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대 말 양조업을 하던 줄은 경비를 줄이고 과학적인 호기심도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동력원의 효율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열이 발생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칼로릭 이론이 틀리며 열기관에서는 실제로 열이 발생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칼로릭 이론에 의구심을 가진 것은 줄이 처음이 아니었다. 뮌헨에서 왕의 명을 따라 대포 깎는 일을 감독하던 벤자민 톰슨(럼퍼드 백작)은 작업 중에 발생하는 엄청난 열을 철주가 깎여나가 줄어든 칼로릭의 함량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서 천공기의 운동이 대포를 구성하는 입자에 전달돼 열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 역시 얼음을 마찰시켜 발생한 열로 얼음을 녹이는 실험을 통해 운동이 열로 바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주목받지 못했다.
줄은 먼저 전지에서 화학 작용으로 발생한 전기가 전동기를 작동시켜 역학적인 일을 만드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역학적인 일과 열 사이의 정량적인 관계를 측정하기 위해 역학적인 일로 전류를 만들어 내고 다시 이로부터 열을 만들어내는 전기 장치를 고안했다.
이 장치를 써서 열과 일 사이의 관계를 수치로 계산한 줄은 역학적인 일이 소모될 때 언제나 같은 양의 열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줄은 전기를 거치지 않고 역학적인 일에서 바로 열을 발생시키는 과정에 관심을 가졌다.
1845년부터 줄은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열의 일당량을 구하는 실험을 했다. 오랜 기간 그의 연구의 결정판은 젓개 바퀴 실험이었다. 줄은 1850년 왕립학회의 ‘철학회보’에 ‘열의 역학적 당량에 관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1840년대 내내 지속된 자신의 열의 일당량 측정 실험을 집대성했다.
그의 대표적인 실험 장치는 4개의 고정된 날개 사이에서 놋쇠로 만든 8개의 날개가 회전하도록 한 것이었다. 젓개 바퀴의 축은 자유롭게 회전할 수 있도록 돼 있었고, 젓개 바퀴는 구리로 만든 원통형 용기 속에 꼭 맞게 끼워지게 돼 있었다. 용기 뚜껑에는 목 2개가 튀어 나와 있는데, 하나는 젓개 바퀴의 축을 끼우고 다른 하나는 온도계를 끼우기 위한 것이었다.
통에 끼워진 젓개 바퀴의 축은 핀으로 원통을 연결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고, 원통에는 회전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회전 손잡이에 감겨 있는 노끈의 다른 쪽 끝은 도르래에 감겨 있어 추의 운동을 젓개 바퀴에 전달하도록 돼 있었다. 나무로 만든 도르래는 양쪽에 2개가 설치됐고, 지름은 1피트(약 30cm), 두께는 2인치(약 5cm) 정도였다.
도르래 중앙에 박혀 있는 원통형 축바퀴에 끈을 감아 납추를 매달아 놓았는데, 납추는 29파운드(약 13kg)짜리 2개를 먼저 사용하고 다음 실험에서 10파운드(약 4.5kg)짜리 2개를 사용했다.
중앙의 마찰 장치 원통은 나무 탁자 위에 올렸는데 나무판을 가로로 잘라 놓아 원통에 접촉하는 면을 줄여 되도록 열전도가 적게 일어나도록 했다. 줄은 이 실험 장치 전체를 지하실에 두고 온도 변화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렇게 준비된 상태에서 줄은 대기 온도와 통 속의 물 온도를 재고 납추를 63인치(약 1.6m) 높이에서 떨어뜨렸고 이 낙하 운동이 가운데 원통 속의 젓개 바퀴를 회전시키도록 했다.
그런 다음 추를 감아주는 과정에서 젓개 바퀴가 돌지 않도록 젓개 바퀴의 축과 끈이 감기는 원통의 연결핀을 뺀 뒤 원통의 축을 틀에 고정시키고 손잡이를 돌려서 추를 원래 위치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핀으로 원통을 젓개 바퀴의 축에 연결시킨 뒤 추를 떨어뜨렸다. 줄은 이 과정을 20번 반복했다.
줄은 실험 과정에서 실험자의 체온이 장치의 온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커다란 나무판을 실험자와 장치 사이에 놓았고,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공기의 온도가 상승하는 정도를 측정해 결과를 보정했다. 줄이 전체 실험을 하는 데 걸린 시간은 35분이었다.
그 다음에 줄은 구리 용기에 든 물의 질량과 젓개 바퀴의 비열과 질량, 구리 용기의 비열과 질량을 사용해서 장치가 얻은 열량을 계산했다.
또 추의 무게와 추의 총 이동거리를 사용해서 추가 한 일을 구하고 추가 바닥에 부딪치는 속력이 2.42인치/초인 것을 재서 운동에너지를 구해 추가 젓개 바퀴에 해준 일에서 제외했다. 온도계는 미리 예상되는 온도로 데워서 사용해 열용량 계산에서 제외시켰다. 줄은 이 과정을 40회 반복한 다음 평균값을 구했다.
이렇게 얻은 평균값으로부터 줄은 역학적인 일이 모두 열로 전환된다는 가정 아래 변환비율을 계산했다. 줄은 추의 무게를 바꾸고 마찰열을 받는 물질을 수은으로 바꿔가며 실험을 반복했다. 나중에는 주철을 마찰시켜 발생하는 열을 측정해 열의 일당량을 측정했다.
수년 간에 걸친 실험에서 얻은 결과로부터 줄은 마찰을 받는 물질이 액체든 고체든 물질의 종류에 관계없이 해준 일과 발생한 열 사이에는 일정한 전환비가 존재하므로 열의 일당량을 정의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가 1850년에 발표한 논문에는 이 실험 결과가 두가지로 요약돼 있다. 마찰로 생성된 열의 양은 일의 양에 비례하고, 물 1파운드의 온도를 1℉ 높이는 데 필요한 열의 양은 772파운드의 추가 1피트 낙하할 때 만들어내는 역학적 일과 같다는 것이었다.
원래 줄은 세 번째 결론으로 마찰이 일을 열로 변환시킨다고 적었는데, 이것은 한 심사위원이 “일정한 양의 열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같은 양의 일이 소모돼야 한다는 결론이 곧 열과 일이 서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삭제됐다.
줄은 열과 역학적 일이 동등하다는 것을 주장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1840~1843년에 덴마크의 루트비히 콜딩, 독일의 로베르트 마이어, 영국의 제임스 줄은 열과 일의 등가성에 대한 생각에 도달했다. 하지만 줄의 주의 깊은 설계와 실험 수행 능력, 오차 요인의 보정을 거친 매우 정확한 정량적 실험은 열과 일의 등가성을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물리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열역학 제1법칙, 곧 에너지 보존 법칙은 이렇게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지게 된 것이었다.
줄 은
1818년 영국 랭커셔 지방의 샐퍼드에서 부유한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교사에게 배우다가 1834년 ‘맨체스터 문학 및 철학 학회’에서 활동하던 원자론의 창시자 돌턴에게서 산술과 기하학을 공부했다. 이 관계는 2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1834년 줄이 가업인 양조업을 이어받은 뒤에도 과학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됐다. 양조장에서 사용하는 증기기관을 전동기로 바꾸고 전동기에 대한 연구를 논문으로 발표하면서 1840년 줄의 법칙을 발견했다. 열의 일당량 측정 실험으로 1850년 왕립학회원이 됐고, 1870년 영국 과학계 최고의 영예인 코플리 메달을 수상했다. 그의 업적은 일(에너지)의 단위인 줄(J)로 기려지고 있다.
재 · 현 · 실 · 험
줄이 1850년에 발표한 열의 일당량은 4.15J/cal였다. 이 값은 20세기에 들어와 4.184J/cal로 수정됐지만 당시의 열악한 실험 장치로 그 정도의 값을 얻어낸 것은 줄이 뛰어난 실험가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그의 정밀한 측정값은 오히려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845년 줄은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회의에서 추를 떨어뜨려 젓개를 돌리는 실험을 발표했다. 이 때 줄이 구한 열의 일당량은 4.41J/cal였다. 너무 정밀한 그의 측정치에 과학자들은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1847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회의에서 줄은 윌리엄 톰슨(켈빈 경), J. J. 스토크스, 마이클 패러데이 같은 물리학계의 거물들 앞에서 자신의 실험을 발표했다. 스토크스는 매우 우호적이었지만 패러데이는 부정적이었고, 톰슨은 흥미를 느꼈지만 회의적이었다. 같은 해 톰슨은 우연히 신혼여행 중인 줄을 만나 친분을 쌓았고, 이후 처음의 태도를 바꿔 줄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한편 카르노의 이론에도 깊은 매력을 느낀 톰슨은 두 이론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열역학 제2법칙을 이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