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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그래픽의 「마술」

풀어쓰는 컴퓨터 역사 16

'하나의 그림이 백마디 설명보다 가치있다.' 컴퓨터환경이 문자정보에서 점차 그림정보로 옮겨감에 따라 그래픽이 핵심기술로 떠오르고 있다. 영화 광고 애니메이션 기초과학 의학 등에 널리 쓰이는 컴퓨터그래픽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글자가 없는 시대에도 그림은 있었다. 그림은 최초의 만국 공용어다.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그리고 서양속담에는 하나의 그림이 백마디의 설명보다 가치있다는 말이 있다. 서양사람에게 우리나라 전래의 지게 모습과 사용법을 말로서 설명한다면 큰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컴퓨터는 그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방향으로 진보되어 왔다. 슈퍼컴퓨터와 병렬처리기의 발달과 같이 속도면에서 진전이 있었다. 그리고 인공지능 신경망 등과 같이 문제의 새로운 접근이나, 해결해야할 문제 범위의 확대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 왔다. 그러나 일반 사용자에게 이러한 기술은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슈퍼컴퓨터의 속도감을 보통의 PC사용자가 느껴보기는 쉽지 않다. 단지 슈퍼컴퓨터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부산물(가령 컴퓨터를 응용한 새로운 첨단 의료기구나 공산품 의약품)을 보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렇게 일반 사용자가 쉽게 컴퓨터에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운용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전문적이라는 데 기인한다. 컴퓨터 모니터 위를 쏜살같이 지나가는 글자들의 질주는 우리와 컴퓨터 사이를 서먹서먹하게 한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 기술의 등장으로 이러한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컴퓨터는 일반사용자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의 마술
 

방공망에 첫 활용

요즘은 그래픽 기술과 접목되지 않은 컴퓨터는 사라질 정도로 컴퓨터그래픽은 그 영역을 활발히 넓혀가고 있다. 이전에는 값비쌌던 윈도우 제어용 그래픽 프로그램들이 이제는 시스템 소프트웨어에 표준으로 장착되어 나온다.

예를 들어 중형 이상의 시스템을 구입할 때 X윈도우 시스템이 쓸만한 속도로 동작되는지는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컴퓨터 개발의 목표는 사용자와 보다 친밀한 시스템의 개발에 초점이 맞춰지게 됐다.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해답은 바로 백마디의 설명보다는 한 가지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윈도우 시스템의 고안자인 알랜 케이의 지론은 이런 것이다. "설명서가 필요한 컴퓨터 시스템은 일단 실패한 시스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류가방 크기의 컴퓨터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사용자 입문서와 시스템 매뉴얼이 사과상자 두어개 분량임을 생각하면 우리는 난감해진다. 그래픽의 시대가 개막됨으로써 모든 정보기기는 마치 우리가 수백년간 사용해 오면서 익숙해진 연필과 종이 정도로 편해질 것이다.

위대한 발명이나 원리도 그 시초는 아주 사소한 데서 시작되었듯이 그래픽도 실상은 심심풀이 장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최초의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래머는 오실로스코프로 컴퓨터를 진단하는 기사였다. 컴퓨터의 입출력이 모두 천공카드나 종이테이프로 이뤄지던, 1950년경 영국에서 에드삭(EDSAC)이란 컴퓨터를 다루던 한 기사는 춤추는 댄서의 영상을 오실로스코프에 옮겨 보았다. 물론 앙상한 뼈로만 구성된 해골의 댄서였지만 그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최초의 영상이었다.

그래픽이 대중에게 최초로 소개된 것은 MIT의 포리스트가 만든 휘르윈드(Whirwind)라는 작품에서 시작된다. 휘르윈드는 바이킹로켓이 비행하는 동안 연료와 비행속도를 수치가 아닌 움직이는 그래프로서 보여주었다. 비록 조잡한 화면이었지만 시범을 지켜본 해군의 고위간부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또한 그 시범은 2차대전동안 방공망의 개선에 골몰했던 군관계자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세계대전의 결과 이전보다 엄청나게 빨라진 미사일과 제트전투기가 등장했지만 아직 그것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법은 원시시대를 면치못하고 있었다.

레이더에 잡힌 적기의 위치좌표를 한 병사가 부르면 그 소리는 다시 전화선을 타고 대공포 진지의 고사포병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유능한 레이더병의 존재는 전체 전투의 향방을 가름할 정도로 중요했다. 방공망 통제센터는 항상 시끌벅적했다. 특히 소련에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더불어 미국내 어떤 지역도 폭격이 가능할 정도로 운항거리가 긴 장거리 폭격기가 개발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의 방공체계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휘르윈드 컴퓨터가 여기에 뛰어들었다. 휘르윈드는 레이더에 잡힌 각 물체를 단순한 점이 아닌 약정된 도형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오퍼레이터가 그것에 관한 정보를 알고 싶으면 광선총을 컴퓨터 스크린에 갖다대기만 하면 되었다. 특정한 비행기를 추적할 수 있었으며 특정한 표적의 위치를 고사포 진지로 바로 보낼 수도 있다. 휘르윈드의 1951년 시범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이를 기초로 미전역의 22개 지역과 캐나다까지 통합된 세이지(SAGE, Semi Automatic Ground Environment) 방공망이 완성되어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그리고 그것은 1983년까지 별 무리없이 사용된다. 휘르윈드가 이룩한 그래픽 기술은 인간과 컴퓨터간의 대화를 가능케 한 최초의 것으로 기록됐다.

스케치패드에서 매킨토시까지

세이지가 성공함에 따라 MIT는 그래픽 기술의 중심으로 변모한다. 국방에 사용된 그래픽은 이반 서덜랜드라는 젊은 공학자의 노력으로 급진전된다. 그는 완성될 프로그램의 이름을 스케치 패드(Sketch pad )라고 명명하였다. 즉 컴퓨터위에서 보통의 스케치작업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휘르윈드 방식인 광선총을 입력장치로 이용하여 조그마한 선을 긋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간단한 직선을 그리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보다 복잡한 원이나 제도에 쓸만한 도형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이후 그는 원 뿐만 아니라, 사각형 마름모꼴 등 여러 도형의 기본요소를 첨가하여 스케치패드를 완성하였다. 스케치패드는 인간이 하기에는 지루한 반복작업에 특히 강했다. 예를 들어 같은 무늬로 구성된 6백여개의 육각형 무늬는 일류 제도사가 그린다 해도 사나흘이 소요되는데 스케치패드는 이를 몇십분만에 완성했다. 잉크자국 하나없이. 스케치패드는 MIT의 자랑거리가 되어 선전용필름에 담겨 이웃 대학에 소개되었다. 그것을 지켜본 학자들의 충격은 대단했지만, 정작 직접 응용해야할 기업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에디슨의 전화가 초기에 그러했듯이, 기업가들의 눈에는 마치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으로만 인식된 것이다. 그들은 재미있는 마술쇼 정도로만 생각했다.

선견지명을 가진 기업가도 있었다. 사실 제너럴모터스(GM)사는 서덜랜드보다 2년 앞서 자동차 설계에 컴퓨터를 도입하려 했다. GM이 만든 DAC-1 시스템은 스케치패드와 같이 소개되었다. GM의 그래픽에 대한 관심과 독자적인 투자는 기업들에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윽고 록히드사도 비행기 설계에 그래픽을 도입했다.

특히 IBM이 IBM 2250에서 DAC-1을 지원해주는 그래픽전용 단말기를 부착해줌으로써 그래픽 전문회사가 속속 설립된다. 선두주자는 스케치패드의 완성자 서덜랜드와 UCLA교수인 데이비드 에반스가 공동으로 설립한 에반스서덜랜드사다. 그들은 텍트로닉스(Textronix)사에 서 개발한 DVST(Direct View Storage Tube) 기술을 도입, IBM 2250의 그래픽 단말기의 20분의 1 가격도 안되는 4천달러짜리 단말기를 선보여 시장을 석권했다.

1960년대 기억장치가 자기코어로 되어있을 때는 가격이 워낙 비싸 그래픽 처리를 위한 별도의 기억장치를 엄두도 못내었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주로 텔레비전의 원리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후 전자공학의 발달로 기억장치의 값이 싸짐에 따라 그래픽 부분만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프레임버퍼(frame buffer)가 생겨났다.

이 방식을 보통 래스터 스캔(raster scan)방식으로 부르며 현재 그래픽 시스템에서는 대부분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 방식에서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는 계속해서 프레임버퍼만을 검사하면서, 버퍼내의 각 위치와 대응된 화면의 한 점(Pixel, Picture Element)에 해당되는 색과 그 밝기의 정도로 주사한다. 따라서 프로그래머는 프레임 버퍼의 내용을 바꾸는 일만 담당하면 된다. 이 방식을 최초로 사용한 곳은 미항공우주국(NASA)이다. 1969년 NASA에서는 래스터스캔장치로 연결된 최초의 우주선 매리너 6호를 쏘아올렸다. NASA에서는 우주비행사를 훈련시키는 데도 래스터스캔 기술을 사용하였다. 물론 NASA에서 처음 그 기술을 사용한 것은 비용을 감당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용자에게 그래픽 기술이 확대된 것은 1970년대초에 개발된 값싸고 빠른 RAM(Random Access Memory)칩이 개발되면서 부터다.

휘트니부자와 컴퓨터 영화

그래픽은 초기의 2차원 영상을 다루는 단계를 지나 보다 사실적인 3차원 물체까지 다룰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광추적 기법이 소개되고, 그것이 텔레비전 프로에 이용됨에 따라 급속히 사업화된다. 특히 게임프로그램과 같은 오락과 연관된 기술은 단시일내에 널리 퍼졌다. 기계식 게임기와 달리 부품의 마모나 고장이 거의 없는 전자게임은 모든 사업가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마이크로 컴퓨터(PC)로 말미암아 일반 사용자들 수준에서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면 제록스사의 팔로알토 연구소에서 개발한 앨토컴퓨터는 모든 대화를 마우스가 지원되는 그래픽 모드에서 가능하도록 했다. 이러한 앨토의 개념을 근간으로 애플사는 1980년대 중반에 리자(Lisa)와 매킨토시를 잇따라 개발하게 된다.

그래픽 기술과 영화산업의 연합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컴퓨터를 영화에 사용하려고 애쓴 최초의 사람은 존 휘트니 1세라는 발명가다. 그는 1970년대에 로봇을 소재로 한 몇몇 영화에 컴퓨터를 등장시켜 카메라를 제어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범적인 시도에 불과하였다. 진전된 시도는 1977년에 발표된 루카스 필름의 '별들의 전쟁'(Star Wars)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전체 3시간 영상중 컴퓨터가 그려낸 영상은 90초에 불과하였다. 더군다나 내부 그림은 사실 컴퓨터가 그린뒤 나중에 필름에 덧칠한 것이었다. 관객들은 대부분 이것을 구별하지 못한채 영화를 관람했다. 이 부분적인 눈속임의 성공(?)에 고무된 디즈니 스튜디오 영화팀은 '블랙홀'이라는 공상과학영화에서 본격적인 그래픽 기술을 선보인다.

젊은 애니메이터인 리스버거와 전직 변호사인 쿠슈너는 모스크바 올림픽용 만화영화인 '애니멀림픽'을 완성하기 위하여 손을 잡았다. 그러나 미국의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으로 NBC와의 모든 계약이 취소됐다. 낙심한 그들은 비디오 게임에서 힌트를 얻어 한 시나리오를 꾸몄다. 그 내용은 한 프로그래머가 비디오 게임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 세계로 빠져들어가 게임 프로그램속의 악당들과 싸운다는 다소 엉뚱한 것이었다. 이 내용을 들은 디즈니의 책임자는 매우 흥미있어 했다. 디즈니사의 후원아래 매기사와 스리아이(III, Information International Inc.)사가 실무를 담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려운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모든 자연적인 물체를 수식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화면에 표시하기 위해 기본적인 도형(직사각형, 원뿔 등)으로 재조합하는 일은 아주 방대하였다. 예를 들면 한 배경이 포함된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 무려 1만5천개의 다각형조각이 필요했다. 그리고 사실감을 더하기 위한 그림자처리는 엄청난 계산을 요구했다.

1982년 그 영화는 '트론'(Tron)이란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1백5분의 영상시간 중 15분이 컴퓨터로 처리되었으며, 촬영시에 배우는 무용수 타이즈차림의 흑백의상만 입었다. 인건비가 싼 대만에서 잔처리작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이 투입되었다. 말많은 잔치 먹을게 없다고 했던가. 트론은 흥행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헐리우드에서 컴퓨터 기술을 도입하려고 관망하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서버렸다.

실패의 원인은 영화 자체가 화려하긴 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트론의 시나리오가 변변치 못했던 것이다. 영화의 제작이 상업적인 성공을 목표로 하는 이상 트론은 본전도 못 건진 야심작 수준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컴퓨터의 위력은 오렛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휘트니의 아들 존 휘트니 2세는 아버지의 실패에 설욕이라도 하겠다는듯이 다시 컴퓨터 영화업에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좀더 첨단무기인 슈퍼컴퓨터 크레이 X-MP를 이용해서 트론보다 무려 7백배나 빠르고 정교한 영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마지막 우주전사'(Last Starfighter)를 만들었다. 그는 강력한 슈퍼컴퓨터를 이용하여 7백억가지의 색을 절묘히 배합, 기존 애니메이터로는 불가능한 섬세한 영상을 창조하였다. 드디어 개봉을 하였다.

이번에는 본전을 건지고 약간의 수입도 올렸다. 이를 계기로 영화제작자들은 다시금 그래픽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래픽은 모든 분야에서 응용되지만 현재 가장 주목받는 기술은 의학분야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다리뼈를 수술하는 정형외과수술을 행한다고 하자. 이때 의사는 어느 정도로 뼈를 잘라내고, 새로운 보조재를 넣어야 될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픽으로 모의수술한다

현재 수준은 컴퓨터상에서 가상으로 수술을 수행한 후, 여러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서 걸음걸이를 시켜볼 수 있는 정도다. 그리고 그 걸음걸이 모습을 관찰한 뒤 이상한 점이 있으면 다시 한번 수술과정을 조정하고, 이 과정을 걸음걸이 모습이 완전해질 때까지 반복 수행한다. 이런 과정이 환자를 상대로 직접 행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픽 기술은 수술에서 시행착오를 최대한으로 줄이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 방법의 최초 고안자는 방사선 학자인 마이클 배니어다. 그리고 제프리 마시의 도움으로 뼈에 근육과 피부를 입히는 소프트웨어가 개 발되었다.

CAD/CAM(컴퓨터 이용 설계 및 생산) 기술이 인간의 신체에도 적용된 것이다. 실제 미국의 특수외과에서는 CAD/CAM를 이용하여 주문받은 부품을 설계해서 그 모형을 보내주고 있다. 의사는 환자의 몸을 단층촬영기를 이용하여 입체적으로 입력한다. 5백여개의 다양한 뼈부품 중에서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고른다. 컴퓨터 모의 수술의 권위자인 위스콘신대학의 세그레이 박사팀은 인간의 운동모형에 관한 소프트웨어를 10여년간 만들었다. 점프동작에서부터 껌씹는 동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1천2백여개의 동작방정식이 완성되어 항상 모의실험이 가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래픽은 실험수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로 우리를 인도한다. 생물학자나 화학자가 그래픽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분자모형의 형성이나 유전자의 배열모형을 그려주는 것은 이제 필수적인 연구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수학에서도 4차원 물체의 3차원 투시도를 나타내기 위해 그래픽 기술이 쓰인다. 복잡한 수식으로 얽혀진 공간의 모형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혹자는 수학에서 컴퓨터의 사용이 인간의 창조력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지지만 실은 그와 반대로 인간의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매스매틱스'라는 수학용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수식으로 표현되는 거의 모든 모형을 재현해 준다. 이 도구를 이용한 새로운 발견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스는 과학과 기술과 자본이 가장 유기적으로 결합한 산물이다. 인간에게 눈이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쓰이는 한 그래픽 기술은 끊임없이 진보할 것이며 향후 20년간은 컴퓨터 그래픽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래픽의 사용과 더불어 미국에서 문맹이 증가한다는 현상은 인간사회의 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해 만든 생동감있는 그림

 

1992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조환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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