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우리 사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병 아닌 병.' 이 병의 심각도는 개인의 인격성숙도에 반비례한다.
작년 4월경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한 남학생이 필자의 외래진찰실을 방문하였다. 두통이 심하고 시험 때만 되면 불안하고 초조하며 만사 의욕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증상이 생긴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라고 말했다. 또 그동안 가끔 약국에서 약을 사다 먹었을뿐 정신과 치료는 처음이라고 하였다.
정신과에 오게된 경위를 물었더니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런 증상들이 신체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정신적인 갈등으로 인해 초래되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 학생의 성격은 몹시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 처음 몇번의 만남에서는 여러가지 두려움 때문에 자기의 갈등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다른 지엽적인 문제만을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래서 필자는 태도를 바꾸어 여기서는 어떤 얘기를 해도 좋고 얘기한 내용은 부모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비밀보장이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마음놓고 속에 있는 생각들을 털어내 놓으라고 하였다. 그는 몇번씩이나 강조하는 필자의 말을 듣고서야 어느 정도의 믿음과 확신이 생기는지 조심스럽게 자기의 속사정을 얘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몇달 전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충동 때문에 학교도 가기 싫고 공부도 안되었다고 실토했다.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두려니 장래가 걱정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라며 괴로워했다. 또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며 살기조차 싫어진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 학생이 왜 이런 상태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자세한 면담을 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내게 되었다.
그가 중학교 때에는 성적이 좋아 전교에서 10등 이내에 들 정도였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에는 전교성적이 10등 이내에 들지 못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무조건 야단만 치고 더 열심히 해야 일류대학교를 갈 수 있다며 공부만을 재촉했다.
환자는 3형제중 차남으로서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서 늘 아버지의 과잉기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 후, 성적이 점점 떨어졌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말했다. 혹시 성적때문에 그러시는 걸까? 그는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담임선생님이 돈을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이말을 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니 자기의 짐작이 맞는 것 같고 또 아버지의 수입이 뻔하기 때문에 말해봐야 속만 상하기 때문이었다.
며칠을 기다려도 부모가 나타나지 않자 담임선생님은 그를 불러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집에 가서 부모님께 오시라는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고 솔직히 말했다. 결국 그는 자기 말을 무시했다고 생각해 화가난 담임선생님에게 심한 야단과 함께 체벌을 받았다.
그후부터 무능한 부모가 원망스럽고 자심감이 없고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고 부모님이나 담임선생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심에 만사가 싫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성적은 더 곤두박질쳤다.
그의 이러한 심정도 모르는 아버지는 성적이 나쁜 것만을 야단쳤기 때문에 그는 더욱 더 공부하기가 싫어지고 만사에 의욕이 상실되었다.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할 자신감도 없어지고 불안 초조 두통 등과 같은 증상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억울하고 화난 감정이 발산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고 머리가 아파왔다. 모든게 우울하고 삶이 무의미해졌다. 다 귀찮아져서 학교를 그만두고 싶고 심지어는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든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3형제중 장남의 의견을 제일 존중하고 그의 의견은 항상 무시하는 편이었다. 어머니도 처음에는 그의 편에 서서 말을 하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의 의견에 따라 갔다. 이와 같이 집에서 항상 차별대우를 받는 느낌이 많았으며 그동안 공부 잘 하는 것 하나 때문에 인정받고 살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늘 마음속으로는 공부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한 것으로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집을 나가 노동을 하더라도 자기 멋대로 살아보고 싶은 충동도 받았다. 그러던중 자기의 인생을 파국으로 몰고가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병원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누구의 지지도 못받고, 인정도 못 얻을 때는 이와 같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학생의 이러한 심정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 후 그 동안 마음속에 누적된 여러 가지 감정들을 말로 표현시켰다. 또 본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지적을 해주고 앞으로의 마음가짐과 행동에 대해서도 충분한 토의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동의를 얻은 후 부모들도 만나 자식의 심정을 이해시키고 올바른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중재하였다. 아버지는 이를 계기로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었으며, 그동안 너무 장남만 중시했던 점에 대해서 인정하고 앞으로는 개선할 것을 다짐하였다.
물론 많은 면담을 통해서 이루어진 조그만 변화였다. 그 결과 그는 자기의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부모의 이해를 얻게 되어 다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가 되살아나게 되었다. 남은 기간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그는 서울시내에 있는 모 대학에 무난히 합격, 지금은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있다.
가까운 사람들의 이해를 통해
한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은 그 사람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특성과 사회환경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이 모든 요인들의 복합적인 영향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Biopsychosocial model).
그러나 임상에서 환자를 치료할 경우, 큰 사회적인 문제는 다룰 수가 없다. 때문에 개인과 그를 둘러 싼 직접적인 환경만 변화시킴으로서 문제를 해결해줄 수 밖에 없다.
앞에서 제시한 임상사례의 경우도 자세히 살펴보면 개인의 특성과 가정환경 그리고 사회적 문제가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되었다. 이중에서 치료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은 환자의 인격과 어려움에 대처하는 대처방안 그리고 가정환경일 것이다.
그는 차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장남 선호사상을 가진 아버지로부터 형과 동등한 대우를 못받고 항상 차등감을 느끼며 살아 왔다. 때문에 자진에 대한 긍지와 주체성이 약해서 늘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충격은 평형을 깨뜨리게 되었다. 또 자식이 어떤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야단만 치고 공부만을 강요한 아버지의 처사는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모에게 담임선생님의 뜻을 전했더라면 그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 실제로 돈을 바랬는지, 또는 다른 문제때문에 부모님을 보자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어릴 적 부터 항상 이와 같이 잘못된 짐작 속에서 할 말도 못하고 혼자서 화만 내고 있었던 경험이 많았다. 치료중에 이러한 성격에 대해서 논의하였고, 그 역시 그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즉 자기 스스로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치료촛점은 부모에 대한 교육이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태도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식에게 끼친 영향을 설명하고 아들의 현재 심정을 알려줌으로써 부모님들은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주게 된 셈이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어려움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가짐과 성격을 깨닫고 바꿈으로써, 그리고 그 사람에게 의미있는 가까운 사람들의 변화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일류집착증은 고3병의 뿌리
고3병이란 일명 대입스트레스 증후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고3학생 재수생 등 대학입학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신신체적 현상이다.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증상들은 매우 다양하다.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로는 심인성 신체화증상, 우울감정, 불안, 초조, 수면장애, 다양한 정신증상, 대인관계의 장애, 강박증상, 분노반응, 그리고 피해사고 등이 있다. 이중에서도 심인성 신체화증상이 가장 흔히 나타나는 증상에 속한다.
이러한 증상들이 가벼운 경우에는 큰 문제를 초래하지 않으나 자아의 기능이 약한 경우에는 심각한 정신장애의 증상들을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정신과적 도움을 받아야만 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정신과적 치료를 받지 않고 혼자서 버티다가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예도 많다.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에서 만연되고 있는 부모나 수험생들의 일류집착증에 기인한다. 또 꼭 대학을 나와야만 먹고 살 수 있다는 사고방식, 취업난 그리고 이에 따른 입시위주의 학교교육 풍토 등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점은 누구나 동감하리라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학생자신 부모 그리고 사회 모두가 관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 가정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고3병이란 결국 여러 가지 영향들로 인한 각 개인의 정서적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영향들 중에서 결정타는 대학에 꼭 입학해야 한다는 부담감일 것이다.
그런데 고3 시기는 청소년기에 해당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설상가상이다. 즉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어려움 외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그들은 신체적 발달과 인지적 발달로 인한 변화에 적응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장차 독립된 성인이 되기 위해 인격적으로 성숙해져야 하고 자기주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또 장차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독립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을 알아야 하고, 자기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설정하고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과제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부모님 학교선생님 친척 어른들 사회의 여러 어른들 선후배 그리고 동료들과의 폭넓은 대화가 필요하다. 아울러 독서를 통한 사색등 여러 가지 노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청소년기 동안에 풀어야 할 이런 과제를 해결할 여유가 없다. 뿐만 아니라 무조건 대학에 입학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대입(大入)과 관련된 스트레스까지 안고 살아야 한다. 결국 이런 것들이 복합되어 고3병이 발생되는 것이다.
해결의 방법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외부의 영향을 안 받을 수 없다. 물론 영향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능력은 각자가 타고난 속성에 달려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어린 시절 동안의 인생경험이다.
어릴 적 부터 인격적으로 성숙한 부모와 함께 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한 사람들은 자기주체성이 확립되어 있다. 또 자심감과 확신감속에서 자기의 인생을 설계하고 노력하며 여유있는 생활태도로 인생을 증긴다. 그들은 청소년기와 같이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에는 자기의 장래를 위해 힘은 들지만, 기꺼이 노력할 마음자세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기초는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출생후 6, 7년 이내에 결정된다. 그 후 이미 형성된 것을 고치려면 그만큼 많은 힘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올바른 인격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고3병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청소년기에 해결해야 할 과제자체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대학을 가야 하는 부담까지 겹치게 되어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고 만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정신신체적 증상 정신증상 학업포기 비행행동 그리고 정신장애의 발병등과 같은 상황에 빠진다. 요컨대 고3병의 심각도는 그 개인의 인격 성숙도와 반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고3병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학교 가정 그리고 학생들 자신 등 모두의 변화가 요구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도 어느 정도의 생활이 보장될 수 있는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부모의 태도, 학교교육의 문제도 같이 해결될 수 있으며 학생들의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학교도 입시위주의 교육자세에서 탈피, 본래의 교육기능을 되찾아야 한다.
셋째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의 사고방식이 변화되어야 한다. 무조건 대학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능력에 맞는 진로를 선택하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욕심을 버려야 한다.
넷째 학생들은 부모의 강요에 의한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태도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