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S가 바이오와 만났다. 소량의 시료만으로도 빠른 시간 안에 자동으로 실험해주는 초소형칩, 인체 내에 삽입돼 수술하지 않고도 진단·치료하는 캡슐형 내시경을 개발중이다.
언제인가부터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소니의 워크맨이 점점 작아져서 카세트 테이프 하나가 들어가는 크기로 줄어들더니 이제는 MP3라는 새로운 형식의 뮤직 플레이어가 등장해 고음질의 디지털 음악을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시스템으로 즐기는 시대다. 이는 디지털 음악을 담는 저장장치의 소형화 덕분인데, 소형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는 반도체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형화는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적은 소비전력으로 빠른 속도의 정보를 제공하고, 휴대하기 간편하며, 개개 인간의 개성과 편의성을 부여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소형화 기술의 최첨단을 달리는 MEMS 기술은 반도체 기술의 전기적 시스템 소형화에 기계적인 구조물의 소형화를 부가해 실질적인 초소형 시스템을 실현시키고 있다.
초소형 제조법인 MEMS가 인간의 생명현상이나 동·식물, 식품, 의약 등 생명과 의학 분야에 접목돼 BioMEMS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발전하고 있다. BioMEMS는 바이오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는 미세 시스템을 개발하는 분야다. 예를 들어 소량의 샘플로도 적은 에너지를 들여 빠른 시간에 처리 가능한 기기, 인체 내에 삽입돼 수술을 하지 않고도 진단하거나 치료하는 기기를 개발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BioMEMS의 응용 예를 통해 이 점을 확인해보자.
동전 크기의 실험 공간
MEMS 기술이 바이오 분야로 응용된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이오칩이다. 과학자들은 생명현상의 신비를 풀기 위한 1단계로 30억쌍의 DNA 염기서열을 해독해내는 인간게놈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제는 30억쌍의 DNA 염기서열을 통해 수만개 유전자와 수백만개 단백질의 기능을 밝히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유전자와 단백질을 규명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바이오칩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바이오칩은 각종 생물학적 시료를 동전만한 공간에 넣고 분석할 수 있어서 적은 양의 시료로도 충분히 실험을 끝낼 수 있다. 반도체칩의 혁명을 통해 컴퓨터의 속도가 눈부시게 빨라진 것처럼, 이제는 이같은 혁명이 생명과학계에서 이뤄질 것이다.
그렇다면 MEMS 기술이 바이오칩에 어떻게 적용된 것일까. 바이오칩의 일종으로 현재 가장 각광받고 있는 랩온어칩(Lab-on-a-chip, 이하 LOC)을 통해 이를 알아보자.
LOC는 말 그대로 생물학 실험실에서 수행하는 모든 과정을 동전만한 크기인 하나의 칩 위에서 구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시료를 채취하고, 이를 반응시키기 전의 전처리 과정을 거쳐, 실제로 반응시키고, 분리·분석해서 마지막으로 데이터를 얻는 과정을 모두 하나의 칩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생각인가. 언제든지 갖고 다니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 누구나 한번쯤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특수장치로 이 물건을 아주 작게 만든 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LOC는 생명과학자에게 이런 상상이 실현되도록 해준다. 연구자들이 부족한 실험공간으로 애먹지 않고 자신의 실험실을 휴대하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에서든지 연구를 수행할 날이 오는 것이다.
이처럼 놀라운 LOC가 가능할 수 있는데는 MEMS 기술 덕분이다. 손가락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수${cm}^{2}$크기인 칩에 분석에 필요한 각종 장치들을 집적화시키기 위해 MEMS 기술이 필수적이다. 우선 아주 작은 양의 시료가 지나갈 수 있도록 수㎛(${10}^{-6}$m) 폭의 관(채널)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LOC를 제작하는 방법은 전적으로 반도체 공정과정에 따른다. 우선 건축에서 쓰이는 CAD 시스템으로 칩을 디자인하고, 이 디자인을 바탕으로 필름역할을 하는 마스크를 제작한다. 그리고 반도체 표면을 감광재료로 덮은 후 마스크를 통해 특정 부분에만 빛을 쏘인 후 현상용액으로 녹여 반도체 표면에 회로를 만든다.
이 반도체 표면은 일종의 원판 역할을 담당한다. 실제로 LOC는 유리, 플라스틱과 같은 물질로 돼 있는데, 실험과정의 디자인이 새겨진 반도체 표면 위에 유리나 플라스틱을 붙여 주조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1초에 고작 수nL(나노리터=${10}^{-9}$L)의 시료가 지나갈 수 있는 관이 제작되는 것이다.
미시세계에서 강력한 젤리로 변하는 유체
그러나 LOC를 제작할 때 주된 문제는 소형화가 아니다. 분석대상이 유체이기 때문에 MEMS의 여타 응용분야와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LOC에서 시료가 분석되기 위해 연구자가 하는 일은 시료를 LOC에 주입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LOC 안에서 시료는 각 과정을 거쳐 시료의 분리나 검출이 한번에 자동으로 처리된다. 따라서 LOC의 핵심은 시료를 칩에 새겨진 각 과정을 거쳐 마지막까지 제대로 흘러가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BioMEMS의 핵심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개미’를 떠올려보자. 남자 주인공 개미가 물방울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여자 개미가 남자 개미를 구하기 위해 막대로 두들기고, 온몸으로 부딪쳐 물방울을 터뜨리려고 하지만 물방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왜 이토록 물방울은 개미에게 강력한 젤리와도 같을까. 이것이 바로 미시세계에서 유체가 갖는 특성을 보여주는 예다.
미시세계에서 유체는 우리가 알고 있던 거시세계와는 다른 현상을 보여준다. 우선 물방울 속에 갇힌 개미에게 물은 매우 끈적끈적한 늪처럼 느껴진다. 이는 물체가 작아질수록 부피에 비해 표면적이 넓어져 물의 점성에 의한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또한 표면장력의 영향도 커져 물방울의 표면을 도저히 찢고 나올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미세한 기계가 물 속에서 움직일 때는 물방울 속에 갇힌 개미와 같은 상황이 된다. 이처럼 유체를 미세 단위에서 다룰 때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가 ‘미세 유체 역학’이다. 화학이나 생물학, 의학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유체 시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BioMEMS에서는 미세 유체 역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최근에 개발된 LOC의 경우 수nL의 샘플을 LOC 내로 빨아들인 뒤 목표물질인 생물 분자들(효소, 항원 또는 기타 단백질)과 시약을 같은 양 만큼 섞어 반응을 시키고 분리가 일어나게 한다. 이를 형광이나 광학적인 방법에 의해 감지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 모든 과정에는 고작 4개의 채널이 이용될 뿐이다. 그리고 동시에 분석을 수행할 수 있어 하루에 수만번의 실험이 가능하다. 그러면서도 고작 작은 주사기 안에 들어가는 시약만을 사용할 뿐이다. 이같은 LOC는 단백질과 유전자의 비밀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방법을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MEMS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미소채널 등 마이크로 가공 기술과 바이오 기술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다.
LOC는 1979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당시 미국 스탠포드대의 연구자들은 하나의 칩 위에 형성된 생물학 분석 디바이스를 발표했다. 그리고 1981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미세 채널에 의해 물질을 분석해내는 캐필러리 전기영동(CE) 칩을 발표하지만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이후 1994년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마이클 램지 연구팀이 미량의 샘플을 분리해내는 마이크로 채널 칩을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이 기술이 1999년 칼리퍼 테크놀러지사에 라이센스돼 신약 개발과 생물학 연구에 목적을 둔 LOC의 개발로 이어졌다. 많은 연구자들은 LOC가 생명현상을 규명하려는 포스트게놈 연구를 수행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포스트게놈 연구의 핵심 키워드는 전체 단백질을 연구하는 단백질체학이다. 현재 이 분야와 관련돼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만들어내는 단백질을 감지하는 단백질칩이 연구되고 있다. 만약 단백질체학의 성과로 단백질이 규명되면 궁극적으로 암과 같은 질병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차단하는 약물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바드대와 코넬대 등과 함께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는 LOC의 채널 크기를 마이크로에서 나노 사이즈로 줄이는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마이크로 단위에서 나노 단위로 기술이 발전함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단분자 조작과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단일나선의 DNA 분자 구조를 빠른 시간 안에 알아낼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미소 채널을 이용한 분석 시스템의 연구와 더불어 초정밀 유체의 조절을 위한 마이크로 밸브, 마이크로 펌프 등 마이크로 유체 부품들이 연구되고 있다.
두려움과 아픔 없는 주사기 등장
이들 마이크로 제조공정은 LOC뿐 아니라 약물전달시스템에도 응용되고 있다. 실제로 최근에 새로운 약물전달시스템으로 바늘없는 주사기가 등장했다. 주사맞는 두려움과 고통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늘없는 주사기는 엄밀하게 바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눈에 보이는 바늘이 마이크로 단위로 작아져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인체 표피를 통한 약물전달은 표피 아래의 피하지방층에 의해 가로막힌다. 따라서 이 층을 뚫고 약물이 체내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위협적인 주사 바늘이 사용돼야 한다. 그런데 때때로 이 주사 바늘을 통해 다른 질병이 감염되기도 한다. 또한 주사 바늘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깊이가 주사를 놓는 사람에 따라 다른데, 만약 주사가 피하지방층 아래에 있는 통증신경을 건드리면 아픔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마이크로 주사는 바늘두께를 수μm로 가늘게 하면서, 주사를 맞은 후 생기는 상처의 크기를 줄여 감염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주사 바늘 길이를 통증신경이 없는 위치까지만 들어가도록 조절해놓음으로써 고통을 느끼지 않고도 약물을 체내에 전달할 수 있다.
초소형 바늘을 통한 약물전달은 향후 LOC와 일체화될 전망이다. 그러면 당뇨병 환자처럼 정기적인 검사와 투약이 필요한 경우 수시로 혈액을 채취하고 이를통한 진단과 혈당을 조절하기 위한 약물투여가 즉각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이제는 병원에 가서 혈액을 채취한 후 그 결과를 보기 위해 며칠을 기다렸다가 다시 병원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더 나아가 소형화기술은 인체 내에 삽입돼 질병의 조절과 치료에 응용되고 있다. 현재 가장 성공적인 예는 심장속도 조절기다. 미국의 부통령 딕 체니는 MEMS를 기반으로 개발된 심장보조장치를 체내에 삽입하고 있다. 이 장치는 부통령의 심장활동을 지속적으로 체크하기 위한 마이크로 가속도 센서로 이뤄져 있다. 만약 심장이 부정기적인 리듬이 발생할 경우 심장보조장치는 심장의 활동을 가속시키기거나 약화시켜 정상적인 활동에 도움을 준다. 이것 역시 초소형 가공기술을 이용한 마이크로 센서 덕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체 내 장기에 투입돼 직접 질병을 진단할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캡슐형 내시경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캡슐형 내시경은 마치 약을 먹는 것처럼 입으로 삼키면 인체 내부로 들어가 각종 진단을 한다. 현재 이스라엘 기븐이미징사가 M2A라는 최초의 캡슐형 내시경을 개발해 판매에 돌입했다. M2A는 두께가 12mm, 길이가 30mm로 체내 영상 데이터를 제공해 진단에 쓰일 수 있다. 현재 한국의 경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지능형마이크로시스템 연구센터에서는 M2A와 차별되는 내시경을 개발·연구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래에는 캡슐형 내시경이 혈관을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심혈관 질환이 증가하고 있는데, 만약 혈관을 지나다니는 캡슐형 내시경이 개발되면 혈관검사는 물론 치료용으로 사용돼 동맥경화나 뇌출혈과 같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질병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생명과학자들은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는 일이 연구의 동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연구방법을 좀더 편리하게 만들 기술을 갖고 있지 않다. 이에 비해 마이크로 엔지니어는 자신들이 이룬 MEMS와 같은 소형화 기술을 어디엔가 응용하려는 호기심을 갖는다. 따라서 BioMEMS는 생명과학자와 마이크로 엔지니어의 결합으로 생겨난 분야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로서 변화의 중심에 있는 생명공학연구 패러다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