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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개발에 공헌하는 '빛 공장'

가속기물리

'가속기' 하면 소립자 연구에만 이용되는 어마어마한 돈덩어리 장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럴까. 국내 유일의 가속기가 있는 포항공대를 찾아가보자

올해 3월말 신약개발 관련 벤처기업인 크리스탈지노믹스사의 황광연 박사 일행은 포항공대에 있는 국내 유일의 가속기센터에 10일간 머물렀다. 왜 이들은 가속기를 찾아갔을까. 황박사에게 그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는 “단백질 구조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단백질 구조 연구와 가속기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가속기는 물리학자만이, 특히 소립자나 입자물리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 혹시 우리가 가속기에 대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래 가속기는 물리학자들이 물질을 이루는 기본입자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개발됐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원자가 상당히 복잡한 구조를 이룬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6개의 쿼크, 6가지의 경입자 등으로 말이다. 이런 원자 내부를 밝혀내기 위해 가속기는 전자나 양성자와 같은 입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켜 원자와 충돌시킨다. 빛의 속도로 가속된 입자가 원자 깊숙한 내부까지 들어가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충돌형 가속기’다.

그러나 모든 가속기가 이 목적을 띠는 것은 아니다. 포항공대 가속기도 그렇다.
 

단백질 구조 연구에 가속기 가 이용되고 있다.가속기 에서 빛의 속도로 가속된 전자 가 휘면서 빛을 방출하는데, 이 빛으로 단백질의 내부를 들 여다본다. 전자석은 전자가 휘도록 힘을 가하는 역할을 한다.


단백질 미세구조 밝힌다

포항공대 가속기는 ‘방사광 가속기’로 분류된다. 충돌형 가속기가 전자나 양성자와 같은 입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킨 후 알아내고자 하는 입자와 충돌시킨다면, 방사광 가속기는 전자를 가속시켜서 빛을 발생시킨다. 다시 말해서 방사광 가속기는 빛을 만드는 장치, 즉 ‘빛 공장’인 셈이다.

방사광 가속기는 X선이라는 빛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병원이나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X선과는 좀 다르다. 방사광 가속기는 기존의 X선 장치와 달리 연속적이고 광범위한 파장의 빛을 발생시킨다. 때문에 사용자가 원하는 파장의 빛을 선택할 수 있어서, 파장을 달리하는 각종 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 이런 이유로 방사광 가속기에는 발생하는 빛 중 특정 부분만을 뽑아내는 장치들(이런 장치를 빔라인이라고 부른다)이 여럿 보인다. 포항공대의 경우 빔라인이 총 21개가 설치돼 있다. 이 중에는 구조생물학연구용 빔라인이 있다.

크리스탈지노믹스사의 황광연 박사가 포항공대 가속기를 찾아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올해 3월말부터 포항공대 가속기센터는 단백질 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빔라인(구조생물학연구용 빔라인)을 공식적으로 가동중이다. 그는 이 빔라인을 사용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며 바로 이 빔라인의 첫 공식적인 사용자였다. 이전까지 황박사는 외국의 방사광 가속기를 찾아다녀야 했다.

그런데 단백질 구조와 가속기의 X선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단백질 구조를 분석하는 방법은 여럿 있다. 그 중 한방법은 단백질을 결정으로 키운 후 이를 X선으로 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다. 바로 방사광 가속기에서 이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물론 기존 실험실에서 만든 X선 장치로도 단백질 구조를 밝혀낼 수는 있다. 그런데 왜 굳이 1천5백억원짜리의 가속기를 이용하는 것일까.

방사광 가속기의 X선은 넓은 대역이라는 점 외에도 밝기가 실험실의 경우보다 무려 1만-1억배 이상이라는 장점을 가진다. 때문에 실험실에서 20-30분 걸리는 시간을 방사광 가속기는 불과 1-2분으로 줄여준다.

또한 단백질 결정 크기가 작아도 실험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실험실에서 단백질 구조를 밝히려면 단백질 결정의 크기가 0.2mm 이상이어야 결과를 얻기 쉽다. 그러나 방사광 가속기로는 단백질 결정 크기가 0.05mm에서도 결과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

황박사는 “단백질 구조 연구에서 방사광 가속기는 시간과 비용상의 이득은 물론 국제적인 경쟁력을 키워준다”며 “단백질 구조의 확보는 곧바로 신약개발과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질병은 단백질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특정 단백질 구조에 이상이 생기면, 암과 같은 질병이 발병한다. 따라서 질병을 일으키는 단백질이 기능하지 않도록, 이 단백질과 결합하는 물질을 만들어내야 한다. 바로 ‘약’을 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 질병 단백질 구조를 안다면, 쉽게 약을 찾을 수 있다.

방사광 가속기를 이용하는 분야는 비단 생명공학뿐만이 아니다. 반도체, 환경공학, 철강, 재료공학, 화학, 표면과학, 기계·전자공학 등 상당수 이공계 분야에서 방사광 가속기가 이용되고 있다. 특히 단백질처럼 미세구조를 규명하고자 하거나 초소형 기계부품을 제작하는데 유용하다.

암치료에도 동원

한편 충돌형 가속기나 방사광 가속기와는 달리 소규모 가속기도 있다. 병원의 암치료용 가속기가 그 예다. 이 가속기는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방사선 치료 역할을 대신한다. 방사선 치료는 암세포가 있는 신체부위에 방사선을 쪼여 암세포를 파괴한다. 이와 함께 주위의 다른 건강한 세포까지도 파괴하는 부작용이 있다. 그러나 암치료용 가속기는 다른 건강한 세포에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암세포를 파괴한다.

이 외에도 환경개선, 고무제품의 성능향상을 위한 산업용으로 가속기가 이용되고 있다. 결국 가속기는 물리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처럼 팔방미인인 가속기는 누가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가속기물리학의 관심사다. 그러나 꼭 물리학자만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가속기는 거대한 장치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는 원형가속기인데 그 둘레만도 27km에 달한다. 웬만한 중소도시 크기인 셈이다. 이 거대장치에는 다양한 종류의 부품과 장비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거대 장치를 건설하는데는 다양한 분야가 투여될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일까.

포항공대 가속기를 예로 들어보자(그림). 여기에는 우선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하는 장비가 필요하다. 전자는 항상 8만V의 전압을 유지하는 전자총에서 발생해 1백50m의 선형가속기를 통과하면서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된다. 선형가속기는 42개의 가속관과 11대의 고주파출력관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서 2GeV(20억 전자볼트)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선형가속기에서 빛의 속도로 가속된 전자는 곧바로 둘레가 2백80m인 원형의 저장링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전자가 원형으로 돌기 위해서는 저장링 곳곳에 전자석이 배치돼야 한다. 전자가 전자석에 의해 힘을 받아 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전자는 빛을 방출한다. 즉 전자가 저장링에서 빛의 속도로 돌면서 빛을 방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는 빛을 내면서 점점 에너지를 잃어 궤도를 벗어나면 곧바로 사라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전자의 소모 에너지를 보충해주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2GeV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처럼 가속기 시스템은 엄청난 전력을 소모한다. 따라서 가속기의 전원장치가 매우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저장링에서 전자가 내는 빛을 뽑아서 실제 실험에 이용하려면 저장링 주위로 빔라인이 배치돼야 한다. 가속기를 이용한 실제적인 실험은 여기에서 행해진다.

하지만 아직 소개되지 않은 중요 장치가 있다. 진공장치다. 빛의 속도로 가속된 전자가 지나가는 곳은 필수적으로 초고진공상태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입자와 충돌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 외에도 전체 가속기 시스템이 제대로 운영되는지를 진단할 수 있는 자동제어 장치가 필요하다.
 

(그림)포항공대 방사광 가속기 건설에 동원된 분야^가속기와 같은 거대 장비를 건설하는데는 대학의 학자뿐 아니라 대기업과 산업현장의 종사자가 참여한다.


국내 최고 용접공의 노고

가속기가 건설, 운영되기까지 포함되는 분야는 다양하다. 전체 가속기 설계는 물리, 고주파 발생장치는 전기전자, 자동제어에는 물리와 전기전자, 전자석 설계는 재료, 진공시스템은 물리, 진공관제작은 기계, 전원장치는 물리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진이 투여됐다.

그러나 가속기 건설에 단지 대학의 학자만이 참여한 것은 아니다. 여러 대기업과 실제 산업현장의 다양한 종사자가 참여하는 대규모 공사다. 예를 들어 진공관에는 우리나라 최고 용접공의 노고가 숨어있다. 가속기 진공관의 재질은 알루미늄인데, 가장 까다로운 용접기술이 요구된다. 총 8백m에 달하는 용접 부위를 1백50℃까지 수십번 반복 가열해야 한다. 그래야 진공관이 새지 않는다.

포항공대 가속기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그들은 저마다 큼직한 얘기보따리를 풀어낸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가속기 개발에 참여했는지를 물어보면 자신의 독특한 이력을 말해준다.

포항공대 물리학과의 고인수 교수는 가속기의 자동제어 장치를 담당했다. 그는 1975년 서울대에서 응용물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1981년에 미국 UCLA로 소립자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갔다. 그런데 1년만에 지도교수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고교수는 고민 끝에 플라스마 물리로 분야를 바꿨다. 여기서 그의 세부 전공분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마침 IBM이 PC를 내놓았을 때다. 이후 1987년에 졸업하고 국내로 들어와 전자통신연구소에서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그에게 다른 새로운 곳에서 달콤한 유혹이 다가왔다. 포항공대에서 가속기를 건설하는데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포항공대가 고교수를 지목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당시 국내에는 가속기물리를 전공한 사람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는 가속기와 관련된 분야인 소립자물리, 플라스마물리, 그리고 컴퓨터시뮬레이션을 공부한 것이다.

가속기건설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무사히 완수한 고교수는 “프로젝트는 사람과 시간이 중요한 변수다. 주어진 시간 안에 일정 인원의 사람을 써서 프로젝트를 완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은 언제든지 배울 수 있지만, 프로젝트는 그렇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에게서 국내 유일의 가속기를 건설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완수했다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핵융합로 개발에 응용

한편 가속기 개발에 참여한 포항공대 물리학과의 조무현 교수도 고인수 교수 못지 않게 독특한 이력을 소유한 이다. 특히 가속기 개발 과정 중 그에게 닥친 시련은 실로 눈물겨웠다. 가속기의 전원장치는 국내 개발이 어렵다고 판단돼, 원래 미국의 모업체로부터 수입해오는 것으로 결정돼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전원장치를 개발해야 했다. 왜일까.

전원장치 개발업체가 부도나버린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일부 돈을 지불한 상태였다. 가속기 건설에 투입된 비용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액수였다. 하는 수 없이 잃어버린 돈을 보상하기 위해 조교수가 직접 개발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깜깜한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2백메가와트의 폭발적인 파워를 내는 전원장비를 국내에서 그 누구도 개발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전자레인지 1십만대를 동시에 켜는 것과 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조교수는 미국 스탠포드대에 이같은 전원장치를 설계, 제작, 운영한 책임자를 만난 이후로 태도가 달라졌다. 스탠포드의 책임자는 “옴의 법칙과 키르히호프 법칙만 알면 해낼 수 있다”고 말해준 것이다. 조교수는 여기서 자신감을 얻고 가속기의 전원장치를 무사히 개발할 수 있었다.

조교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과연 자신이 속해있는 분야의 학도로서 어떤 문제가 관련된 문제인가?” 이는 학문 분야라는 울타리가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조교수는 원자핵공학을 전공했고 플라스마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신은 완전 공학자도 순수 물리학자도 아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가속기개발의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가만히 책상에만 앉아서 자신의 분야라고만 생각하는 연구에 몰두했다면 결코 가속기 건설에서 큰 몫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미다.

요즘 조교수는 우리나라의 핵융합로 KSTAR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가속기 건설자가 핵융합로 건설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가속기와 핵융합로는 여러모로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핵융합로도 가속기처럼 거대 규모다. 핵융합로에도 가속기처럼 고주파, 전자석, 진공장치, 전원장치, 자동제어장치 등 비슷한 장비가 필요하다. 때문에 KSTAR 건설에도 여러 산학연이 참여하고 있다. 조교수는 가속기에서 자신이 직접 개발한 전원장치에 대한 노하우를 핵융합로의 전원장치에 적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포항공대 조무현 교수는 가속기 건설에 녹아있는 전원장치에 대 한 노하우를 핵융합로 KSTAR에 적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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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박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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