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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으로 또는 화학적으로 관찰·분석해 본 결과는 분명히 유리였다. 그러나 현미경을 통해 자세히 들여다보니···
 

피상무늬 유리잔^98호 남분 출토. 5~6세기. 높이 12.7cm, 국립경주박물관. 국보193호


벌써 9년이 지난 1981년 5월의 일이다. 강릉지방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우연히 신문을 뒤적이다가 나는 깜짝 놀랄만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4단짜리 짧은 기사였지만 내게는 너무나도 큰 사건이었다.

경주 근교 덕천리(德川里)에서 신라 때 것으로 보이는 유리를 만들던 가마터가 발견됐다는 기사였다. 게다가 가마 속에는 녹아붙은 유리덩어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니. 정말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국과학기술사에 있어서 내 오랜 숙제중 하나가 일시에 풀리기 때문이었다.

유리가마에서 채집한 유리조각을 얻은 것은 늦은 봄이었다. 육안으로 보면 틀림없는 유리였다. 그러나 경주박물관 학예관들은 유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철광석을 녹일 때 떠오르는 슬래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안에서 나는 유리에 얽힌 한국의 기술사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았다. 일본학자들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출토되는 유리제품들을 중국산(産) 또는 오리엔트지역 제품으로 일단 믿어버리는 태도가 늘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과기원 연구진의 평가에 고무돼

1976년 4월 23일. 나는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대한화학회 창립 3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및 제37회 연회에서 특별강연을 하게 되었다. 내가 서울대학교 문리대 화학과를 졸업한지 20년만의 일이었다. 이 자리는 전공인 화학을 계속하지 않고 외도(?)를 하던 내게 베푼 영광스런 자리이기도 했다.

내 강연의 주제는 '한국 고대 화학기술의 몇가지 문제'였다. 여기서도 나는 유리의 기술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국내의 많은 화학자들은 이 문제제기에 큰 관심을 보여 주었다.

여러 상념에 사로잡힌 채 나는 어느 새 서울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오랜 숙제중 하나가 풀릴 것인가. 한국에서도 유리를 만들던 가마터가 확인될 수 있을까.

그후 얼마동안 나는 그 청록색 유리 덩어 리 한 조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런 설명도,없이 이 유리를 유리전문가에게 불쑥 내밀면서 ''이게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다. 나의 대학동창이기도 했던 유리전문가는 옛날 유리라고 잘라 말했다. 이제 남은 일은 화학적 분석 뿐이었다.

고려대학교 윤동석교수에게 분석을 의뢰 했다. 철(鐵) 전문가인 그에게 슬래그인지 아닌지를 한꺼번에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6월 10일, 마침내 결과가 나왔다. 두개의 표본이 다 유리라는 것이다.

그날 나는 흥분과 기쁨으로 가슴 벅찬 하루를 보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유리분석이었고, 신라 때 이미 유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윤동석교수팀의 분석결과는 이렇다. 표본 A는 초록색인데 비중이 2.31이고, B는 짙은 회색인데 비중은 A와 같은 2.31이었다. 또 둘다 알칼리석회유리였다.
 

윤동석교수팀의 분석치


얼마 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이 유리 두 조각이 다시 분석되었다. 특히 짙은 초록색 부분을 정밀하게 분석했는데 결과는 같았다. 또 분석보고서는 유리화가 잘된 질 좋은 유리라는 평가를 덧붙이고 있다. 신라의 유리기술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현대 과학기술연구팀이 입증한 것이다. 한국의 고대 과학기술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는 KAIST의 연구진이 내린 평가였기 때문에 선입관이 없는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과기원 연구팀의 분석치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고

그런데 1989년 5월 KAIST에서 열린 '신소재(新素材) 200 심포지엄'에서 KAIST 금속부장 최주박사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덕천리에서 발굴한 유리모양의 덩어리가 사실은 슬래그임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일부 일간지에 보도됐다. 그 보도에 접했을 때 나는 이전의 어느 발표보다도 과학적인 근거를 갖고 내린 또 하나의 슬래그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1989년 말에 나온 '문화재'(文化財) 22호에는 최주박사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인숙씨, KAIST 금속부 기사 김수철씨 연구원 도정만씨의 공동연구 논문이 실려 있다. '경주 월성군 내남면 덕천리 출토의 철 슬래그에 대한 연구-유리냐 슬래그냐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한마디로 이 논문은 내게 큰 충격과 놀라움, 그리고 기쁨과 아쉬움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역시 슬래그였구나 하면서도 한없이 아쉬웠던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신라인이 유리를 제조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줄 물증이 나올 때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어쩌면 나는 그 결과를 못보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박사팀의 논문은 훌륭했다. 특히 학문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논지를 제시하고 있었다.

●-미세구조의 관찰을 통해

매우 치밀하게 조사한 결과, 표본들의 화학조성은 전에 분석한 결과와 비슷했다고 최박사팀은 밝히고 있다. 그러나 미세구조의 관찰에서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현미경을 통해 보았더니 시료에서 철의 규산염(ferrous silicate) 결정체가 관찰되고 철입자도 검출됐는데 그 철입자는 주물용으로 적합한 펄라이트 (pearlite) 회주철(灰鑄鐵)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덕천리에서 출토된 유리질 덩어리는 슬래그다.
아무튼 육안관찰과 화학조성만 갖고 판단한 종래의 결과와는 다른 결과임에 틀림없다. 실험고고학자들에게 또 하나의 과제가 생긴 셈이다.

●-토기의 기형과 닮아

일본학자들의 말처럼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들이 모두 오리엔트에서 들여온 수입품이라면, 신라의 유리기술자들은 유리구슬만 만들고 있었단 말인가. 사실 당시의 신라인들은 꽤 활발한 국제 교류를 했고,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공예품이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그 시대에 가장 훌륭한 유리제품을 만들어냈던 오리엔트의 유리제품이 신라에 들어왔으리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동시에 그런 뛰어난 유리제품에 자극돼 신라의 유리제조 기술자들이 오리엔트산에 필적할만한 유리그릇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충분히 해볼 수 있다. 신라고분에서 발견된 유리그릇의 모양이 이란과 페르시아지역의 것과 닮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 된 유리병과 몇개의 유리제 사리병들은 하나도 닮은 데가 없다. 이런 것들은 신라의 유적에서 뿐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의 유적에서도 발견됐다.

이 '한국형, 유리그릇들 중에는 우리나라 토기의 기형(器形)과 무척 닮은 것이 많다. 추측컨대 토기를 본떠서 왕실에서 쓰는 유리그릇을 만들었을 것도로 보인다. 불교신앙에서 최고의 상징적인 보배라 할 수 있는 사리를 담아 두는 그릇을 유리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유리그릇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다.

최근 유리에 대한 기술고고학적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퍽 반가운 일이다. 유리공예를 전공한 고고미술학자 이인숙씨의 '한국 고대유리의 분석적 연구'(고문화, 34집, 1989년 6월)는 근래 보기 드문 연구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분석한 여러 개의 자료에 근거, 우리나라 고대 유리 제조의 변화과정을 설정하려고 애썼다. 이씨는 유리제조사(史)를 세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제1단계의 전기(B.C.1세기~A.D.1세기)에는 소량의 나트륨(${Na}_{2}$O)을 함유한 실리카유리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후기 (A.D.2세기~3세기말)에는 포타시유리(${K}_{2}$0-${Si0}_{2}$ glass)가 판을 치는데 이 유리는 중국 한(漢)대의 유리와 같은 계통이다.

제2단계의 전기(A.D.4세기~5세기)에는 소다유리가 주류를 이루고, 후기(A.D.5세기~7세기 초)에는 소다유리 포타시유리 납유리 등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끝으로 3단계 (A.D.7세기~10세기), 즉 신라통일기에는 납유리 '천하'가 됐다는 것이다.

또 각단계 별로 출토되는 유리의 종류에도 차이가 난다. 1단계에는 유리구슬류가 주로 발굴되고, 2단계에는 풍부한 유리구슬과 장식품, 유리그릇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3단계에는 사리병이 주축을 이룬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70년대에 내가 포괄적으로 제시한 가설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씨는 유리가 제작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서는 나와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서력 기원전에 이미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외부와의 교역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유리제작 기술을 습득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 역시 유리의 외부전래설에 머무르고 있어서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논란의 소지가 남아

이보다 조금 앞서 1987년에 몇 사람의 화학자팀이 중성자 방사화 분석법과 다변량 해석법을 활용 고대 유리제품을 분류하고 그 결과를 학술지에 발표했다(대한화학회지, 31권, 6호, 1987년). 이 팀의 주축인 이철(李撤)교수는 작년에 간행(한국상고사학회 공동연구)된 '한국상고사' 집필팀이 실행한 '고대유물 산지의 연구'에도 참가했다. 그는 여기서 최몽룡 강형태 이성주씨 등 고고학·보존과학 전공학자들과 함께 주목할만한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이 논문은 한국에서 기술고고학 또는 고고화학의 학문적 위치를 정립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들은 이 연구에서 한국 고대유리의 산지를 추정하는 작업을 고고화학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45종의 시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은 큰 성과다. 또 '고분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는 유리구슬류는 국내산'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양식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로만 글래스(Roman glass)계통의 유리용기는 수입품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은 장차 또 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유리용기가 모두 수입품인가, 일부만 수입품인가 하는 문제는 계속 검토돼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앞으로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다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의 고대유리의 기원을 알아내는 일은 과학기술사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사의 중요한 부분들을 해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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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전상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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