의 영역에 머무르게 하자. 기계는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작업을 지능이 있는 것처럼 흉내낼 뿐인 것이다. 단지 영역을 조금씩 넓힐 따름이다. 시가 있고 노래가 있고 이심전심의 사랑이 있는 곳, 그곳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진정한 지능은 인간의 특권인 것이다.
 

진정한 지능이란 어쩌면 인간만의 특권인지로 모른다.인간 모습을 한 인조인간이 미묘한 감정을 인간처럼 처리할 수 있을까?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5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박승수 교수

🎓️ 진로 추천

  • 철학·윤리학
  • 컴퓨터공학
  • 심리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