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상운 유니트 등이 9월 들어 잇따라 1백만원대 486제품을 발표하고 있다. 386 시장이 미처 성숙하기도 전에 PC주력제품 486으로 넘어가는 것인가. 저가 486 PC가 국내 PC시장에 몰고 온 파장을 알아본다.
지난 10월초 어느 중소 컴퓨터회사 회의실. 이 회사의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부서장급 5명이 저녁 늦게까지 구수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된지 5시간이 흘렀는데도 이날 회의의 결론은 나지 않았다. 결국 6시간이 넘어서야 결론이 도출됐다. 결론이란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론은 회의에 들어가기 전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신문이나 잡지광고에 다른 회사들처럼 자사 개인용 컴퓨터(PC)제품도 가격을 표기하느냐의 여부가 이날 회의의 주제였다.
경쟁회사들이 최근 광고에 '1백40만원대' '1백70만원대' 등 파격적 가격을 제시해 새로 형성되는 486 PC시장을 선점하려 드는데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어떤 대책을 수립하자는 것이 이날 회의의 목적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광고에 가격을 표시 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다. 그러나 또 그만큼 절대적인 광고효과를 노릴수 있게 된다. 물론 그것은 소비자들이 '파격적'이라고 느꼈을 때에 해당되는 경우에 한정된다.
당시 특별할인기간이긴 하지만 이 회사는 최근 486 SX급 PC를 1백 49만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386보다 싼 486 제품
확실히 요즘 국내 PC시장은 파격의 연속이다. 286(AT기종)시장이 미처 피어나기도 전에 386바람이 불더니 가을 들어 486의 회오리가 불어 닥치고 있다.
지난 9월 1일 중소 PC업체에 속하는 (주)상운이 소비자가격 1백48만원에 불과한 486 SX급 PC를 발표하고 1주일만에 5백대의 판매실적을 기록했다. 이는 PC내수시장이 최악에 다다른 올해 대기업들도 쉽게 달성할 수 없는 실적에 해당한다.
더욱이 이 가격은 대기업체의 현재 최하위기종인 286의 가격과 비슷하며 386 SX기종은 물론 386 DX 기종보다 월등하게 싸다. 즉 지금까지 원칙처럼 지켜져 오던 기종간 가격서열체계가 일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이때까지 삼성전자 삼보컴퓨터 금성사 대우전자 현대전자 등 5대 메이커의 PC가격은 386 SX급 1백70만원~2백50만원, 386 DX급 2백50만원~3백50만원이었다. 486 SX급은 4백만원대를 호가했고, 이보다 한단계 위인 486 DX급은 6백만원~1천만원을 오르내렸다. 따라서 아무리 중소기업이라 하지만 1백48만원의 486급 PC는 말 그대로 '파격' 이었다. 이 영향은 즉각 국내 전 PC업체에 미쳤다.
보름 뒤인 9월 17일 5대 메이커 가운데 삼성전자가 가장 먼저 맞대응 하고 나섰다. 역시 동급인 486 SX가 그 대상이었고 가격은 1백70만원대였다. 물론 모니터와 부가세는 별도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편법을 사용했지만 고가정책을 고수하던 대기업체에서 1백70만원이란 가격은 확실히 충격이었다. 삼성의 이같은 대응방식은 즉각 PC시장을 들끓게 했다.
대기업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들은 삼성의 대응방식을 두고 일종의 '도박'으로 해석한다. 양자택일 즉 '1백70만원' 제품의 소비자반응을 통해 PC사업을 포기하느냐 혹은 계속하느냐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삼성이 이같은 모험을 할 리가 없다는 분석이다.
개발비나 생산단가 그리고 판촉비용을 포함하면 대기업에서 1백70만원대는 적자를 각오한 '출혈판매'가 불을 보듯 뻔하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에 비해 용산상가 등의 중소 컴퓨터업체들이 싼 가격에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대량 생산된 마더보드 케이스 등을 구입, 단순 조립하는 과정만 거치기 때문이다.
원도우즈가 요구하는 빠른 컴퓨터
그러면 486 PC란 어떤 것인가.
현재 PC 제품은 세계적으로 거의 표준화된 IBM PC의 제품체계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IBM에서 생산되지 않더라도 다른 컴퓨터업체들이 IBM의 컴퓨터 설계방식을 표준으로 자신들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데, 이를 IBM 호환 기종이라 부른다. 물론 매킨토시 아타리 NEC 등 IBM PC와 호환성이 없는 컴퓨터들도 있지만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IBM PC(호환기종까지 포함)는 인텔사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제품을 채택하고 있다.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무엇으로 쓰느냐에 따라 IBM PC의 종류가 나눠진다. 즉 인텔의 80286칩을 마이크로프로세서로 내장하면 286기종, 80386칩을 쓰면 386기종이라 불린다. 486기종은 1989년에 발표된 80486칩을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채택한 것.
80486칩은 그 속에 트랜지스터를 1백만개 집적한 것으로, XT기종(286보다 하위기종)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8088칩이 불과 2만9천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것에 비하면 엄청나다. 80486칩이 80386칩과 크게 다른 점은 CPU(중앙처리장치)인 80386과 코프로세서인 80387 그리고 8KB의 캐시메모리를 하나의 칩속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별도의 코프로세서가 필요없고 캐시메모리가 내장돼 CPU의 성능이 크게 향상된다. 80486칩은 80386칩에 비해 2~4배의 성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PC산업은 지난 90년말부터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 돌입한다. IBM 컴팩 등 세계 굴지의 컴퓨터 회사들이 잇따라 고부가가치 제품의 개발 및 생산으로 돌아서 기존 시장을 지키기 위한 연수를 띄운다.
과거와 같이 동일한 제품을 대량 생산해 동일한 판촉방법으로 소비자들에게 파고드는 전략은 이제 무모한 짓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기존 전략을 구사하기에는 컴퓨터 사용환경과 시장상황이 너무 복잡해졌거나 급박해져 버렸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후발 경쟁회사들이 기술개발을 무기로 이들 선발업체들을 추월해나갔기 때문에 이들이 자극받은 측면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윈도우즈'라는 그래픽환경 시스템 소프트웨어의 출현이 전략변화의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다.
지금까지 컴퓨터기술은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에 맞춰 개발됐다. 하지만 이제 소프트웨어 업체가 요구하는 사양에 맞춰 하드웨어 업체가 제품을 개발하는 역전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추세로 보아 윈도우즈는 세계 PC시장의 표준 시스템 소프트웨어로 자리잡을 것이 확실해지고 있다. 윈도우즈는 속도가 빠르고 용량이 풍부한 컴퓨터 환경을 요구한다. 따라서 사용자들은 윈도우즈를 사용하기 위해 자연히 빠른 속도와 풍부한 기억용량을 갖춘 상위 컴퓨터의 구입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세계적 흐름 무시한 국내 업체들
여기서 먼저 우리나라 PC업체, 특히 대기업들에 내재돼 있는 모순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국내업체들은 이같은 세계적인 흐름을 거의 무시해왔다.
금년초만 해도 국내 PC회사들의 생산과 판매 주력품목은 여전히 286 AT급이었다. 물론 386 SX나 386 DX제품 그리고 극소수이지만 486급을 생산 판매하는 중소기업들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업체들, 특히 5대 메이커의 경우 수출길이 막힌 286 재고를 국내시장에서 모두 팔아치운다는 전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기업의 PC생산 체계는 몇달만에 쉽게 뜯어고치고 새로운 라인을 신설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거나 규모가 작지 않다. 보통 1개 모델의 생산라인은 월 1만대 이상 생산할 수 있는 시설규모를 갖추게 된다.
286 PC에 대한 바람은 91년 하반기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XT급이 막 단종되는 시기였다.
때문에 언제나 채산성을 계산해서 이익을 뽑을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현재의 생산체제를 유지하려 드는 것이 대기업의 생리다. 다시 말하면 투자비용을 회수하기 전까지는 새로운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대기업들이 세계 시장흐름에 뒤지면서도 위기의식을 느끼거나 별로 숨가빠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같은 '느긋함' 때문이다. 아무튼 생산 라인을 한번 설치하면 최소한 본전을 뽑아내기 전까지는 라인변경이 어렵다는 것이 대기업 경영층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같은 현실은 세계시장이 고부가 가치 상위 PC시장 중심으로 바뀌는 시점에 국내 PC시장에서도 대기업들이 중소기업들에 밀리는 주된 이유가 된다.
적시안타냐, 성급한 승부수냐
세계시장의 흐름을 놓고 볼 때 최근 등장한 저가 486 PC의 가격은 결코 싸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이를테면 IBM 컴팩 DEC 등 전통적으로 고가정책을 유지해온 회사들의 486 SX급 PC가격은 대부분 2, 3천달러선이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백50만~2백50만원인 셈이다. 때문에 최근 1백40만~1백70만원대 486 SX의 등장은 비로소 국내 PC가격이 정상화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가격은 앞서 지적했듯이 신제품 개발비를 거의 투자 할 필요가 없는 중소조립업체들이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지, 모든 과정을 자체 해결해야 하는 대기업의 원가계산법과는 거리가 있다.
기존 하위기종들과의 가격체계와 개발비 등을 감한할 때 대기업들이 현재 내놓을 수 있는 486 SX급의 가격은 3백만~3백50만원이 적정선이라는 얘기가 있다.
삼성전자가 이처럼 대기업으로서의 조건을 무시하고 1백70만원대 제품을 발표하자 금성사 삼보컴퓨터 대우전자 등 나머지 대기업들이 계획했던 신제품 발표를 보류해버렸다. 삼성처럼 파격적인 가격을 제시하자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그렇다고 여전히 고가정책을 고수하자니 시장에서 완패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당분간 관망하자는 태도다.
한편 1백70만원대 제품발표 이후 삼성이 당면한 최대의 난제는 대리점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 삼성은 이 제품을 발표하기 전 이보다 더 비싼 가격에 하위 386급 제품을 구매해간 대리점들에 대해 차액보상조치를 해주지 않았다.
금성 등이 삼성과 비슷한 가격대의 486 SX급 PC를 개발해놓고도 발표를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사실상 대리점 보상문제가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성 삼보 등은 이같은 상황을 고려해 아예 3백만원대로 486 제품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486 PC시장은 결국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잇따른 저가 PC의 발표로 소비자들은 더 싸고 좋은 제품이 쏟아질 것이라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다. 한글 윈도우즈의 보급으로 국내에도 고급 PC를 선호하는 사용자들의 수도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한편 PC 주력제품의 빠른 교체로 많은 사용자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아직 대부분의 학교에서 XT기종을 교육용으로 쓰고 있는 것을 비롯, 국내에 보급된 PC의 절반 이상이 이 기종이다. 그런데 PC시장은 286 386을 넘어 486으로 전환되고 있으니 사용자들은 "비싼 돈을 들여 구입한 컴퓨터를 제대로 써 보기도 전에 신제품으로 바꿔야 하는가"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
상운 삼성 등 저가 486제품을 내놓은 일부 업체들의 파격으로 인해 국내 PC시장이 486제품 중심으로 재편해갈지, 아니면 소비자들의 요구에 앞서간 성급한 승부수로 판명 날는지는 더 지켜봐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