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이 들고 땅이 메마른 이유는 태양신이 분노한 탓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높다란 신전 위에서 마야의 제사장은 이렇게 외친 뒤 예리한 칼로 남자 노예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든다. 이어 이 노예의 머리를 잘라 계단으로 굴린다. 광기 어린 군중은 일제히 손을 들고 괴성을 지른다.
산 제물의 심장을 태양신에게 받쳐 분노를 가라앉히고 가뭄에서 벗어나 보려는 이 끔직한 의식은 마야문명의 몰락을 다룬 멜 깁슨 감독의 영화 ‘아포칼립토’의 한 장면이다. 마야인들이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은 잔인한 살인행위가 아니라 우주를 구하기 위한 신성한 종교행사였다.
1839년 미국인 변호사 존 스티븐스가 영국인 동료 프레더릭 캐서우드와 함께 중앙아메리카 밀림 속에 버려진 마야유적과 도시 44곳을 발견했다. 기원전 2500년경부터 시작된 마야문명은 현재의 멕시코 남부에서 과테말라, 유카탄반도, 온두라스 일부까지 퍼져 있었으며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을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문명이다.
마야민족은 인간이 살기에 부적합한 열대밀림에 도시를 세우고 건축술, 천문학, 수학에서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다. 철제도구도 없이 석회암이나 단단한 나무로 대들보를 만들어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했고 1년(365.2420일)과 한달(29.5320일)의 길이를 정확히 파악했으며 세계 최초로 0을 이해하고 사용했다.
하지만 마야인들은 9세기말 갑자기 연기처럼 증발했다. 전쟁의 흔적도, 다른 곳으로 이동한 흔적도 없이 이들은 왜 사라졌을까.
석회암과 화전농업의 재앙
마야문명이 멸망한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마야문명이 꽃피던 지역의 환경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멕시코의 유카탄지역은 정글이라고는 하나 연중 비가 많은 적도의 열대우림지대가 아니다. 이 지역은 적도에서 다소 떨어진 북위 17°~22°에 위치해 5~10월이 비가 오는 우기이고 나머지 기간은 비가 없는 건기다. 이곳은 ‘계절적 열대우림지역’이나 ‘계절적 건조지역’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유카탄반도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면서 연강수량이 40mm에서 250mm로 늘고 토양층도 점차 두꺼워진다. 따라서 남쪽 지역이 농사를 지으며 살기에 더 적합하다. 하지만 남쪽이 가뭄에는 더 취약했다. 구멍이 많은 석회암 지역이라 비가 오면 곧바로 지하로 스며드는데, 북부에 비해 지표고도가 높아 우물을 깊이 파야 지하수를 이용할 수 있었다.
실제 지하 100m 깊이의 우물 유적이 발견됐다. 또 마야문명의 중심지인 티칼에 1만명이 18개월 동안 먹을 만큼의 물이 있는 호수가 있었지만, 우기에 비가 오지 않는다면 심각한 가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마야인들의 화전농업도 문제였다. 나무를 베고 잡초와 함께 태운 뒤 몇 년에 걸쳐 옥수수를 가꿨다. 화전농업은 유카탄반도처럼 수림이 울창하고 돌이 많으며 그리 비옥하지 않은 토양에서 마야인들이 살아가는데 적절한 농업형태였지만 토양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 장기간 옥수수라는 하나의 농작물만 재배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토양층은 그다지 깊지 못해 한번 화전을 하고 나면 양분이 고갈돼 마야인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척박해진 토양에는 15~20년이 지나야 다시 야생수목이 돌아왔다.
나무의 증산작용으로 상당한 비구름이 형성되는데, 삼림이 사라진다면 가뭄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결국 마야경제의 핵심이었던 농업이 파탄나면서 마야문명이 종말을 자초했을 수 있다.
마야와 당나라의 공통점
수년 전스위스와 미국의 공동연구팀은 마야문명이 융성했던 멕시코 유카탄반도 근처 바다의 퇴적물을 조사했다. 이 지역에는 육지에 티타늄(Ti) 성분이 많은데, 비가 오지 않는 건조기에는 육지에서 온 퇴적물이 줄어 바다 퇴적물 속의 티타늄 양도 줄어든다. 연구팀은 이를 이용해 760년, 810년, 860년 그리고 910년에 극심한 가뭄이 3~6년 계속됐음을 밝혀 2003년 3월 14일자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이 시기의 가뭄은 인구가 집중된 유카탄 반도의 남쪽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나타났다. 땅이 메말라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해 도시는 황폐화됐고 결국 마야문명은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또 암석의 부식 현상이 잇달아 일어나 건축물이 붕괴됐을 가능성도 높다.
지난 1월 독일 포츠담에 위치한 ‘국립지구과학연구센터’의 게랄트 하우크 박사팀은 ‘네이처’에 중국 당나라와 멕시코 마야문명의 몰락 원인이 가뭄이라는 학설을 제기했다. 수천km 떨어진 곳에서 최고를 자랑했던 두 문명이 10세기경 사라진 원인은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뜻이다. 중국당나라와 멕시코 마야문명의 소멸이 서로 관계가 있을까.
하우크 박사팀은 중국 최대 담수호인 후광평야 둥팅호와 베네수엘라 연안 캐리아코우 섬에서 침전물을 채취해 연구한 결과 양측 모두 8세기와 9세기에 강수량이 줄어들었다는 흔적을 발견했다. 연구팀은 두 문명의 멸망이 비가 남부로 치중되면서 북부 지방 전체에 여름 장마가 사라지고 가물었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렸다.
중앙아시아에서도 10세기경에 습윤하던 기후가 건조해짐에 따라 가뭄이 심해지고 이 가뭄은 점차 아시아 서쪽으로 확장됐다. 건조했던 기후 때문에 당시 건설된 마을이나 도로가 깊이 3~3.6m의 카스피해 바닥에서 발견되고 있다. 결국 계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비단길 연안의 많은 도시가 사라졌다.
과연 당나라와 마야문명의 몰락이 가뭄때문일까. 일부학자는 인위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한다. 당나라는 751년 아랍권과의 전쟁에서 참패했기 때문에 쇠락했으며, 마야문명은 인구과잉과 무분별한 환경개발로 인해 몰락했다는 주장이다.
기후 최적기 vs 소빙하기
중세시대 가운데 900년에서 1300년까지 전 유럽은 상당히 따뜻했는데, 이 기간을 ‘기후 최적기’라 부른다. 이 시기에 바이킹 세력이 커져 노르만인들이 잉글랜드를 정복했고 노르웨이는 그린란드에 처음으로 정착지를 세웠다. 당시 그린란드는 사람이 곡물을 생산하며 정착해 살 수 있을 정도로 따뜻했다.
하지만 ‘기후 최적기’가 끝나는 13세기 마지막 10년간 유럽은 추워졌다. 그린란드의 정착민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기후변화를 알아차렸다. 얼음이 전혀 없던 뱃길에 바닷물이 언 얼음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부둣가가 얼어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4세기 중엽에는 더 가혹하게 추워졌으며, 그린란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해갔다. 1500년에 이르자 노르웨이인들은 그린란드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그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300여년은 ‘소빙하기’(Little Ice Age)라 불릴 정도로 한랭한 날씨가 북반구 대부분을 덮쳤다. 프랑스 알프스지역의 몽블랑 북쪽에 있는 샤모니 계곡의 아르장티에르 빙하를 비롯해 알프스 빙하는 16세기 중엽부터 차차 확대돼 소빙하기 동안 고도 1400m까지 내려왔다. 당시 이상기후는 결국 흉작으로 이어졌고 식량 부족은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이 됐다.
아시아에서도 소빙하기는 있었다. 중국에서는17세기 후반에 특히 한랭해 감귤 밭이 피해를 입고 운하가 결빙하는 날짜가 늘었다. 일본에서도 여름이 서늘해 흉작으로 천명기근(1782~1787년), 천보기근(1833~1839년), 경응·명치 초의 기근(1866~1869년)이 찾아왔다. 이들은 일본역사상 3대 기근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770~1870년에 걸쳐 여름마다 때 아닌 서리, 눈, 바람, 우박, 안개의 이상기후현상이 나타났다. 1600년대 초, 1700년대 말, 1800년대 초 인구가 감소한 이유는 다분히 이상기후의 영향을 받아 흉작이 이어진 탓이다.
특히 소빙하기 중 최저 기온을 기록했던 17세기는 전세계적 혼돈시기였다. 유럽에서는 기근과 함께 30년 전쟁(1618~1648년)이 이어졌고 중국에서는 1628년 최악의 ‘산시기근’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나 명나라가 멸망했다. 병자호란, 인조반정, 이괄의 난, 장길산의 봉기가 모두 17세기에 발생했다.
잃어버린 식민지를 찾아
“가뭄 때문에 사라진 문명의 전형적인 예는 잉카문명 이전에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였던 티와나쿠다. 안데스의 높은 고원에서부터 오늘날의 볼리비아, 칠레, 그리고 페루가 위치한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700여년간 지배했던 티와나쿠는 대략 1000년 전 가장 융성했다.
티와나쿠 경제의 핵심은 집약농업의 정교한 수리시스템이었다. 티와나쿠에는 높이 솟은 언덕이 길게 뻗어 있었는데, 티와나쿠인들은 이 언덕에서 씻겨 내려온 흙으로 평평한 경작지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 지역에 운하를 만들어 가뭄을 극복하고 밭의 테두리에 돌을 쌓아 열을 가둠으로써 안데스산맥의 고원지대에서 생기는 서리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수세기 동안 수십억 평방미터의 넓은 경작지에 활용됐고 중남미대륙의 농업경제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들의 경작지는 1000년~1100년부터 방치됐고 티와나쿠 도시도 폐허가 됐다.
과학자들은 안데스산맥 근처 켈콰야 빙하에서 뽑아낸 얼음시추물을 이용해 950년~1000년부터 1410년까지 끔찍한 가뭄이 강약을 반복하면서 계속됐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가뭄은 천천히 티와나쿠제국의 농업기반을 무너트리기 시작했으며 티와나쿠의 통치자는 변방으로부터 가뭄의 영향이 뻗어오자 서서히 그 위험을 깨닫고 새로운 경작지를 개척하며 재앙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이 제국의 농업기술자들도 오랫동안 이어진 극심한 가뭄을 극복하지 못했다.
기후변동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는 영국이 북미대륙에서 첫번째로 개척한 ‘로스트 콜로니’(Lost Colony, 잃어버린 식민지)의 운명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연안 로어노크 섬의 ‘로스트 콜로니’가 사라진 일은 미국 역사에서 오래된 미스터리 중의 하나였다. 1990년 후반에야 그 미스터리의 원인이 밝혀졌다.
미국 아칸소대 데이비드 스탈 교수팀은 나무나이테를 분석해 ‘로스트 콜로니’ 이주자들이 1587년~1589년에 그 지역에서 당시 가장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연구결과는 1998년 4월 ‘사이언스’에 발표됐다.
미국 역사에는 1587년 8월 22일 존 화이트라는 정착촌 촌장이 이 지역에서 식량을 얻기 힘들게 되자 구호물자를 구하러 영국으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 때문에 로어노크 섬으로 돌아올 배를 구하기 어려웠다.
어렵사리 구한 작은 배 2척으로 항해하던 중 프랑스해적의 습격을 받았으며 3년이나 지난 1590년 8월에야 겨우 로아노크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돌아왔을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극심한 가뭄 탓에 정착지가 몰락했던 탓이다.
거대 석상의 진실
칠레에서 서쪽으로 3600km 떨어져 있는 남태평양에는 이스터란 이름의 세모꼴 화산섬이 있다. 이스터 섬의 남쪽 해안에는 사람 얼굴을 한 200여개의 거대한 석상(石像)이 애수에 젖은 표정으로 바다를 향해 서있다. ‘모아이’라는 이 석상은 13~16세기 이 섬에 찾아온 환경재앙의 상징물이다.
섬의 원주민들은 거대한 석상을 만들기 위해 산에 있던 암석을 해안가로 옮기는 동안 상당히 많은 나무를 잘라냈다. 벌거숭이가 된 산에는 동식물이 사라져 생태계가 파괴됐다. 망망대해에 고립된 섬에서 파괴된 환경은 되돌릴 수 없었고 결국 수만명에 이르던 원주민 대부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재앙은 수백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됐다. 처음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수십대에 걸쳐 번창했으나 환경이 파괴되는 가운데 인구는 계속 늘어 섬의 수용한계를 넘어서자 서로 죽이고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최근 인간 활동은 기후를 자연적으로 변동시키는 지각 활동이나 지구 궤도 변화와 맞먹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구 환경 전체를 급속하게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고립된 지역에서 환경을 파괴시키다가 인구가 과도하게 증가해 문명이 파멸한 이스터섬의 사례를 보면서 태양계에서 고립된 지구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를 다시 생각해보자.
지구온난화라는 위기를 앞둔 현재 인류는 얼마나 현명하게 기후변화에 대처하고 있는가를 제대로 따져볼 필요가있다. 마야인이 숭배했던 태양신보다 인류를 품고 있는 ‘지구신’이 더 노할지 모를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