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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폰 브라운
 

독일에서 공포의 V-2 개발 미국에서 달착륙 아폴로 11호 성공시켜


"이러다가는 우리 모두가 소련군에 끌려가 시베리아에서 죽고만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



미국이냐 소련이냐

1945년1월도 저무는 어느날,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시되는 정세를 눈앞에 보면서 그 유명한 V-2 로케트를 생산, 개발하고 있던 '페네문데'연구소의 기술담당소장인 '폰 브라운'은 소련군이 페네문데 점녕(占領)을 위해 기갑기동부대를 앞 세우고 내려오고 있다는 정보에 접하자, 그의 심복인 기술자들과 비밀회담을 열고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

 

"내 의견으로는 남쪽으로 어떤 구실을 내세우고라도 가서 미군에게 투항하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남은 길이라 생각해요."

 

만장일치의 의견을 듣고 그는 곧 행동으로 옮겼다.

그때만 하더라도 '폰 브라운'은 제멋대로 날아든 10개가 넘는 이동명령을받고 있었다. 비밀경찰, 히틀러친위대본부, 베를린에 있는 육군, 해군,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나치 고위층으로 부터 각기다른 내용의 명령을 받았다. 이중에는 현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서도 있었다.

그는 어느 명령에 따라야 할지 골치 아팠지만, 남쪽으로 이동할수있는 구실에 적합한 명령서에 따르기로 했다. 그네들의 의도가 비밀경찰에 탄로나지 않게 하기 위해, 화차(貨車),트럭, 승용차, 버스할것 없이 총동원하여 시설, 로케트 부분품, 과학기술자, 노동자, 가족 들을 실어나르는데있어서, 크게 붉은선이 가로 그어진 표식포(標識布)에 굵직하게 <;특별배치계획용>; (zur besonderen Verwendung)이라는 글씨를 위장해 써붙이고 비밀경찰의 눈을 속였다.

'페네문데'의 인원과 시설전부가 이동할수는 없었다. 우선 '폰 브라운'의 심복들만이 탈출한 것이다.

그네들이 갖고 떠난것은 방대한 양의설계도, V-2 로케트 1백대분의 부품등 이었는데, 화차적재량으로 환산하면 약 3백대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1945년2월, 베를린의 병기성(兵器省)이 지령 했었던 이동지점인 '할츠'산맥속에 자리잡은 '불라이헤로데'(Bleicherode)에 그네들은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 지역의 사령관은 히틀러친위대(SS)의 '캄러' (Kammler)장군이었다. 그는 이전에 페네문대를자기 지휘소관으로 만들고자 애를썼던 이었다. 그는 그당시 유태인 강제수용소들도 관장하고 있었고, 그 유명한 유태인 학살을 자행해왔었던 차라 패전직전 상황에서 그는 신변안전을 위해 폰 브라운을 미끼로 미군과 교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브라운과 주요한 5백명의 로케트과학 기술자들을 차출하여 '오페라 메르고우'라는 나치고관들의 최후도피장소로 정한 알프스 산속의 한 마을로 이동시켰다.

그의 의도는 미리 알아 차린 브라운은 그 마을이 무방비상태라는 핑계를 대고, 그 주변의 20개 마을에 분산해서 있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마침내 브라운의 평생의 은인인 '도른베르거'(Dornberger)장군도 합류하게 되어 브라운 일행은 스키장으로 유명한 '오베르크'에 머물게 되었다.

 


동료과학기술자 3백명과 함께 미군에

그리고 얼마후 4월30일 히틀러의 죽음이 보도되자 폰 브라운은 서둘러야만했다. 영어를 잘 구사할줄 아는 폰 브라운의 동생 '마그누스 폰 브라운'(Magnus von Braun)을 보내 미군 44단의 '프렛 슈나이커'(Fred P. Scheiker)와 접촉하는데 성공했다. 곧 미국정보부원인 '찰스 스튜워트'(Charles L. Stewart)에게 인계되었다.

이 접선소식에 접한 미국 고급 장성이나 관리들은 로케트에 그리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스튜워트'가 사방으로 뛰며 주선한 덕분에, 무사히 '폰 브라운'과 '도른베르거'는 그때 같이 있던 과학기술자ㆍ가족 등 3백여명과 함께 미국군에 넘어갈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훗날 바로 미국이 인류사상 최초로 달 나라정복이란 영광을 손에 쥐는 결과가 되리라고는 누가 그 당시 상상이나 했었을까?


운명이란 그런것이다.

근대(近代)로케트개발에 선구자로서소련의 '콘스탄틴 티올콥스키(Contantin Tiolkovsky)와 미국의 '로버트 가다드'(Rovert Goddard) 및 독일의 '헤르만 오벨트' (Herman obelt)의 세사람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1927년6월에 독일에선 로케트광(狂)들이 모여 세계최초의 독일우주여행협회라는 것을 창설했다. '오벨트'는 이 협회의 고문으로 추대받아 젊은이들을 지도하게 되었는데 그의 연구를 돕기 위해 협회가 입회 시킨 세 청년가운데 미남형의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베르너 폰 브라운' (Werner von Braun). 1912년3월23일 동독 '뷔르지츠'태생이며 아버지는 '마그누스 폰 브라운'남작(男爵)으로서 주의원(州議員) 도 지냈다. 독일사람들 이름에 폰(von)이란명칭이 붙으면 귀족 출신임을 의미한다.

 


17살 때 우주여행협회에 가입

'베르너'는 중학시절부터 별과 우주에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에서 수도 베를린에 나오자마자 17살에 곧 이 우주여행협회 연구원으로 입회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어렸을 때는 소방차의 뒤를 쫓아다니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아버지한테, 장차 소방원(消防員)이 되겠다고 고집을 부려 그의 아버지 '폰 브라운' 남작은 골치아파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그의 로케트에 대한 연구심은 대단 했다. 1930년8월5일 '오벨트'를 도와 과학기술 시험소 시험장에서'원추(圓錐)엔진ㆍ로케트'의 실험에 성공하여 첫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연구비가 없어서 구경온 사람들에게 로케트실험 견학에 요금을 받아가면서 궁한 개발연구를 해 오던 어느날 그앞에 독일육군 장교가 한사람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발터 도른베르거'(Walter Dornberger)대위였다.

'도른베르거'는 제1차대전에선 포병으로 종군하였고 전쟁이 끝났을 때는 중위가 되었는데, 구후 '살로텐'공과대학에 입학하여 1930년에 졸업, 육군병기성의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로케트탄개발 임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그때 폰 브라운의 나이는 20살.

아직도 베를린 공과대학 학생이었는데, 고기가 마치 물을 얻은 듯, 그의 재능은 그 후 한없이 뻗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폰 브라운과 도른베르거와는 비록 나이 차이는 17살이나 되었지만 영원한 친구요, 도른베르거는 있는힘을 다하여 폰 브라운을 평생동안 도와주게 된다. 폰 브라운의 훗날의 성공은 결코 도른베르거 없이는 이뤄질수가 없었을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3년, 폰 브라운은 A-1이라는 액체연료 로케트를 완성했다. 길이 1.4m, 직경30㎝정동의 소형이었지만 이것이야말로 그 연구소에세 최초로 만들어진 역사적인 로케트였던 것이다.

A는 Aggregat, 즉 조립(組立)의 머리문자를 딴 것이다.

 


페네문데에 5천명의 과학자 모여

1936년8월에 발트 해(海)에 떠있는 '우세돔'섬(島) 북동쪽에 자리잡은 페네문데에 대규모 로케트연구소 및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폰 브라운이 입지조건을 생각해서 선택한 곳이었고 여기에 5천명에 달하는 과학기술자들이동원되었다. 드디어 1939년9월, 운명의 날이왔다. 독일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폴랜드를 침략했다. 곧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세계2차대전의 막이 오른것이다.

폰 브라운은 성능이 뛰어난 로케트개발에 전력을 다했다. 로케트 연료가 빨리 많이 연소해줘야 속도가 오르는데 그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하루는 수력발전소에 들렸다. 그곳에서 터빈 펌프를 봤다.

"이거다!"하고 그는 곧 그자리를 떠나 2백80㎞나 떨어져 있는 연구소로 달려 갔다. 그는 연료로서 75%의 에틸 알코올을, 그리고 산화제로서는 액체산소를 사용 하기로 하고 이들 액체추진제를 연소실에 보내기 위해 처음으로 터빈펌프 공급방식을 개발해냈다. 그리고 관성유도(慣性誘導)방법을 발명하여 비행정도(飛行精度)를 아주 높인 것이었다.

이렇게해서 완성된 A―4로케트는 길이가 14m, 직경 1.66m, 전비중량(全備重量)13t, 추력(推力)26t이란 그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초대형액체연료 로케트인것이었다.

1942년10월3일 이 로케트의 발사실험은 페네문데서부터 발트해를 향해시행되었다. 처음엔 수직으로 올라갔다가 45˚각도로 궤도를 구부리며 고도 87㎞에 도달, 수평으로 1백92㎞를 나른 뒤 바다로 낙하했다. 낙하예정지서부터 불과 4㎞밖엔 벗어나지않았다. 속도는 매초 1천5백m(음속의 4.5배)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후에 거리는 290㎞까지 도달할수있게 되었다.

A―4가 V―2로 개명이된후, 1944년 9월 6일 2발의 V―2는 처음으로 영국의 수도 런던을 공격했다. 1945년3월27일까지 실로 2천4백19발의 V―2가 런던시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망상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고 폰 브라운은 1945년12월에 그의 친근한 과학자 1백18명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고, 도른베르거장군은 영국법정에 V―2 로케트 제조책임자로서 섰고 2년간의 형(刑)을 언도받아 복역한뒤 역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미국은 1945년서부터 5년 동안 로케트개발엔 아무런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원자탄 수소탄제조경쟁에 바빴고, 그것만이 최고의 전략무기인줄로 미국 군사 전문가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폰 브라운'은 열심이 로케트의 주요성을 강조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월은 다시 흐르고…

소련군이 페네문데를 점령하고, 데리고간 독일과학기술자를 동원해서 1949년, T-1이란 길이 15m, 직경 1.7m, 추력 35t 이나되는 V―2보다 크고 사정거리도 V―2의 두배인 6백45㎞ 짜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때서야 미국육군은 1950년4월에 폰브라운을 불러들였고 도른베르거도 참여해줄것을 요구하여 1952년에 레드스톤(Red Stone)이란 18m의 길이, 1.5m 직경, 25t의무게, 34t의 추력 및 8백㎞의 사정거리를갖는 미사일을 완성했다. 그러나 소련은 T―2로 그리고 다시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사정거리 8천㎞나 되는 ICBM인 T―3을1957년6월에 완성, 발사에 성공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미국은 폰 브라운의 노력으로 1957년3월에 쥬피터(Jupiter)라는 IRBM을 완성시켜 2천4백㎞를 나르게했다.


1955년 그는 미국시민이 되었고 쥬피터의 성공으로 민간인최고훈장을 당시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1957년 10월4일. 소련은 T―3을 개량한 로케트를 사용하여 인류사상 처음으로 인공위성 스푸트닠(Sputnik)1호를 날리는데 성공하여 온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당시의 미국의 자존심은 말씀이 아닐정도로 땅에 떨어졌다.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그후 12년간 미국은 그야말로 폰 브라운을 업고다니다 싶이 총력을 기울였다. 1958년 1월31일 폰브라운은 미국최고의 인공위성'엑스 플로러'(Explorer)1호를 발사, 성공시켰다.

이무렵 소련은 우주개발에 있어서 1969년까지 수많은 업적을 과시했다.

이일에 화가 난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5월25일 미국의회에서,


"미국은 60년대가 끝날무렵, 인간을 기어코 달에 착륙시켜 무사히 귀환시킬 것이며 이 일이야말로 우리 인류최대의 의미깊은 계획이 될것이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그의 선언은 소련의 '가가린'이 처음으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돈 43일후에야 발표된것이었다.

폰 브라운이 이제서야 보람 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새턴'로케트의 구상을 시작했고 1호, 1―B호등의 40m길이의제작성공 후 드디어 '새턴' 5호 로케트 설계 제작에 성공한다. 1967년11월15일 새턴 5호는 멋지게 하늘을 날았다.

나도 1965년 NASA에 몸담게되었다. 미국 매릴랜드주에 있는 가다드 우주비행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화성(火星)을 탐사한 마리너(Mariner)4호가 1965년7월에 처음으로 화성의 근접사진을 전송해온것을 실험실에서 폰 브라운과 같이 보게 되었다. 그자리에 있던 15~16명의 과학자들과 마치 오래전부터의 친구처럼 악수를 나누고 농담도 하고 환성도 올렸다. 폰 브라운은 나를 보며

 

"일본서 왔소'하기에


"한국에서…"라고 했더니


"한국!? 그거 좋았어(That's good)" 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1969년 7월19일 드디어 우리 인류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날이 왔다.

폰 브라운이 설계한 새턴5호 로케트는 아폴로 11호를 실고 '케이프 케네디'에서 역사적인 출발을 한 것이다.

그리고 7월21일 달에 착륙한'암스트롱'(Armstrong)선장은 지구에


"내 이 한발자국은 비록 크기는 작은것이지만, 우리 인류를 위하여서는 위대한도약이다."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but one giant leap for manking)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광경을 마샬 우주비행센터소장실에서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던 폰 브라운의 두눈으로부터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도 그런 눈물을 한번 흘려봤으면 하는것이 평생의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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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조경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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