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1. 노벨상에 성큼 한국 과학자들 역주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는 언제 나올까. 기초과학에 대한 몰이해와 투자부족, 주입식 입시교육이 개선되지 않는 한 노벨상 콤플렉스는 벗어나기 힘들다.

지난 10월 중순 우리나라가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라이벌 일본을 누르고 승승장구할 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일본인 오에 겐자부로가 발표됐다. 신나는 승전보, 특히 일본을 압도한 마라톤 등 구기종목의 승리로 들떠 있었던 우리 국민들은 뭔가 찜찜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노벨상은 올림픽 금메달과 곧잘 비유된다. 특히 서울 올림픽 메달 순위 4위에 이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8위에 올라 스포츠 강국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세계 30여개국에서 노벨과학상(물리 화학 의학 생리)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메달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논할 수 없지만 올림픽메달을 10여개 이상씩 따는 우리나라가 아직 한번도 노벨과학상 후보로 오르지 못한 것을 보면 기형적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물론 노벨상이 스포츠처럼 집중적으로 투자한다고 해서 쉽게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우리는 과학보다는 스포츠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노벨상이 미국인과 유태인들에 의해서 독식된다든가, 수상자 선정에 정치력이 개입된다든가 하는 여러가지 구설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노벨과학상의 권위만큼은 누구라도 인정한다.

노벨상 콤플렉스

"과연 우리는 언제 노벨과학상을 탈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한 과학계의 답변은 '시기상조론'이 우세하다. 일부에서는 조금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언제 노벨상을 받을 만큼 기초과학에 투자를 해놓고 결과를 기다리느냐"고 반문한다. 씨도 안뿌리고 수확을 거두려는 심사를 빗대서 한 말이다. 스포츠에 투자하는 돈 10%만 썼어도 지금처럼 황당하지는 않으리라는 이야기다.

몇년 전에 내한한 한 노벨상 수상자가 기자의 '한국인 노벨상' 질문에 "한국인의 노벨상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경이롭고 신비스럽기조차 하다"고 말했다. '상을 타고는 싶고, 상을 타기에는 너무나 멀고…' 우리상황을 나타내주는 적절한 표현이다. 일종의 노벨상 콤플렉스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공업국으로 도약을 꿈꾸는 나라, 스포츠 10대 강국, 한국이 유독 노벨상에 접근조차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과학자 한두명만 만나보면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다. "노벨상은 기초과학중에서도 창조적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상례인데, 우리나라처럼 기초과학이 푸대접 받는 풍토에서는 아무래도 힘들지요." 서울대 분자생물학과 노현모 교수의 이야기다. 일반인이나 매스컴이나 '과학'하면 '컴퓨터'나 '환경' 정도 떠올리는 게 고작이다.

불과 30년 동안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해오는 가운데 투자를 했다고 하는 분야는 단기간 내에 성과를 볼 수 있는 산업기술을 중심으로한 응용과학분야가 고작. KAIST(한국과학기술원) 심상철 원장(화학)은 "국가 차원의 기초과학에 관한 투자가 전혀 없다. 연구란게 몇년을 무한정 쏟아붓고 시간이 한참 지나야 조금씩 결과가 나오는 것이 보통인데, 우리는 2-3년 내에 결과가 나와야 한다"며 "이런 조급함속에서 진행되는 연구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고 말했다. 노벨상도 요즘은 '돈이 말한다'(money talks)는 얘기가 통용된다는 것. 과거 노벨상의 산실이었던 카벤디시연구소가 요즘은 투자가 따르지 못해 명성이 예전만 못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

몇단계를 거쳐야

김용준박사(전 고대 화공과 교수)는 노벨상 가능성에 대해 한마디로 일축한다. "실정도 모르고 무슨 노벨상 운운입니까. 대한민국 전체 대학의 연구비가 일개 대학인 MIT의 70%도 안되는 이 상태로는 50년이 지나도 불가능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연구설비의 하나인 5백MHz짜리 NMR은 도쿄대학에만 11대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나라 전체에 겨우 4대뿐입니다. 그나마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데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서울대 물리학과 김제완 교수는 조금 색다른 지적을 한다. "일본이 경제력에 비해 노벨상 수상자가 적은 것은 우리와 비슷한 입시제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창조성이 생명인 기초과학 분야에서 성과를 내려면 문제를 푸는 능력보다는 문제를 찾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어려서부터 주입식 입시교육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아무래도 노벨상하고는 거리가 멀지요."

기본적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몰이해와 투자부족, 거기에다가 '주어진 과제만을 푸는데 길들이는' 교육제도 자체가 노벨상 콤플렉스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노벨상에 '근접한' 한국인 과학자를 거론하는 것은 앞뒤가 안맞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을 놓고 볼 때 거명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대체적으로 동감하는 이야기였다.

먼저 물리분야. 7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휘소박사를 제외하고는 물리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노벨상 후보는 없다는 것이 중론. 유명한 해외유학 1세대인 미국 브라운대 강경식(58, 입자물리이론) 존스홉킨스대 김정욱(60, 원자핵 약작용), 컬럼비아대 이원용(63, 입자물리실험) 등은 노벨상을 받기에는 역부족이고 이들의 제자뻘인 30,40대에서는 현재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이 없다.

해외파 중에는 프랑스의 노만규박사(58, 원자력청 산하 샤클레 연구소, 핵물리) 정도가 손꼽힌다. 노박사는 중간자들이 핵력에 미치는 영향과 중성자별의 내부구조에 대해 2백여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수상경력도 노벨상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유럽 입자물리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폴 랑제방상을 받는 등 수상경력도 다채롭다.

국내 학자로는 87년 제1회 한국과학상을 받은 서울대 김진의 교수(48)가 한때 거론되기도 했으나 본인의 표현처럼 '노벨상 유력'이라는 표현이 부담스러운 형편. 김교수는 79년 아주 가벼운 액시온이라는 입자이론을 미국 물리학회의 '피지컬 리뷰'에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김교수 논문을 인용한 논문건수가 2천회 이상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김교수의 액시온 입자는 실험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페르미연구소를 비롯 미국의 주요 연구소에서 액시온입자의 입증실험이 행해지고 있다.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김교수는 미국 양자물리학계의 명문인 로체스터 대학에서 물리학으로 학위를 받았으며, 33세의 나이로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액시온 입자 이론을 발표했다.

92년 한때 고온초전도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연구로 주목을 받았던 서울대 임지순교수(43)는 "실험 결과 이론이 증명되지 않아 포기했다"고 말하면서 노벨상에 관한 몇가지 견해를 밝혔다. "노벨상 수상자가 국내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몇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단계는 외국 유명 저널에 많은 논문을 싣는 것이고, 두번째는 SCI(Science Citation Index), 즉 외국논문에 인용되는 숫자가 느는 단계 , 셋째는 노벨상은 아니더라도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학회의 상을 받는 단계, 그리고나서 노벨상이 나오겠지요. 우리는 첫번째 단계에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희망, 김성호

화학분야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희망'이 하나 있다. 미국 버클리 대학의 김성호교수(56). 지난 87년 발암단백질 라스의 3차원적 입체구조를 세계 최초로 규명한 김교수는 한국인으로서는 가장 노벨상에 근접한 인물로 꼽힌다. 현재 그는 라스단백질과 콜레스테롤의 관계를 규명하는 동물실험에 주력하고 있는데, 이 결과에 따라 유방암 폐암 방광암 등의 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영예의 상징인 미국과학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한 김교수는 이미 라스단백질 구조 규명 업적을 인정받아 로렌스상과 일본 왕실에서 수여하는 암재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이밖에도 1978년 tRNA(전령RNA)의 입체구조와 기적의 감미료라 불리는 토틴의 단백질 구조를 세계 최초로 규명하기도 했다 .

인하대 김성수교수는 "80년대 들어 국내 유기화학분야가 급속히 발전했지만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는 아니다"며 "올해 수상자인 헝가리 태생의 올라 박사처럼 가능성이 보이면 독지가가 나타나 전적으로 재정지원을 해주는 풍토가 아쉽다"고 밝혔다. 심상철 원장 또한 "그나마 유기화학이 발전한 것은 제약업 등 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금방 돈이 될 수 있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노벨상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최근 화학연구소 의약 연구부의 김완주박사팀의 신약 개발 연구성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루어낸 값진 것으로 평가된다. "제2세대 퀴놀린계 항생제 개발은 화학연구소 20년의 결과물이다. 김완주박사는 대단한 사람이다. 하버드의 경우 저명한 학자 밑에 20여명의 포스트닥(박사후과정 연구원)을 거느리고 1년에 1-2백만달러의 연구비를 사용한다. 김박사 밑에는 박사 7명뿐이다. "김용준박사는 우리의 여건 속에서 김완주박사팀의 연구성과는 노벨상 이상이라는 설명이다.

김완주박사는 89년 값싸고 항균력이 높아 50여가지 질병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2세대 퀴놀린계 항생제를 개발해, 93년 영국 제약회사에 기술수출했으며(기술특허료 2천1백만달러, 매출액의 3-5% 경상기술료) 최근에는 암치료제와 에이즈치료제 등을 개발하고 있다.

화학분야에서는 독특한 이론체계를 가지고 물 분야의 논문을 1백편 이상 발표한 바 있는 한국과학기술원 전무식교수(62)와 스위스 취리히 공대에서 양자화학연구를 하고 있는 하태규박사(60) 등이 이름을 거명할 수 있는 정도. 이외에도 서울대 이은 서세원 임정빈 서정헌 교수와 한국과학기술원 김성각 도영규 교수 등이 젊은 층으로 국내 화학계 각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탄바이러스, 이호왕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유전공학센터 이대실 박사는 90년 3월 노벨의학생리학상 위원회 사무총장인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의 린드스텐 박사가 내한했을 때 "한국에서 노벨상을 받는다면 누구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담박에 고대 미생물학과의 이호왕 교수를 꼽았다고 한다.

이호왕 교수는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인 한탄바이러스를 처음 발견하고 동정했으며 그 치료제와 백신까지 개발했다. 한 분야를 시작부터 끝까지 완결해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세계적으로 인정된다. 다만 유행성출혈열은 한국이나 중국 등에만 발생하는 질병이라는 점이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불리하다는 중론.

의학생리학상은 주가가 치솟고 있는 분자생물학과 유전자 관련 분야가 갈수록 강조되는 추세. 이밖에 단백질 암 AIDS 노화 등 단골 주제가 정해져 있다. 따라서 다른 분야와는 달리 '별난 창조적인 주제'를 찾을 필요없이 이들 주제 중에서 해결의 실마리만 찾으면 노벨상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이 주제는 기초의학에 대한 물적 인적 투자가 선행되지 않으면 접근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

"의학생리학 분야에서 한국인 노벨상감을 꼽기 어려운 이유는 우수한 인재가 험난한 기초의학보다 돈벌이가 쉬운 임상분야로 빠지기 때문이다. 연구인력도 적은데다 지원도 시원치 않아 주목할만한 연구성과가 나오기 힘들다. "국내 의학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이야기다. 따라서 국내에서 노벨상 근접인을 거론하는 것은 시기상조이고 해외파로는 NIH(미 국립보건원)의 이서구박사(51, 신호전달체계)와 캐나다 캘거리대의 윤지원박사(55, 당뇨병백신개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호황 교수^ 고대미생물학과 교수. 세계최초로 유행성 출혈열의 원인인 한탄바이러스를발견 ·동정했고 그 치료제까지 내놓았다. 그의 연구의 특이성은 세계적 인정을 얻고 있으나 유행성출혈열이 동양에서만 발생하는 질병이란 점이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3세대의 몫

"노벨상을 이야기하다보면 답답해지는 이유가 우리 나라에서 독창적으로 탄생한 학문이 없다는 점이지요. 가령 생명과학과 관련된 분야만 하더라도 면역학 미생물학 세균학 등 우리나라에서 나온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학문은 아직 서구의 것을 모방하는 단계입니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한국인의 내음이 담긴 학문 영역을 새로 개척하고 이를 체계화해야 노벨상도 타고 민족적 자존심도 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이대실 박사의 이야기는 노벨상 콤플렉스에만 젖지말고 기초과학부터 창조성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

김제완 교수의 말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국내외에서 학위를 받은 우수한 인재들이 자신의 학위논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학위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데, 거기에 연연하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지 못합니다. 학위 논문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새출발을 하는 태도가 아쉽습니다." 단순히 노벨상을 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 연구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노벨상과 관련해 아주대 석좌교수인 정근모박사의 '3세대론'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진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과학기술계가 국제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우수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3세대가 걸린다는것. 1세대는 과학기술을 처음으로 접하고, 2세대는 정규교육을 받고 본격적인 연구활동에 전념하며, 3세대는 스스로의 연구능력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획기적인 업적으로 세계의 과학기술계를 이끈다는 주장이다. 정박사는 "지금 우리는 70년대부터 양성되기 시작한 2세대에 이어 3세대 과학기술자를 고대하고 있다"며 "이들이 세계를 향하여 쭉쭉 뻗어나갈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림픽 메달은 거저 나오지 않았다. 하물며 노벨상 메달이야. 세계 수준을 따라잡기 위해 '관중도 없는' 연구실에서 날밤을 세운 2세대 과학기술자의 의견을 경청하여, 3세대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한마당을 만들어 줄 때 비로소 노벨상 콤플렉스를 벗을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김두희 기자

🎓️ 진로 추천

  • 물리학
  • 화학·화학공학
  • 생명과학·생명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