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숲정이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다. 전통적인 가축식물인 대나무 상수리나무 소나무가 밀려나고 깡패식물인 아카시나무 리기다소나무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전 국토의 67% 이상이 산지인 우리나라의 부락은 배산임수(背山臨水)형태로 발달해 왔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의식주를 좀더 쉽게 해결하고자 하는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숲정이(부락 배후의 숲)는 연료와 식료를 제공하는 에너지 공급원으로 아주 귀중하게 관리 돼 왔다. 우리나라의 전통 부락 경관은 바로 이 숲정이에 의한 특색을 가지며, 독특한 '숲정이 문화'를 창조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식물의 인연을 알아보는 데는 숲정이가 가장 걸맞는 재료라 할 수 있다.
정겨운 숲정이
숲정이에는 과연 어떤 식물들이 이용되었을까. 여기에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가축과 같은 독 특성을 소유하는 식물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숲정이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가축식물(domestic plant)은 대나무, 상수리나무 그리고 소나무다. 이들 숲정이는 텃밭의 채소밭처럼 죽밭 솔밭 도토리밭 등의 정겨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나무숲은 주로 중남부지방에 조성돼 식료(예 : 죽순)와 죽제가공품의 재료를 생산한다. 소나무숲과 상수리나무숲은 전국 어느 지방에서나 흔하게 조성돼 있으며 주로 땔감과 식료(예 : 버섯)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이용당함으로써 가축식물들은 그들의 개체 및 계통의 보전에 독특한 '번식 전략'을 터득했으며, 심지어는 사람들의 간섭에 대응하여 삼림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집단방어 전략'이란 메커니즘을 터득해 왔다.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 가운데 유일하게 꽃그림이 없는 대나무는 벼과식물로 일생 동안 한번만 꽃을 피운다. 그리고 난 후 일제히 죽기 시작히는 매우 드문 단개화식물(單開花植物, monocarpic plant)이다.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단개화식물의 속성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이 대나무다. 또다른 단개화식물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 자연 속에 저절로 생육하는 '조릿대'가 있는데 조릿대는 복조리 재료가 된다.
대나무(Phyllostachys bambusoides, 왕대의 경우)는 1백20년 주기(경우에 따라 60~80년), 조릿대(Sasa borealis)는 5~10년 주기로 한번 꽃피고 집단 자살을 해버리는 해괴한 식물이다. 이들은 1년생도 2년생도 다년생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벼과식물이다. 동일한 모죽(母竹)으로부터 태어난 자죽(子竹)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생육할지라도 그 꽃피는 시기와 소멸시기가 유사하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비에 대해 과학적으로 확실히 밝혀진 정보는 없다. 다만 빛에 의해 지배받는 어떤 내부 유전시계(internal genetic clock)라는 메커니즘에 의해 오랜 세월 꽃필 준비를 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모죽의 개화시에 땅속의 모든 영양분이 소모되기 때문에 죽아(竹芽)를 포함한 모든 자죽이 굶어죽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이 개체나 계통의 보전 본능에 있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고려할 때, 처음부터 이 '대나무'라는 식물이 그런 가축 식물적 속성, 즉 자연 그대로는 종족번영이 불가능한 속성을 소유하고 태어났을리는 만무하다.
집단자살의 메커니즘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대나무는 종족의 집단 소멸을 감내하는 그런 생태적 전략으로 진화해 온 것일까. 이런 생태적 전략에 대한 진화 과정은 화석 표본에 의해 명백히 밝혀질 수 있는 형태적 진화 과정과는 달리, 1백 20년 동안 겨우 한 번 조우할 수 있을까 말까한 대나무의 집단 개화와 집단 소멸에 대해, 한 명의 과학자가 당대에 그 진화의 진리를 밝히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대나무의 진화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식물 가운데 사람에게 이용된 역사가 오래된 식물임을 감안할 때 사람 영향에 의해 강요된 진화의 시나리오를 예측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본래 열대지방이 원산지인 이 대나무 종류는 우후죽순(雨後竹筍)을 한결같이 쑥쑥 내미는 습성으로 장구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집약적인 약탈 대상이 되어왔다. 싱싱한 죽순은 곧바로 식탁에 올려지게 되니 모죽(母竹)으로서의 성장은 커녕 종족 번식을 위해 꽃을 피울 방도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나무는 마침내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땅속줄기로 자죽(子竹)을 만들어 번식하는 게릴라전략(guerilla strategy)을 터득한다.
그러나 이 전략에 의한 대나무만의 지하공간 점유는 수요(需要) 영양원소의 동일성과 지상에서 공급되는 영양원(대나무의 낙엽)의 동질성으로 말미암아 지력이 급격히 쇠퇴되고 마침내 공멸(共滅)하고 마는 운명에 처한다. 그나마 자연 산속 숲바닥에서 생육하는 조릿대는 숲지붕(樹冠)의 여러 타식물종으로부터 공급되는 다양한 영양 공급으로 완전한 공멸의 위기는 맞이하지 않는다. 자죽의 20% 정도는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대나무는 조릿대와 다르게 이제 저절로 살아가는 야생 식물이 아니라 사람이 인위적으로 자죽을 옮겨 심어주지 않는 한 종족 번영이 불가능한 반인간적(半人間的) 식물로 진화해 버린다.
한편 우리나라 숲정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축식물이 상수리나무와 소나무다. 이 나무들은 연료로, 건축용 재료로 숲정이에서 길러지는 가축식물이 되고 말았다. 상수리나무(Quercus acutissima)는 단단한 목질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기둥(株)을 베어내더라도 이듬해 더 많은 기둥이 솟아 그루터기를 만드는 속성이 있다. 이는 숯 생산에 무엇보다도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소나무(Pinus densiflora)는 아름다운 나뭇결과 옆가지를 쳐주면 곧게 잘 자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건축용이나 가구용에 매우 적합할 뿐만 아니라, 송진을 듬뿍 품은 잔챙이들은 땔감으로 크게 사랑을 받았다. 이 때문에 숲정이 속에서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사람들의 보호를 받는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숲정이 속에서라도 소나무나 상수리나무는 이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온 자연산 식물들을 사람이 솎아주지 않으면 그들과의 경쟁에 밀려 결코 번성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숲정이는 지금까지 억압받아 온 자연산 식물들에 의해 이듬해 대반란이 시작된다. 숲정이 가장자리 입구에서부터 멍석딸기 산딸기 줄딸기 찔레꽃과 같은 가시가 돋은 식물과, 칡 댕댕이덩굴 인동(일명 인동초) 같은 덩굴식물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번성함으로써 사람들의 접근을 방해한다. 그리고 청미래덩굴 미역줄나무 노박덩굴과 같은 게릴라식물들이 숲정이 내부로 침투하여 숲바닥을 평정하고 나면, 서서히 그 땅의 주인식물이라 할 수 있는 잠재자연식생(potential natural vegeration)의 구성종들로 가득 메워진다.
마침내 어디를 살펴보나 상수리나무와 비슷한 모양의 굴참나무(Quercus variabilis)와 그 사촌인 졸참나무(Quercus serrata) 등에 의해 고유의 참나무숲이 형성되고, 소나무는 산등성이로 쫓겨나게 된다. 이와같이 숲정이를 구성하는 식물들은 사람들의 간섭에 따라 여러가지 생육전략으로 진화하면서 멤버 교체가 명확히 이루어진다.
깡패식물의 등장
경제 발전과 의식주 원료가 다양해진 오늘날의 숲정이는 그 역할이 크게 감소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길러왔던 대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의 가축식물들은 이제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편으로는 북미에서 들여온 아카시나무(일명 아카시아, Robinia pseudoacacia)와 리기다소나무(Pinus rigida)에 의해 숲정이는 새로운 경관을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봄의 숲정이 경관은 하얀 꽃이 핀 아카시나무숲이 아니면 사계절 색의 변화가 없는 리기다소나무숲으로 대표되리 만큼, 우리에게도 북미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야릇한 경관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 아카시나무와 리기다소나무는 가축식물이라기 보다는 사람들이 관리하지 않으면 아주 흉칙스러운 숲정이를 만들어버리는 '깡패식물'이다. 특히 카시나무가 우거진 숲정이의 땅바닥에는, 이미 아카시나무 치수(稚樹)를 비롯하여 찔레꽃 댕댕이덩굴 며느리배꼽 참마 멍석딸기 노박덩굴 칡 등 파괴된 입지에 유리한 게릴라전략의 덩굴 및 가시식물이, 10% 이상의 높은 군락형성기여도를 가지고 숲정이를 완전히 장악한다.
또한 아카시나무의 우점은 토지의 과질소 현상을 초래하며, 모수(母樹)가 자연고사(수령 30~40년)한다 할지라도 지하 뿌리에서 직접 뻗어나는 치수의 왕성한 발육이 고유 수종의 침투를 지속적으로 저해하게 된다.
결국 이 땅의 자연회복, 즉 고유식생(native vegetation)으로의 천이가 크게 방해받는 셈이다.
사방용으로 용재용으로 들여와 요즘은 밀원(蜜原)으로도 크게 강조되고 있는 아카시나무는, 우리 숲정이의 애물단지(source of trouble)가 돼버린 것이다. 사실은 이 땅의 기후와 토질에 적응하여 저절로 생육하면서, 아카시나무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는 많은 식물들이 자연 산천에 널려져 있다. 아카시나무가 없었던 단군시대에도 이미 꿀을 많이 먹었다는 기록을 들추지 않더라도, 이 땅의 4천5백여종의 식물 가운데 밀원이 될 수 있 는 고유 식물들(꽃향유를 포함한 꿀풀과 식물, 싸리류를 포함하는 콩과 식물 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사방용으로건 용재용으로 건 리기다소나무를 대용할 수 있는 식물(대부분의 목본 식물) 또한 이 땅의 자연 속에 수없이 자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숲정이는 본래 어떤 모습의 자연이었을까. 숲정이 모습이 자연 상관(相關, physiognomy)으로부터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에 벼농사가 시작된(B.C. 7세기 이전)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정착 농경이 발달함으로써 부락이 형성되고, 부락 근처의 삼림은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숲정이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일방적 희생을 강요해서는
화분분석학(花粉分析學)적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의 지층에서 소나무의 화분이 가장 높은 빈도로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정착 농경에 의한 경작지 확보를 위해 대(大)면적의 벌채와 잦은 산화(山火)가 성행했으며, 그런 인간 간섭에 적응력이 뛰어난 소나무는 그 생육 면적을 확장해 갔다. 부락근처 숲정이에서도 땔감용으로 가장 적절한 소나무가 가축식물로 이용되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정착농경에 의한 주변 삼림 자원의 고갈로 청동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문화적 변천을 초래하게 되었을지 모른다"라는 인류문화학자들의 역설적 주장과도 일치하는 내용이다. 청동을 제련하기 위해 보다 열효율이 높은 연료를 찾게 되고, 그에 따라 양질의 숯을 얻을 수 있는 참나무류는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자연 삼림의 파괴 면적은 또다시 확대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나무류(졸참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등)는 한반도의 기후적 특성, 즉 온대지역에 속하면서도 계절적 몬순현상이 뚜렷한 한반도의 자연에서 가장 경쟁력이 뛰어난 식물이다. 본래의 숲정이 모습은 참나무류로 우점되어 있었다. 그러한 숲정이로부터 연료의 획득은 매우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참나무류가 우리나라 자연 숲정이를 대표하는 식물종인가"라는 새로운 명제에 접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숲정이가 위치하는 입지의 잠재자연식생의 정보에 따라 식물사회의 종조성을 보다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을 때 명확히 답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과제다.
'잠재자연식생'이란 대상 지역에 있어서 현재 상황 아래 사람들의 모든 간섭을 완전히 배제했을 때 자연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종국식물사회를 의미하여, 식생학(vegetation science)의 거장 특센(R.TÜxen 1899~1980)이 1956년에 독일의 자연 보전과 그 회복을 위해서 창시한 이론적 개념이다. 이것은 그 지역의 기후적 토지적 환경 조건 모두를 총화한 '극상림'(clamax forest)과 같다.
일반적으로 잠재자연식생이라 할 때는 여러 식물사회 가운데 그 지역을 대표하는 자연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자연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잠재 자연식생을 판단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현존하는 식물사회의 종조성을 식물사회학적으로 면밀히 조사해 보면 그 지역의 잠재자연식생은 결정될 수 있다. 이러한 잠재자연식생은 국토의 자연 회복을 위한 올바른 '적지적소(適地適所)의 생태학적 정보'로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잠재자연식생은 크게 다섯 가지로 대표된다. 남해의 해안 저위도 지역에서부터 백두산의 고위도에 이르기까지 난온대-상록수림, 온대-낙엽수림, 냉온대-낙엽수림, 한온대-침활혼합림, 아고산-침엽수림의 순으로 수평적 배열을 보여주는 숲의 사회다. 이것은 각 지역의 지리와 지형에 따라 수직적으로 압축돼 관찰되기도 하는데 제주도는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라 할 수 있는 도시나 농촌 지역의 잠재자연식생은 온대-낙엽수림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숲을 식물사회학적으로 '졸참나무-작살나무아군단'(Callcarpo-Quercenion serratae Kim J.W 1992)이라 부르기도 한다. 졸참나무 신갈나무 서어나무 개벗나무 산벗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단풍나무 당단풍나무 물푸레나무 쇠물푸레나무 다릅나무 말채나무 층층나무 산딸나무 쪽동백나무 때죽나무 함박꽃나무 아그배나무 노각나무 비목나무 등은 주요 구성 수종들이다.
그 가운데 졸참나무와 신갈나무는 우리를 대표하는 식물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그런 나무들이 어우러진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사람과 식물과의 인연은 오직 식물의 희생에 의해서 맺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식물의 희생만을 강요한 것도 우리들의 몫이었지만, 이제부터 숲정이를 비롯한 이 땅의 자연이 제모습대로 되찾아 갈 수 있게 하는 것도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