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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수아이」를 통해 살펴본 한반도의 구석기 인류


충북대 이융조교수팀이 발굴해 최근 발표한 한반도 최고의 인간 「흥수아이」의 모든 것과 한반도의 구석기인.

82년 12월초 한흥석회의 충북 청원 현장책임자인 김흥수씨는 석회암을 채취하던 도중 우연히 발견된 몇개의 사람이빨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이미 76년 부터 이 지역 여러 곳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전문가에게 연락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발굴작업에 들어갈 경우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망설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쩌면 고대사연구의 획기적인 진전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개인의 이해관계로 인해 포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씨는 며칠후 충북대 이융조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내 처음으로 발굴된 완전한 모습의 구석기시대인간 '흥수아이'는 이렇게 해서 발굴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교수팀은 이후 10차례에 걸친 발굴작업을 통해 2개체분의 사람뼈와 주먹도끼 사냥돌등의 구석기유물들을 찾아냈다. 이중 1개체분의 사람뼈는 보기 드믈게 거의 손상되지 않은 완전한 뼈대를 갖추고 있었고 나머지 1개체분은 크기가 작고 머리부분이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이교수는 유물들이 발굴된 굴을 첫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흥수굴'이라 명명하고 사람뼈에는 '흥수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후 흥수아이에 대한 연구는 미국 버클리대 인류학과 교수팀과 이 대학출신으로 최근 충북대에 부임한 박선주교수가 맡아 6년동안 뼈를 정밀복원한뒤 체질인류학적 방법을 통해 분석작업을 벌여왔다.
 

청원 두루봉 동굴 위치


해부학상 현대인

이교수팀의 연구결과 밝혀진 '흥수아이1호'의 생존시기는 대략 4만년 이전의 후기홍적세 '슬기슬기사람'(Homo Sapiens Sapiens)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근거로는 흥수아이와 함께 발굴된 구석기유물이 최근 북한에서 발견된 만달인(2만년전의 인류)의 유물과 비교해 훨씬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흥수아이는 이가 솟아난 정도를 육안과 방사선 촬영을 통해 분석한 결과 현대아이의 5살 정도와 비슷했다. 머리크기는 1천2백~1천3백㏄, 키는 1백10~1백20센티미터 정도.

흥수아이의 머리뼈는 좁고 길며 양쪽이 서로 닮은 계란모양으로 옆에서 보면 높은 머리였다. 앞머리쪽은 완만하게 기울어져 있으며 윗머리의 굽은 길이는 매우 길었다. 뒤에서 보면 머리뼈 양쪽이 평평하며 옹이점 대신에 작은 파임이 있다.

전체인상은 좁은 얼굴과 좁고 긴 코가 특징. 아래턱은 턱불룩이가 턱 옆쪽에 보이며 잘 발달된 턱밑도드리와 불룩한 모양의 턱이음새가 입술쪽에 보였다. 치아는 아직 덜나온 위턱 첫째 어금니가 4개의 도드리, 아래턱 첫째 어금니는 5개의 도드리를 갖고 있다. 허벅지뼈대는 납작하며 정강뼈는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다.

흥수아이의 뼈는 현재 버클리대에 소장돼 있는 수백년전의 아메리카인디언 아이들의 샘플과 비교해본 결과 많은 점에서 닮은 것이 확인됐다. 그러나 윗머리뼈의 굽은 길이는 아메리카인디언 아이보다 월등히 길었으며 평양부근의 만달인 어른뼈의 잰값과 같았다. 튼튼한 아래턱과 잘 발달된 턱꼭지 또한 흥수아이뼈의 특징. 아래턱의 여러 특징들은 중국 주구점에서 나온 어린 '곧선사람'(Homoerectus)과 비슷했다. 팔·다리 등 긴뼈들의 잰값은 인디언아이들의 3.5세 정도에 속했는데 아마도 긴뼈들의 발육이 부진했거나 본래 작은 키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흥수아이뼈는 선사인과 현대인의 머리뼈 특징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네안데르탈'인의 특징인 뒷머리뼈혹과 두툼한 눈두덩, 낮은 머리뼈등과는 차이가 있다.

이융조교수는 "흥수아이가 체질상으로 해부학상 현대인(Anatomically Modern man)에 속한다. 이 사람은 우리들의 직접 조상으로 약 20~15만년전에 아프리카에 처음 나타나 그뒤 지구상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홍적세후기에 이 사람들이 두루봉일대에 살면서 후기 구석기문화를 누렸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잃어버린 고리

이교수팀의 발굴성과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우리 민족의 직접 조상은 적어도 4만년이전의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구석기인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먹을 것을 찾아 이동했기 때문에 현존 한민족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통설이다.

최근 국내의 구석기유물을 둘러보기위해 방한한 세계적인 구석기전문가 '앙리드 룸리'교수(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장)도 "발굴된 5점의 석기가 전기구석기부터 신석기시대까지 광범한 시기에 걸쳐 출토되고 있으므로 사람뼈의 과학적인 연대측정을 해보기 전에는 확실히 단정할 수 없다"며 조심스런 견해를 폈다.

이와 관련 박선주교수는 "흥수아이뼈의 절대연대를 알기 위해서는 탄소(${C}_{14}$)의 양을 측정해야 하는데 한번 검사하는데 적어도 3백그램이상의 뼈를 태워야한다. 1차 검사에서 ${C}_{14}$를 검출하는데 실패해 재검사를 준비중에 있다"고 밝히고 "흥수아이가 구석기 인류임에는 분명하지만 곧바로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보기에는 성급한 감이 없지 않다. 단지 한반도에서 다양한 시기의 구석기 인류들을 발굴해감에 따라 한민족을 먼 조상들과 연결시켜줄 '잃어버린 고리'들을 하나씩 찾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흥수아이1호의 머리뼈는 발굴 당시 눈두덩이와 아래턱가지 부분이 부서져 없어진 상태로 발굴됐다. 발굴팀은 이 흥수아이의 머리뼈를 같은 나이에 속하는 인디언아이의 머리뼈와 비교해 손상된 부분을 복원, 완전한 모습의 사람머리뼈가 되도록 했다.

구석기논쟁의 열쇠―사람뼈

흥수아이가 나온 흥수굴이 속한 두루봉유적(충북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 소재)은 76년 7월 첫발굴된 이래 가장 많은 구석기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구석기유적의 보고(寶庫)'로 손꼽힌다. 충북지방은 원래 석회암동굴이 많아 토양성격이 알칼리성으로 유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므로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64년 손보기교수(당시 연세대)가 공주 석장리에서 남한 처음으로 구석기유물을 발굴했고 뒤이어 제원용굴 청원두루봉동굴 단양상시동굴 단양금굴 등이 잇따라 발굴됐으며 야외유적으로 단양수양개와 제원 창내유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따라 일제시대에 식민사관에 젖은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던 '한반도에 구석기문화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학설은 여지없이 부정되었다.

충북지방의 구석기유적중에서도 가장 내용이 풍부한 두루봉유적은 '처녀굴' '제2굴' '새굴' '흥수굴' 등 4개의 동굴에서 짐승뼈 화석 석기 꽃가루 등이 나왔는데, 이들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해 볼수 있다.

특히 사람뼈는 몇군데에서 일부 발견되었지만 흥수아이처럼 완전한 형태의 사람뼈가 발굴된 것은 매우 보기드문 일로 세계적인 관심의 표적이 되고 있다. 흥수아이 1호는 출토 당시 두발을 모으고 오른팔은 곧게 뻗쳤으나 왼팔은 안으로 굽어 손이 엉덩이뼈 위에 놓였으며 배부분에 네모난 판자들이 얹혀 있었다. 2호뼈도 머리부분은 없어졌지만 하늘을 향해 곧게 바로 펴 묻은 점으로 보아 당시의 장례습속을 살펴볼 수 있다.
 

흥수아이의 머리뼈와 인디언아이의 머리뼈를 비교한 모습.


원시인의 지혜

두루봉동굴유적들과 흥수아이를 통해 한반도에 살았던 구석기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홍적세후기의 한반도 기후는 따뜻한 날씨와 추운 날씨가 교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쌍코뿔소 짧은꼬리원숭이 사자 하이에나 등 더운 지방에 사는 동물과 곰 이리 늑대 등 추운 지방에 사는 동물의 뼈가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구석기인은 주로 이들 동물들을 사냥해 먹을 것을 해결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냥도구로는 돌팔매질에 쓰였던 사냥돌이 발견되었고 동물뼈를 뾰족하게 다듬어 막대기에 붙들어맨 창도 발견됐다. 동물중에서 가장 많이 잡힌 것은 역시 약한 동물에 속하는 사슴. 구석기인들은 어찌 된 일인지 9·10월에 가장 많은 사슴을 잡았고 새끼를 낳을 시기인 5·6월에는 거의 사냥을 자제했다. 이러한 사실은 사슴이빨의 마모도로 미루어 알 수 있는데 가을에는 월동준비로 인해 먹을 것을 저장했다고 볼 수 있지만 사슴의 출산시기에 사냥을 자제한 점은 원시인의 지혜때문이었는지 어떤지 분명치 않다.

구석기인들은 사냥뿐 아니라 물고기와 채소로도 음식문제를 해결한 흔적이 있다. 남생이뼈가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고기잡이를 위해 금강가까지 진출하였으며 채소 열매 뿌리등도 섭취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루봉유적을 통해 구석기인은 주로 동굴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1년 내내 동굴에 살았는지 아니면 계절에 따라 거주지를 옮겼는지는 불확실하다. 발굴된 사슴뼈로 보아 4~7월 사이에는 거의 잡힌 사슴이 없다는 사실에서 따뜻한 여름에는 동굴을 떠나 여기저기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제2굴'에서 불을 피우면서 남긴 화덕자리와 숯, 그 주변에 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살을 자르는데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예리한 돌이 발견됨에 따라 원시인들은 적어도 사냥한 동물들을 익혀서 먹었음이 밝혀졌다.

당시 생활상을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중의 하나는 현미경을 통해야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꽃가루.

'제2굴'의 꽃가루를 분석한 결과 두루봉에는 추운 기후에 잘 견디는 소나무와 더운 기후에 잘 자라는 넓은잎나무의 오리나무가 각기 거의 주기적인 변화를 보이면서 우점종(優占種)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각 시기마다 추운 기후와 더운기후가 적어도 9차례나 교차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흥수아이와 함께 출토된 구석기유물 사냥돌


정밀한 고증작업 뒤따라야

꽃가루분석을 통해 나타난 특이한 점은 진달래 꽃가루가 집중적으로 검출되없다는 사실이다. 제2굴의 7층에서 발견된 2백51개의 꽃가루중 진달래가 1백57개나 굴입구에서 발견돼 누군가 일부러 꺾어 갖다놓았을 것이라는 가설을 입증하고 있다. 더구나 진달래는 산성토양에 특수하게 떼를 형성해 자라는 특성이 있으므로 알칼리성토양인 두루봉일대가 아닌 먼 곳으로부터 운반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6만년전 네안데르탈인들은 자기자식의 무덤에 애도하는 뜻으로 꽃을 갖다 놓았는데, 두루봉의 구석기인들도 꽃을 통해 미적 감각을 표현했는지는 추측만 할수 있을 뿐이다. 단지 보다 확실한 사실은 당시 구석기인들이 사슴발가락뼈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장신구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루봉유적을 통한 구석기문화의 연구는 이 일대 유적들의 추가발굴과 분석작업에 의해 보다 풍부한 결실을 맺을 것이다. 더욱이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만달인(평양부근)을 비롯, 상원검은모루동굴 덕천승리산동굴등 구석기유적이 계속발굴되고 있어 구석기시대 거의 전기간에 걸쳐 한반도에 인류가 살았다는 사실이 굳어져 가고 있다.

이들이 현재 한민족의 직접적 조상이었는지 아니면 여러차례 빙하기를 거쳐 먼후일에 우리 민족이 형성되었는지는 학계의 정밀한 고증작업과 토론이 뒤따라야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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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김광해 기자
  • 김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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