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물리학상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의학·생리학상은 왕립카롤린스카의학연구소의 전문스태프진에 의해서 수상자가 최종결정된다.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 발명으로 거부가 된 알프레드 노벨이 5백만달러의 유산과 함께 유언을 남김으로써 비롯했다.
유언의 내용은 인류의 복리증진과 과학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노벨상과 상금을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수상분야는 물리학 화학 의학 생리학 문학 평화상 등 5개 분야이며 그중 과학분야인 물리학 화학은 스웨덴 왕립 과학아카데미에, 의학 생리학은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의학연구소에 수상자의 선정을 위임했다. 수상자는 국적을 가리지 않으며 업적은 최근의 발명 발견 개선에 한한다고 노벨은 규정했다.
노벨의 유언에 따라 스웨덴정부는 노벨재단을 설립했고 노벨이 죽은지 5년 뒤인 1901년부터 매년 10월 수상자들을 발표하고 있다.
노벨은 장래가 촉망되는 과학자가 노벨상 수상으로 인해 명예를 얻을 뿐 아니라 실제 그가 경제적 부담을 느끼지않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한다. 이는 발명자에게는 엄청난 연구비가 필요하다는 노벨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노벨상은 △이전의 연구가 아닌 최근의 연구에 △응용연구가 아닌 기초연구에 △이미 사망한 사람이 아닌 생존해 있는 사람에게 △단체가 아닌 개인에게 수여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 원칙은 거의 예외없이 지켜지고 있다.
초창기의 노벨상 상금은 노벨의 이러한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했다. 처음으로 수상자가 선정된 1901년 각 상에는 4만2천달러의 상금이 수여됐다. 1920년 당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카벤디시연구소의 1년 예산이 1만달러에 불과했던 점과 비교하면 초창기의 노벨상 상금은 과학자가 능히 경제적 독립을 이룰만한 금액이었다.
노벨상에 수학이 빠진 이유에 대해 수학자들은 노벨이 어떤 귀부인을 놓고 수학자 레플러 (G.M. Leffler)와의 구애경쟁에서 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노벨은 레플러가 자기가 제정한 상을 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수학을 제외시켰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진실성은 희박하다. 수학사의 어느 구석에도 이런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벨은 추상적인 방식이 아닌 구체적인 방법으로 인류의 복지증진에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에 수학을 제외시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선정과정은 비밀로
노벨상의 수상자가 결정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는 매년 5명씩으로 구성된 노벨물리학상위원회와 노벨화학상위원회를 구성한다. 카롤린스카의학연구소도 마찬가지로 노벨의학·생리학상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위원회들의 당연직 위원으로는 노벨연구소의 물리 화학부문 대표자와 카롤린스카연구소의 소장이 포함된다. 노벨상위원회의 영향력은 노벨상에 있어서 거의 결정적이다. 위원들은 노벨상 후보 추천위원들을 선택할 수 있고, 노벨상 후보에 오른 사람들의 업적을 평가한다. 각 위원회의 위원들은 3~5년마다 갱신된다.
노벨상 후보 추천위원들은 영구지명권자와 해마다 바뀌는 추천위원 등 두 부류로 나눠진다. 영구지명권자는 과학아카데미회원, 카롤린스카연구소연구원, 스칸디나비아 8개 대학 해당분야 교수, 역대 노벨상수상자 등으로 이뤄진다. 해마다 바뀌는 추천위원들은 노벨상 위원회에서 매년 추천을 의뢰한다. 1900년 당시 추천 위원의 수는 3백명 정도였고 현재는 1천명을 넘고 있다.
노벨상후보에 대한 추천은 매년 2월 1일까지 스톡홀름에 도착해야 한다. 노벨상위원들은 추천된 후보들을 모아 그들의 업적을 평가하고 보충자료들을 모은 다음, 노벨상 후보자들에 대한 추천장과 그해의 전체 추천자들을 언급하는 '일반보고서' 및 탈락된 주요 경쟁자들에 대한 의견이 포함돼 있는 '특별보고서'를 왕립과학아카데미와 카롤린스카의학연구소에 제출한다. 이 자료들을 놓고 매년 10월초나 중순경 왕립아카데미 총회와 카롤린스카의학연구소의 전문스태프진들은 그해의 수상자를 최종 결정한다.
이때 재미있는 사실은 명문화된 규정에 따라 최종수상자의 선정과정에 제시된 어떤 의견이나 투표결과도 문서로 남길 수 없다는 점이다.
수상식은 12월 10일
노벨상의 각 부문은 매년 3인 이내로 한정된다. 이는 노벨이 의도했던 만큼의 명예와 상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또 노벨상은 추천됐을 때와 최종 수상이 결정됐을 시점에 수상자가 생존해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아직까지 죽은 후에 노벨상의 영예를 차지한 사람은 없다.
노벨이 남긴 유산을 관리하는 노벨재단은 수상자의 선정에 아무런 권한이 없고 단지 매년 상금의 액수를 결정할 뿐이다.
노벨상은 매년 10월에 발표되고 수상자들은 한달 이상 매스컴의 표적이 돼 부산하게 보내다가 12월 10일에 있을 수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간다. 수상식이 거행되는 12월 10일은 노벨의 기일(忌日).
수상식장은 스톡홀름시의 중심부에 있는 콘서트홀로, 식장 오른편에는 스웨덴국왕을 비롯한 왕실 귀족들이 자리하고 왼편에는 정장을 한수상자들이 일렬로 늘어선다.
상이 수상되기 직전 노벨재단은 각 수상자의 업적을 스웨덴말로 간단히 소개한다. 그후 수상자가 한사람씩 단상에 불려나가 스웨덴국왕으로부터 상장과 메달을 수여받는다. 메달 앞면에는 노벨의 옆얼굴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과학의 여신이 자연의 여신이 쓰고 있는 베일을 벗기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기예 (技藝)의 발견에 의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은 유익한 일이다'라는 라틴어와 함께.
수상식이 끝나면 각 수상자가 자신의 연구내용과 과정을 설명하는 수상강연이 있고 수상자들의 영광을 축하하기 위한 화려한 만찬이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한다.
아깝게 노벨상을 놓친 사람들
노벨상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 된 것은 수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이 가장 공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벨상을 탈만한 충분한 과학적 업적을 남기고도 '상복'이 없거나 또는 그외 업적이 미처 인정을 받기도 전에 세상을 하직한 불운한 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과학계에서는 흔히 이들을 빗대어 '41번째 의자를 차지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프랑스학사원에는 40개의 의자 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 과학자들을 이렇게 비유하는 것이다. 노벨상이 물리학 화학 생리학·의학 분야에만 한정돼 있기 때문에 수학 천문학 지질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고도 수상 대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프(1834~1907)는 오늘날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진 주기율(週期律)과 원소표를 발견하고도 노벨상의 영예를 얻지 못했다. 그의 업적은 노벨상을 타고도 남음이 있지만, 수상이 거론됐을 당시(1905, 1906년)에는 이미 모든 교과서속에 확고한 진리로 자리잡아 버렸기 때문에 신선감이 떨어진다는 것이 탈락이유였다.
생화학자 애버리(1877~1955)는 1944년 폐렴구균의 형질전환 연구를 통해서 유전자의 본체가 DNA인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당시 노벨상위원회는 이에대해 더 많은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10년이 지난후 그외 이론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로 판명됐지만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죽음의 신이 노벨상의 행운을 앗아가기는 영국 물리학자 모즐리(1888~1915)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러더퍼드의 지도아래 방사능에 관한 연구를 하던 모즐리는 그의 연구테마를 X선으로 전환, 멘델레프가 풀지못한 주기율표의 수수께끼를 추적하게 된다. 그는 특성 X선의 스펙트럼을 추정해 원소번호 N을 발견했으며, 이것이야 말로 원자가 갖는 양전자의 크기라고 정확하게 이해했다.
모즐리의 불행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시작됐다.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원 입대한 모즐리는 1915년 연합군의 갈리폴리 침공작전시 전사했다. 모즐리의 연구를 이어받은 바클라와 시그반은 각각 1917년과 1924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미국의 해부학자이며 발생학자인 이반즈(1882~1974)가 노벨상에서 제외된 것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남아있다. 그는 내분비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착시켰으며 불임방지효과가 있는 비타민E를 발견한 공적이 있다. 이반즈의 업적은 높은 평가를 받아 33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과학아카데미회원으로 선출됐고 줄잡아 10개 이상의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노벨상과 인연이 없었다.
1962년 왓슨과 크릭 그리고 윌킨스는 DNA의 결정구조를 해석한 공로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출신 생화학자 샤가프(1905~ )가 빠진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샤가프는 1940년대 후반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DNA의 염기조성에 놀라운 규칙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샤가프의 법칙'으로 알려진 이 분석결과를 토대로 왓슨과 크릭이 DNA 모형을 조립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샤가프가 당시 핵산연구의 권위자였던데 비해 왓슨 등은 이 분야의 풋내기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영국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자주 교류했지만 샤가프는 미국에 있어서 그들의 연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샤가프가 발견한 DNA의 화학적 특성을 왓슨과 크릭은 생물학적으로 재해석해 노벨상의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샤가프는 비록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후 유전자조작이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을 지적해 과학자로서 사명을 다하려고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