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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공간의 또 다른 나

새로운 자아 탐색


 

사이버공간의 또 다른 나


영화 ‘반칙왕’은 주인공의 이중적 삶을 보여준다. 임대호라는 주인공은 소심하고 무능력한 은행원이다. 그러나 밤이면 타이거 마스크를 쓴 거칠고 격한 레슬러로 변신한다. 주인공이 사는 낮과 밤의 세계는 다르다. 현실과 사이버세계를 오가는 삶은 ‘반칙왕’의 임대호의 삶과 비슷하다. 낮에는 얌전하고 평범한 학생이다가 밤이면 도발적인 인터넷 전사로 변한다. 또 ‘반칙왕’에서 표현된 낮은 현실세계, 밤은 사이버세계와 비유될 수 있다.

사이버공간에서의 첫 모습, ID

현실세계의 나, 현실자아는 사회 속에서 자신을 규정짓는 정체성, 즉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형성해간다. 그러나 현대 기계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또다른 세계를 제공했고, 이 세계에서 ‘나’의 모습은 현실의 그것과 다를 수 있다. 이 세계는 다름 아닌 인터넷의 대중화로 일상의 한 부분이 돼가고 있는 사이버세계다. 그렇다면 사이버세계는 어떤 특징을 가지기에 그곳에서 인간은 다른 모습을 가지는가.

현실세계에서 개인의 첫인상에 영향 주는 요소는 외모, 행동, 성격, 성별 등 다양하다. 이런 요소로 인해 한 사람에 대한 선입견이 매우 빨리 형성된다. 실제로는 마음이 너그럽고 순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사람들이 처음에는 사귀기를 꺼려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이버공간에서 그에 해당하는 것은 ID뿐. 이것으로 사이버공간의 상대방에게 어떤 인상을 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인터넷 초보자는 자신의 이름이나 별명을 따서 ID를 만든다. 가령 ‘이승희’라면 ‘shlee’인 것처럼 말이다. 또는 코넷 광고의 인터넷 영화감독의 ID가 육미리(yukmiri)인처럼 자신의 관심사, 특징, 직업을 반영하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날 때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치장하는 것처럼 사이버공간에서의 경험이 늘면 chatgirl, loveme, 바람의아들, 닥터지킬 등과 같이 네티즌들에게 쉽게 주의를 끌 수 있도록 매력적이거나 신선하다고 생각되는 ID를 만들어간다. 이름, 별명, 관심사 등 몇 글자로 표현된 ID로 나타나는 사이버족의 첫인상은 그 문자의 무미건조함 만큼이나 단순하다. chatgirl이라는 ID에는 ‘채팅을 좋아하는 어떤 여자’라는 피상적인 인상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ID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버공간은 기본적으로 익명성을 띤다. 때문에 현실세계의 어떤 규범이나 강제적인 특성이 훨씬 덜하다. 자신의 사고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고 혹은 욕설이나 비방과 같은 일탈 행동을 한다해도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따라서 현실세계에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거나 꺼려하는 소심한 사람조차도 마음 편하게 사이버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한편 사이버세계는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찾고 실험할 수 있는 사이버자아의 탐험장(場)으로도 기능하고 있다. 현실세계에서 또다른 나를 꿈꾸는 것은 위험부담이 매우 크다. 가령 평상시 ‘범생’(모범생)처럼 보이던 사람이 ‘날라리’(말썽꾼)가 어떤 기분인지 느껴보고 싶다고 복장과 행동을 바꾼다면 주위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요즘 N세대들은 머리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등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면서 고정적인 모습을 거부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이미지는 상당히 제한돼있다.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 나에 대한 탐색을 위한 공간으로서 사이버공간이 각광받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사이버공간에서 새로운 나를 어떻게 탐색할까. 현실에서 나를 자각하고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것은 주변사람과의 교류를 통해서다. 마찬가지로 사이버자아는 사이버교류를 통해서 형성·발전한다. 사이버교류 방법으로 대표적인 것은 채팅, 이메일, 역할게임(RPG)이다. 그런데 현실사회에서는 단순히 머리색을 바꾸는 등 아주 제한된 영역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변화를 시도하는 것과 달리 사이버공간에서는 나를 규정짓는 많은 특징들, 예를 들어 외모, 나이, 이력, 성격, 심지어 성별까지 거의 무제한적으로 변화를 줄 수 있다.

현실과는 다른 나


역할게임의 일종인 리니지의 한 장면.사이버자아는 이 사이버사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종류의 자아들과 상호작용해 현실자아와 독립적으로 성장해가기도 한다.


특히 대부분 채팅 경험자들은 자신의 성을 바꾼다. 충정로 3가 ‘제네시스 21’ PC방에 근무하는 강은성(가명)씨는 주로 여자라고 속이고 채팅방에 들어간다. “여자로 들어가면 더 쉽게 관심을 받을 수 있고 더 재미있어요. 그러기 위해서 여자처럼 보이려고 노력도 해요. 친구들에게 여자들은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기도 하구요.” 그의 여성채팅 경험담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재미로 자신의 성을 바꿔본 것일까.

성을 바꿔보는 것은 성에 의해 규정된 사회·문화적인 압력을 벗어나 다른 성을 체험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성이 누리는 힘이나 심리를 말이다. 가령 여성으로 위장하는 경우 채팅방에서 더 쉽게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끌 수 있다거나, 남성으로 위장하는 경우 마음이 넓고 터프한 남자의 심리를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또한 자신에게 내재돼있는 다른 성의 심리와 감정을 표출해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21세 여대생인 방은아(가명)씨의 채팅경험담을 들어보자. “채팅해서 몇 번 번개 비슷한 것을 한 적이 있어요. 상대방이 지적이고 키가 클 거라 생각하고 만났는데 실제로는 전혀 아닌 거예요. 물론 그쪽에서도 저에 대해 실망했겠지만….” 방씨처럼 채팅을 통해 알게 된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면 대부분은 자신이 생각하던 사람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갖는다. 사이버공간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단점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한다. 전문가들은 사이버세계의 경우 현실자아에서 불만족스러운 면이 더 강하게 부각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이버세상에서의 모습이 현실과 크게 차이가 나고 다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저는 여러 개의 ID를 만들어서 써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하나있고 나머지는 용도에 따라 바꿔 쓰는 거예요. 저를 대표하는 ID가 있다는 거죠. 다른 ID들은 그때마다 만들어 사용해요. 가령 hansori는 세심하고 얌전한 여자같은 모습으로 이용하는 거구요. babo는 때로 바보같이 편하게 행동하고 싶을 때 사용해요.” 출판업에 종사하는 30세의 박종혁(가명)씨의 경험담이다.

ID를 대신해 자신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 아바타 채팅에서도 이 같은 경우가 나타난다. 라이더 대학의 존 슐러 박사는 ‘The Palace’라는 아바타 채팅 서비스에 직접 참여해 연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아바타를 여러 개 심지어 1백여개도 넘게 만드는 것을 확인했다. 이 경우도 역시 자신을 대표하는 아바타가 있고 일시적이며 실험적인 대상으로서의 아바타가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이버자아가 현실자아와 동떨어진 가상의 고안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서 박종혁씨는 채팅을 해갈수록 자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ID가 보다 확고하고 일관된 자아로 형성해가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현실세계보다 더 일관성 있는 자아로 발전시켜 매니아가 되기도 한다.

한편 리니지와 같은 역할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 자신이 의도한 모습과는 다른 사이버자아가 형성돼감을 경험한다. 사이버사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종류의 자아들과 상호작용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현실자아와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시작했던 것이, 리니지게임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말이다. 이를 두고 MIT 사회심리학 교수인 셰리 터클은 “사이버공간이 단순히 놀이공간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이며, 사이버자아는 사이버세상에서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현실자아와 ‘독립적인 모습’으로 성장해간다”고 주장했다.

상호작용하는 현실자아와 사이버자아

사이버자아는 자신이 생각한 이상형을 추구하거나 다양하고 가변적인 모습을 보인다. 때로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일탈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버자아는 현실자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성장해감에 따라 독립적인 모습을 가지게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이버자아는 현실자아와 서로 상호작용하기도 한다. 미국의 한 이혼녀는 이혼 후 직장까지 잃고 딸을 데리고 살면서 자신의 비참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채팅에 빠졌다. 그녀는 이혼녀 채팅방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갔는데, 그 속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됐다고 한다. 현실의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무능력한 인간이라면 사이버세계에서의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충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이며 리더십이 있는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그녀는 사이버세계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왜 나는 현실에서 이렇게 살지 못하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사이버세계에서 책임감과 판단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현실에서의 삶도 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녀는 현실에서 직장을 얻게 됐고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사이버자아가 현실자아에 영향을 미쳐 현실자아를 성숙시킨 것이다.

이처럼 초기 현실세계의 자아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사이버자아는 다시 현실자아에 영향을 준다. 소극적이어서 남과 처음 만났을 때 말을 잘 못하던 사람이 채팅을 한 후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된다. 또 방가(반가워요), 어솨(어서 와요), 잠수(아무말하지 않음) 등 채팅에서 쓰는 용어를 자연스레 일상생활에서도 쓰게 되면서 생활에서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만만치 않다. 사이버공간에서 만난 상대방이 갑자기 모든 연락을 끊어버려 자살을 한다거나, 현실과 사이버를 구분하지 못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사이버세계에만 매달린다든가, 밤마다 채팅하느라 낮에는 조는 등 심각한 문제도 있다.

사이버공간에서 새로운 나를 실험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나에 대한 탐색 의도와 노력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먼저 사이버공간에 대해 기술적인 면에 익숙해지기 위해 끈기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야 사이버자아에 대해 탐색이 가능하며, 이때 그 의도가 열정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이버공간에서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한번쯤 중독을 경험하지만 다시 현실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사이버세계에서 새로운 나를 탐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실의 자신을 잃지 않고 현실생활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자제력을 갖는 것이다. 현실과 사이버세계를 조화롭게 이뤄가는 것이 성숙한 ‘나’를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2000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박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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