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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생제 개발의 문 연 설파제

상처 감염으로 죽어간 전우 생각하며 연구 결심

상처부위를 감염시켜 환자를 괴롭혔던 박테리아. 독일 과학자 도마크의 천재성과 사명감이 항균제 개발의 활로를 열였다. 설파제는 페니실린의 발견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

1865년 영국 글래스고대 외과교수 조지프 리스터(Joseph Lister)는 페놀에 담근 붕대로 상처 부위를 소독, 이 부위를 통해 병원균이 감염되어 사망하는 환자수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소독법이 즉시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다. 의사들은 상처부위 감염이 자신들의 기술적 문제로부터 발생했다고 여기지 않았고 더욱이 미생물이 상처부위를 감염시킨다는 직접적 증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증거를 밝힌 사람이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다. 그는 결핵균 콜레라균 등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미생물배양법 염색확인법 등을 개발해서 1870년대 이후 병원 미생물의 발견에 기여했다.

그 결과 특정 미생물을 배양, 배지에서 또는 동물에 감염시켜 항미생물제(antimicrobial agents) 물질을 시험해 볼 수 있게 됐다. 1907년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606호)과 1917년 아프리카 트리파노소마병(수면병)에 효과가 있는 게르마닌이 발견된 것은 이런 과정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보다 원시적인 박테리아 감염에 적합한 약은 아직 소독제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이 때 돌파구를 마련한 과학자가 1932년 프론토질(Prontosil)의 항균력을 발견한 독일의 게르하르트 도마크(Gerhardt Domagk)다. 프론토질을 실마리로 개발된 설파제는 1970년대까지 효과적인 항균제로 처방됐다.

그 후 미생물 대사산물인 항생물질의 출현으로 설파제의 임상적 사용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설파제는 최초의 항생물질 페니실린의 발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뇨제, 합성 당뇨병 치료제 등 새로운 약들의 발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약발견 역사에 중요한 공헌을 한 셈이다.
 

1930년대 독일 바이어연구소 모습


전쟁경험, 진로 결정에 큰 역할

도마크는 1895년 브란덴부르크의 조그만 마을 라고브(Lagow)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오래된 너도밤나무 숲이 있는 아름다운 호수변 마을이었다. 도마크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관찰력은 이 때 시작되었다.

도마크의 가정은 음악적 분위기로 가득했고 도마크 자신도 류트라는 기타 비슷한 현악기를 잘 연주했다. 그는 대학전 교육을 리그니츠에서 마쳤다.

1914년 도마크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킬 대학에 입학했으나 한 학기 후에 전쟁이 발발, 군에 입대했다.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도마크는 야전병원 의무병으로 배치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병원 생활을 통해 도마크는 의사들이 상처 감염과 전염병에 얼마나 무력한지 알게 됐다. 또한 그는 전쟁은 미치광이 짓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은 무엇이든 선이고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악'이라는 좌우명을 갖게 됐다.

전쟁 후 복학한 도마크는 1921년 졸업, 같은 해에 의사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그는 킬 시립병원, 그라이프스발트 대학 병리학과에서 연구했다. 그라이프스발트에서 간 식균작용 연구로 1924년 강사 자격을 취득한 후 도마크는 1925년 뮌스터대 병리학 전임강사로 임명됐으며, 뮌스터대 교수겸 화학기업체 바이어연구소 연구책임자로 화학요법제 연구에 전념하다 1964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도마크가 바이어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것은 약학 연구소 소장 하인리히 회를라인(Heinrich Hörlein) 때문이었다. 그는 체내 방어기구에 의해 박테리아가 파괴되는 것을 연구한 도마크의 논문을 읽고 병리학 분야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래서 도마크에게 실험 병리학과 박테리아학 실험실의 연구책임자가 될 것을 제의했던 것이다. 이 때 도마크의 나이는 31세.

도마크는 처음에 세균을 무력화시키는 체내 물질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못하자 연구 방향을 바꿔, 체내 면역기구가 박테리아를 쉽게 제거할 수 있도록 박테리아에 상처를 주거나 또는 직접 박테리아를 죽일 수 있는 화학물질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패혈증 환자로부터 병원성이 큰 연쇄상구균을 분리, 생쥐에 감염시킨 후 화학물질을 투여해서 감염정도를 조직학적으로 검사했다.

화학자 프리츠 미츠슈(Fritz Mietzsch)와 요제프 클라러(Josef Klarer)가 도마크 연구 보조를 맡았다. 이들은 수백개의 새로운 화합물을 합성했다.

처음 4년 간 중금속염, 비소 안티몬 화합물, 아크리딘 화합물 등 많은 화합물이 시험됐으나 전신감염에 효과가 있는 동시에 부작용이 적은 물질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마크는 전쟁에서 감염으로 죽어간 동료와 산욕열로 죽어간 젊은 여성을 생각하며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1931년 미츠슈와 클라러는 술폰아미드기(-S${O}_{2}$N${H}_{2}$)를 가진 아조 염료를 합성하려고 마음먹었다. 염료가 술폰아미드기를 가지면 섬유에 대한 부착력이 향상된다는 점이 20여년전 발견됐다.

도마크는 술폰아미드기 때문에 염료가 박테리아의 세포벽에도 더 잘 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그 결과 마침내 설파제의 단서가 된 프론토질(KL 730)의 항균력을 발견했다. 1932년 크리스마스날의 일이었다.
 

설파제 개발에 실마리를 제공한 게르하르트 도마크. 이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나치 정권, 노벨상 수여 방해

도마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더 이상 힘이 부쳐 견딜 수 없을 때까지 해부에 몰두하곤 했다. 그리고 지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혀 새로운 광경에 전기 쇼크를 받은 것처럼 놀라 움직일 수 없었다. 균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자세한 동물 및 임상 실험에서 프론토질의 효능성과 안전성이 입증되는 데 3년이 걸렸다. 프론토질은 1935년 발매됐다.

1938년 도마크는 프론토질의 항균력을 발견한 공로로 프랑스 미국 영국 등 과학자들로부터 노벨상 후보로 지명됐다. 그러나 1935년 자유 언론인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된 것을 나치 정권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한 히틀러는 1937년 독일 시민은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라고 명령했다. 노벨상위원회는 도마크가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독일 정부를 설득했으나 "독일인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회신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 상태에서 1939년 10월 26일 자정에 도마크는 스웨덴으로부터 노벨상 수상 통보를 받았다. 바이어 연구소 경영진과 뮌스터대는 도마크에게 정부로부터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조언했다. 그러나 아무 지시도 도착하지 않았다.

도마크는 예의 있게 행동하고자 11월 3일 카롤린스카연구소의 홀름그렌(Holmgren)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감사의 말과 함께 상을 받을 수는 없고 스톡홀름에서 강연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1월 17일 저녁 도마크는 베를린에서 열리는 의학교육아카데미 강연 준비를 마쳤을 때 비밀경찰에게 체포, 마을 유치장에 구금됐다. 체포 이유에 관해서는 아무말도 듣지 못했다.

일주일 후 석방된 도마크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에서 베를린으로 끌려가 약속된 강연을 마쳤다. 그 후 포츠담역에서 다시 근처의 사무실로 끌려가 스톡홀름 강연을 금지당했고 노벨상을 거절한다는 편지에 서명하도록 강요받았다.

노벨상을 받을 수 없게 한 시국 상황은 도마크와 그의 가족에게 상당한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도마크는 자신이 받은 불공평한 처우에 대해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저녁 순찰을 돈 간수가 무엇 때문에 갇혔느냐고 물었다. 나는 노벨상을 받아 갇혔다고 대답했다. 간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몇발자국 가서 다른 간수에게 '저친구 미쳤어. 바로 저친구 말이야'라고 말했다."

도마크는 1947년 12월 10일 노벨상을 받았다. 1939년의 상장과 메달을 받은 것이다. 규정에 따라 상금은 이미 재단에 환수된 후였다. 도마크는 마땅한 옷이 없어 오래된 결혼 예복을 입었다. 스톡홀름에서 행사 관계자들이 예복을 준비하려 했으나 도마크는 사양했다. 그때 한 외교관이 "우리 왕은 오래된 예복을 좋아할 것입니다"라고 재치있게 말했다.

윈스턴 처칠을 회생시킨 설파피리딘

1935년 2월 도마크의 프론토질 연구결과가 잡지에 발표되자 즉시 국제적인 반향이 일어났다. 같은 해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의 다니엘 보베트(Daniel Bovet)는 프론토질 자체가 항균작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프론토질이 장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됐을 때 생성된 술파닐 아미드가 항균작용의 원인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스위스 태생인 보베트는 항히스타민제와 근이완제 연구로 1957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학자로, 1929년 이래 파스퇴르연구소에서 일했다.

이제 연구 방향은 아조 염료인 프론토질에서 술파닐아미드로 옮겨갔다. 프론토질의 구조를 변형하기 보다는 술파닐아미드의 구조를 바꾸어 보다 우수한 항균제를 찾으려 한 것이다.

1948년까지 5천개 이상의 술파닐아미드 유도체가 합성됐다는 사실은 연구 경쟁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알려준다. 이 중 약으로 개발된 것에는 전부 '설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설파제(sulfa drugs)는 이런 약을 통칭한 것.

설파제는 대부분 술파닐아미드의 아미드 부위에 이종고리(탄소 이외의 원자로 형성된 고리)를 가진다. 이 화합물의 우수한 항균성은 1937년 영국의 메이베이커(May & Baker)에서 합성한 설파피리딘(M&B 693)에서 발견됐다.

메이베이커는 1834년 창립된 영국 회사로서 제1차 대전 후 프랑스 롱프랑(Rhone Poulenc)의 자회사가 됐다. 1936년 1월 연구원의 실험 노트에 설파제와 관련된 내용이 처음 나타났다. 그것은 M&B576으로 불린 프론토질이었다. 이 물질의 항균력을 주시한 메이베이커 연구진은 그 결과가 그리 흥분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개월이 지나서야 다양한 구조변형이 시작됐다.

메이베이커의 필립스(M. A. Phillips)는 1937년 11월 2일 설파피리딘을 합성했다. 당시 연구소장 에윈즈(Arthur Ewins)는 술파닐아미드에 이종고리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필립스는 마침 시약대에 다른 목적으로 만들었던 아미노피리딘을 발견하고는 즉시 이물질을 합성했던 것이다.

미생물실에서는 이 물질이 술파닐아미드에 비해 항균력이 우수하고 여러 균주에 효과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미들섹스 병원의 병리학자 휘트비(Lionel Whitby)는 보다 자세한 효능을 실험했다. 그는 폐렴균으로 감염시킨 생쥐를 갖고 있었다.

동물 실험과 1939년 3월 시작된 임상실험에서 설파피리딘은 박테리아성 폐렴, 뇌막염, 이질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 증명됐고, 이후 1939년 9월에 발매되었다. 이 약은 폐렴 사망률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1943년 12월 윈스턴 처칠이 북아프리카를 방문하던 중 폐렴에 걸려 위험에 빠졌을 때 처칠을 구한 것도 이 약이었다.

1960년대에는 설파피리딘의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 사이에 공로를 둘러싼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필립스가 자신의 공로가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이 발견으로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임된 에윈즈와 작위를 수여받은 휘트비를 자신의 처지와 대조시켰다.

페니실린 발견을 도운 설파제

1930년대 후반, 도마크는 영국 왕립학회에서 설파제에 관해 강의했다. 이 때 참석한 청중 중에는 성메리병원의 플레밍(Alexander Fleming)도 있었다. 그는 도마크의 강연을 듣고 곰팡이에서 포도상구균 성장억제물질을 발견하려 했던 자신의 희망을 포기했다. 시험관에서 우수한 항균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 한 곰팡이 배양액에서 약을 추출한다는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8년 옥스퍼드의 플로리(Howard Florey)와 체인(Ernst Chain)은 플레밍이 포기했던 과제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플레밍이 배양액을 상처부위에 발라보고 임상적으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페니실린의 임상적 가치는, 페니실린을 분리해 도마크의 방식으로 동물에 투여해서 실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페니실린을 추출하는데 성공, 1940년 8월 동물실험에서 8년전 도마크가 경험한 것과 같은 놀라운 약의 효과를 발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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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강건일 약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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