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하는 일이 비슷해 대화에서 얻는 것이 참 많습니다. 서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연구결과를 검증받기도 합니다."
부부교수인 서울대 물리학과 장회익(張會翼·55)교수와 이화여대 물리학과 모혜정(毛惠晶·54)교수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
첫째는 둘다 직업이 교수라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대학교수직을 얻기가 '하늘에 별따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부부는 충분히 부러움을 살 만하다. 그들은 교육경력도 똑같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70년부터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 모두 모교측의 적극적인 영입케이스라는 점도 공통된다.
그런데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출세(?)는 모교수가 먼저 했다. 85년부터 91년까지 이화여대 자연대 학장을 '장기집권'(연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모학장은 학부강의를 2강좌 맡아 했으며 대학원생을 여럿 배출했다. 장교수는 자연대 학장보와 물리학과 주임교수를 역임했는데 그는 보직은 가급적 맡지 않고 연구만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두번째 공통점은 그들이 물리학자라는 점이다. 그것도 둘 다 고체물리학을 전공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물리학이란 학문이 이 부부를 중매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집 사람을 처음 안 것은 고등학교 때였어요 청주에서 서로 같은 교회를 다녀 안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 1학년 때 집사람이 이화여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죠. 나와 같은 학문을 한다는 사실에 호기심도 생기고 왜 물리학과에 진학했는지도 궁금해져서…"
같은 물리학도였지만 결혼초기에는 서로 관심의 방향이 달랐다. 신랑은 고체물리에 심취해 있었고 신부는 입자물리실험에 몰두해 있었던 것. 장·모부부의 유학지였던 미국 캘리포니아대학(리버사이드 소재)에서도 그들은 각기 다른 교수 밑에서 물리학의 양대산맥인 고체와 이론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학을 떠난 지 2년 후에 우연하게 고체물리로의 통합이 이뤄진다. 신랑의 지도교수였던 조셉 캘러웨이교수가 루이지애나대학으로 옮기면서 장·모부부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 것.
1969년 이들은 루이지애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유학을 떠난 지 4년이 채 안돼 석박사과정을 한꺼번에 마친 것이다. 장교수는 당시 막 개발되기 시작한 반도체를 연구해 박사학위 논문을 썼고 모교수의 박사학위논문 주테마는 전이금속의 에너지띠이론이었다.
내남없이 어려웠던 시절에 대학생활을 한 장교수는 대학졸업 후 공군장교로 입대한다. 4년동안 공사 물리교관을 하면서 그는 대학시절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물리학과 씨름했다고 한다.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배우는 내용까지 독학을 해 두었는데 이것이 미국에서 학위를 빨리 받은 비결이었죠."
장교수가 공사교관으로, 이화여대 졸업식장에서 총장상을 받은 모교수가 이대부속 중학교 물리교사로 재직중이던 1964년 그들은 마침내 부부가 된다.
부부가 따로 조교직 얻어
그 이듬해인 1965년 부부가 함께 미국유학 길을 떠난다. 비행기값이 없어 돈을 빌린 뒤 나중에 조금씩 갚았는데 당시에는 유학생이 50달러 이상 가져 갈 수 없었다고 한다.
"남편과는 별도로 조교직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조교사무실에서 함께 근무했지요. 각자의 조교월급이 2백70달러씩이었으므로 생활은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나아졌지요.
하지만 결혼하자마자 곧 유학을 떠나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살림살이도 처음 해보는 데다가 언어장벽도 있고 문화적 차이에 의한 서먹서먹함도 있어 시작이 힘들게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유학생 부부는 서로 돕게 돼 있어요. 내가 경험하기로 유학생활에서 최대의 어려움은 외로움과 향수예요. 그러므로 결혼을 해서 함께 떠나는 것이 심리적 안정감을 가지고 유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장·모부부의 세번째 공통점은 전공과목 선택에 있어 각자 부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이다. 장교수의 선친(장병선씨)은 토목공학자로 저수지를 설계하고 공사 감독하는 일을 했다.
"늘 물리책을 소중히 여기고, 물리를 공부하려고 애쓰시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봐 왔습니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자 선친께서 물체의 자유낙하 문제를 하나 내시더니 풀어보라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교 수준의 문제를 용케도 풀어냈어요. 그후 나는 물리에 자신감이 생겨 장차 물리학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어요. 물리를 하기 위해 청주공고에 진학했는데 지금이라면 과학고에 지원했을 거예요."
5남매의 장남(장교수)과 결혼한 5남매의 장녀는 청주대학 국문과 교수였던 부친 모기윤씨(작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집안에 소설책과 시집이 가득했어요. 닥치는 대로 읽었죠. 그런데 철학과 과학관련 서적이 없어 이 분야에 대한 갈증을 더 크게 느꼈습니다.
크면서 차츰 논리적인 학문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한때는 수학자를 꿈꾸기도 했지만 논리에서 끝나는 수학보다 구체적인 대상을 가진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로부터 '네가 수학물리를 가르쳐 주면 쉽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막연히 교육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물리학과를 지원하게 되었어요. 대학 입학당시부터 교수직을 희망했던 셈이지요."
국내 최초의 여성물리학 박사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물리학박사가 탄생한 배경이다. 요즘엔 물리학과에 여학생 합격자가 꽤 많다. 반도체 컴퓨터분야 등 졸업후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다방면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 여성이 물리학과의 문을 두드리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당시 이화여대 물리학과의 경우 정원이 20명(현재는 80명)이었는데 모교수와 함께 졸업한 사람은 9명 뿐이었다고 한다. 장·모부부의 네번째 일치점은 둘다 현재까지 한권의 저서를 썼다는 것이다. 장교수는 '과학과 메타과학, 모교수는 '에너지띠이론'의 저자다.
'과학과 메타과학'은 물리학과 직접 관련된 책이 아니라 과학철학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실제로 장교수는 최근 몇년 동안 전공인 고체물리보다 생명현상을 물리적 입장에서 이해하는 생물물리와 과학철학을 연구하는데 더 많은 정열을 쏟고 있다.
"물리학의 뿌리가 뭔가를 추적하고 있어요. 여기에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철학을 접목시키고 있지요. 국내에선 어떤 학자가 박사학위를 따면 그 분야만 일생동안 파고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이런 풍조가 지속될 경우 학문의 폭이 좁아지고 학문간의 연계도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는 현재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학생들에게 과학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모교수도 최근에는 초격자이론(superlattice)과 초전도이론(superconduction) 등 두 '슈퍼'와 인연을 맺는 등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고 있다.
부부가 같은 학문을 하므로 일에 관련된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서로 아이디어를 교환하기도 하고 연구결과를 검증받기도 한다. 장교수는 과학자 중에서 아주 문장이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또한 모교수의 내조중 일부다. 초고를 써서 넘기면 '렌의 애가'의 소설가 모윤숙씨를 친고모로 둔 모교수의 첨삭이 가해진다. 장교수는 "자신의 초기 원고들은 집사람의 최종 'OK'를 거친 합작품들"이라고 말하면서 웃는다.
장·모부부는 1966년부터 컴퓨터를 다루었으므로 적어도 국내에서는 '컴퓨터 제 1세대'인 셈이다.
"당시의 컴퓨터는 집채만한 것이었는데 그 능력과 용량은 지금의 32비트 PC보다 떨어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프로그램을 직접 짜서 컴퓨터에 입력시켰는데 요즘에는 좋은 소프트웨어들이 많이 나와 참 편해졌어요."
올해 고3이 되는 유일한 아들(경수)에게는 환경과학을 전공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환경과학의 미래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도 장·모부부의 또 하나의 공통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