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과학동아는 1월호부터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수사기술 연구를 가상사건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사의 마지막 퍼즐을 채우는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시죠.)
말은 칼보다 힘이 세다. 법정에서는 더 그렇다. DNA나 화학물질 등 증거로 맞출 수 없는 사건의 퍼즐은 피해자나 가해자의 말, 즉 진술로 찾아야 한다. 인공지능(AI)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지만 현장에서 진술의 진위를 판단하는 건 아직 사람의 몫이다. 진술인의 상태, 상황, 지적 능력 등을 고려해 진실을 구별하는 아주 ‘인간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1월 29일,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1층에 마련된 진술분석 면담실을 찾았다. 면담실 내부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흔히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따뜻한 베이지 톤 벽에 그림이 걸려있고, 한편에는 인형과 쿠션이 준비돼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최선희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진술분석실장은 진술분석을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눈빛으로 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면담실이 ‘따뜻하게’ 준비된 이유는 이곳을 찾는 이들이 최대한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특히나 피해자가 아동청소년 또는 발달장애인인 경우, 이들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에는 환경의 영향이 크다. 최 실장은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진술분석실에 소속된 진술분석관 스물두 명은 진술인이 가장 편안한 환경에서 진술을 할 수 있도록 전국 각지를 누빈다”고 설명했다.
어렵게 꺼낸 말이 제 역할을 하도록
진술분석 면담실에 앉은 장화와 홍련의 얼굴은 귀신치고도 어둡다. 한 번 말하기도 어려운 이야기를 최초 신고자인 사또에게, 경찰에게, 그리고 검찰의 진술분석관에게 거듭해 말하고 있으니 무리는 아니다.
“애들 말만 듣고 어떻게 알아요? 사람도 아니고 귀신인데.”
장화와 홍련이 이곳 진술분석실까지 오게 된 이유는 피의자인 새어머니 허 씨가 이들의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항의해 온 탓이다. 말과 말이 싸우는 가운데 진술분석관만이 평온해 보였다. 그는 담담히 답했다.
“우리에겐 말에서 진실을 걸러낼 도구가 있으니까요.”
진술분석이란 진술이 신빙성을 갖췄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면담을 통해 명료하고 풍부한 진술을 확보해야 한다. 앞서 최 실장이 설명한 ‘따뜻한 눈빛’이 여기에 필요하다. 진술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최대한 진술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진술의 진위를 판별할 때는 ‘차가운 머리’, 즉 과학적 분석기법을 활용한다.
진술분석은 ‘진술타당성 평가(SVA嘄tatement Validity Assessment)’ 절차를 따라 진행된다. 이 절차는 진술이 실제 경험에 근거하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검증 절차다. 1950년대 독일과 스웨덴 법정에서 적용되기 시작해 현재는 전세계적으로 활용된다. 조효진 진술분석관은 SVA 절차에 따른 대검찰청의 진술분석 과정을 한 가지 사례를 통해 설명했다.
이 사건은 중증 발달장애를 가진 11~17세 아동청소년으로 구성된 한 스포츠팀에서 벌어진 일이다. 해당 팀의 전임 감독과 코치 등 5인이 피해자들을 지도한다는 핑계로 지속적인 폭력을 가한 정황이 이후 새로 부임한 후임 코치에게 포착됐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가해자 중 한 명이 범행 사실을 부인하며 “피해자들에게는 진술 능력이 없으며, 진술 과정에서 유도 질문이 있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진술분석실이 피해자의 진술을 신뢰할 수 있을지 검증에 나섰다.
진술분석은 우선 진술인의 동의를 받고 사건 기록을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번 사건처럼 진술인에게 지적장애가 있거나, 진술인의 나이가 어려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원활치 못할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최 실장은 “예를 들어, 진술인에게 지적장애가 있는 경우 데려갔다, 불렀다 등의 상황을 ‘끌고 갔다’라는 불분명한 언어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며 “이럴 때 진술인의 특성을 고려한 면담을 계획한다”고 설명했다.
그런 다음, 면담을 진행한다. 예/아니오로 답해야 하는 폐쇄형 질문 대신 대답의 방향성이 자유로운 개방형 질문을 활용해 사건 전체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원칙이다. 조 진술분석관은 “피해자 중 한 명과 면담을 진행했을 때, 진술에서 수 개념과 시간 개념이 불안정하고 언어 능력의 한계로 행동 정보를 명료하게 말하기 어렵다는 특성이 나타났다”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상황적 맥락을 구분해 설명하고, 가해 도구를 구분하는 등 실제 겪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독특한 진술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었고, 논리성이나 일관성 부분에서 특이점을 발견하지도 못했죠. 피해자가 손짓발짓을 이용해 포기하지 않고 자기 경험을 전하려고 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진술 전 과정은 면담실 내부에 설치된 카메라로 녹화된다. 피해자가 언어 말고도 행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진술하는 경우 이를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후 녹화된 영상을 보고 진술을 분석한 다음, 마지막으로 진술분석관 3인의 합의를 통해 진술의 타당성을 판별한다. 면밀한 검증 결과 피해자가 최선을 다해 전한 진실은 법정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18가지 기준으로 참과 거짓을 가린다
진술분석기법은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증명할 뿐 아니라, 무고한 피의자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서도 활용된다. 윤여훈 진술분석관은 새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한 한 피해자의 사례를 소개했다. DNA 조사 결과 피해자의 속옷에서 새아버지의 DNA가 발견됐다. 그러나 피의자인 새아버지는 범행 사실을 부인해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
이 경우, 진술 내용을 분석하는 CBCA 기법에 따라 피해자의 진술이 참인지 판별할 수 있다. CBCA 기법은 독일의 심리학자 우도 운도이치가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 수천 건을 분석하며 귀납적으로 마련한 ‘진실한 진술에서 발견되는 지표’로, 진술의 진위를 가리는 방식이다. 진술의 일관성, 대화의 재현, 피해자가 이해하지는 못하나 정확히 보고한 세부 정보, 기억 부족 시인 등 18가지 지표가 있다.
CBCA 기법을 활용한 분석 결과,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적이지 않거나, 진술에 논리적 모순점이 포착되는 등 오류가 발견됐다. 윤 진술분석관은 “피해자의 진술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진술분석관의 판단에 따라 수사가 더 진행됐다. 그 결과 피해자가 성적 학대를 당한 것은 사실이나, 그 가해자는 새아버지가 아닌 제삼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소 새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는 것에 불만이 있던 피해자가 새아버지와 분리되기 위해 성적 학대의 가해자를 바꿔 지목한 것이다. 추가적인 조사 결과, 속옷에서 발견된 새아버지의 DNA는 속옷을 세탁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묻어나왔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최 실장은 “과학수사는 통화 내역, DNA, 그리고 진술까지 다양한 분야가 협업해 퍼즐을 맞추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건도 마찬가지다. DNA 분석만으론 맞출 수 없었던 사건의 진실을 진술분석을 더해 밝힐 수 있었다. 이렇듯 법심리학에 기반한 진술분석은 다른 조사기법을 보완하며 공존한다.
“흐릿하지만...새어머니가 제게 누명을 씌우고 괴롭히시던 게 기억나요. 제가 조금 더 바르게 살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기억이 부정확함을 시인하고, 자기 행동을 자책하는 장화의 모습은 피해자의 진술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패턴이다. 아니나 다를까, 진술분석 결과, 장화와 홍련의 말은 진실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에 따라 허 씨는 아동학대죄로 형을 살게 됐다. 진실한 말이 제힘을 발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