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자원이 풍부하고 해안선이 길어 좋은 항구가 많은 나라. 전화가 남긴 빈곤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나라.
베트남은 오랜 전쟁을 치른 끝에 남은 빈곤상태에서 벗어나려고 경제개발계획을 서두르며 한국의 동참도 바라고 있다.
1975년의 베트남전쟁 종결이후 이 봄에 처음으로 우리나라 경제사절단 7명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베트남 정부 고위관리 10여명이 공항에서 영접했고 민속의상의 여인들은 사절단일행 한사람 한사람에게 꽃다발을 걸어주며 환대했다.
이 나라는 지금 특급호텔에도 카펫이 없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새고 있다. 거리에는 낡은 미제 군용트럭이 달리고 있고 암시장에는 부족한 생필품을 구하려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그러나 이나라 사람들의 진지한 태도와 근면한 생활모습은 그들의 장래가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란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많은 인구·적은 농경지
베트남은 북동쪽의 '통킹'만에서 남동쪽의 남지나해, 남서쪽의 '사이앰'만으로 S자 모양으로 뻗어있고 북쪽의 '송코이'강과 남쪽의 '메콩'강 연안의 두 델타지대가 곡창을 이루고 있다. 북쪽 끝의 중국과 접한 '라오카이'에서 남쪽 끝의 '카마우'곶 까지는 1천6백km나 되는데 중앙부는 동쪽 해안에서 서쪽 라오스 국경까지 그 폭이 불과 50km 밖에 안된다.
역대 왕조끼리의 분열항쟁과 프랑스에 의한 식민통치, 그리고 근래에는 제네바협정에 의한 남북분할등 여러가지 분열요소가 있음에도 베트남은 언어와 문화면에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다만 남과 동의 해안평야에 사는 사람들과 북이나 서의 고지에 사는 소수민족 사이에 단층이 존재하는 정도 뿐이다.
그러나 베트남인이 모두 같다고는 하기 어렵다. 인도지나전쟁(1946년)과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한 서로다른 통치·경제체제는 그 역사가 극히 최근의 것이었던만큼 남북 양쪽에 다른 의식과 생활태도를 심었다. 이 간격을 메우는데는 아직 여러해 걸릴 것이다. 거기다 풍토적으로도 오랜 역사를 가진 북부나 중부와 비교적 최근에 발달하여 급격하게 인구가 팽창한 남부와의 차는 여전히 뚜렷하다.
원래 농경민족인 베트남인은 역사적으로는 어느 시대에나 연안평야나 하구델타에 몰려 살았다. 그러나 주민 약 5천2백만명에 대한 1인당 경지면적은 세계에서 가장 협소한 축에 든다. 이 인구팽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좋던 싫던 지금까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북부나 서부의 고지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밖에 농업을 발전시킬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인구 재배치문제는 국민경제나 체제의 장래와도 관련되어 있다. 농업정책의 실패는 용납될 수 없다. 인구와 농업문제. 이것은 1978년 말부터의 캄푸치아문제 개입과도 관련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끊임없는 투쟁으로 단련된 민족성
베트남의 역사는 싸움이 끊이지 않은 민족투쟁의 과정이었다. 내우외환과 자연의 위협, 거기에 대처하여 베트남인들은 농촌공동체 속에서 근면하고 끈기있는 민족성을 단련하여 왔다.
기원전 수세기경에 이미 베트남에는 독자적 문화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탄호아'현의 '돈·손'에서 발굴된 청동제 북이 상징하는 '돈·손문화'가 그것이다. 이 문화는 북부변경 산지의 일부와 남쪽 말레이반도에까지 미쳤다.
중국에서 한나라가 일어나 무제시대(기원전 111년)에 베트남의 북부는 지금의 '후에'(Hue·위에) 남쪽 북위16도인 해운관까지가 중국령이 되었다. 그뒤로 베트남인의 반란이 계속되었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이 '츙 차크'(徵則) '츙 니'(徵弍) 자매의 반란(기원40년)이다. 이런 반란으로 민족정신이 고양되어 오다가 서기 938년 중국군을 대파한 '고 구엔'(吳權)이 마침 당나라가 붕괴된 틈을타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중국은 그뒤에도 계속하여 이 중요한 남쪽지역을 탈취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13세기에는 몽고군이 세번이나 침공했다가 실패했다. 15세기에는 왕조의 내분을 틈타 중국의 명나라가 다시 침입하여 20년간 통치했으나 탄호아 출신의 '레 로이'가 명나라 군사를 물리쳐 이후 3백60년간 레왕조가 계속되었다.
1802년에 구엔왕조가 일어서기까지'구엔'3형제에 의한 농민봉기, '타이손'의 난 등이 끊이지 않았다.
구엔왕조때도 국내정정은 혼란이 거듭되어 외국세력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도 보호를 구실로한 나폴레옹3세가 야심의 손을 뻗어 1867년에 남쪽의 코친차이나지대가 1884년에는 중부의 안남지대와 북부의 통킹지대가 프랑스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시대에도 반란은 계속되었다. 농민 지식인 산악민족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이 각각 무기를 들고 계속 일어났다간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지배시대가 막을 내리자 민족주의 운동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 중에서도 '호치민'의 월맹(월남독립동맹)이 가장 세력이 강하여 1945년 9월2일 하노이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는 전쟁전의 지배권을 되찾으려고 49년 '바오다이'를 내세워 베트남국을 세우고 월맹군 세력과 싸웠다. 이 전쟁은 8년이나 끌었다. 1954년 5월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가 함락되고 같은 해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되면서 프랑스는 물러갔으나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렸다.
북쪽의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남쪽의 '고딘디엠'을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공화국으로 갈라진 것이다.
제네바협정은 체결 2년뒤에 전국 총선거를 규정했으나 이 조항이 이행되지 못한 채 디엠의 친미정권이 반공정책을 강화하자 남부 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이 60년 12월 월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하여 게릴라 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남쪽의 베트남공화국은 63년 11월 '두옹반민'장군의 쿠데타를 시발로 10여 차례의 군부정변을 겪었다. 그동안 미국이 개입하여 월맹과의 전쟁이 계속되다가 1975년 4월 사이공이 베트콩에 함락됨으로써 통일베트남이 탄생했다.
강 사이에 있는 나무그늘의 도시 하노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초에 가로수를 따라 세워진 별장풍의 건물이 줄지어 있는 하노이. 덜컹덜컹 흔들리는 전차와 자전거를 탄 무리만 빼면 하노이 중심부는 프랑스의 지방도시를 많이 닮았다. 언뜻보면 이 도시의 거리는 프랑스 식민지시대와 별로 변한것이 없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별장은 모두 행정기관이나 외국대사관이 되어 있고 가로의 이름도 완전히 베트남식으로 바뀌어 있다.
시가지에는 미국의 북폭흔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교외쪽은 심하여 복구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송코이에 가설되어 있던 거대한 철교 롱 빈교(구 도미에교)도 긴급 수리를 끝내 하노이에서 북부쪽과 남쪽 하이퐁으로 향하는 열차 트럭 초만원의 버스 자전거 멜대를 메고 가는 농촌 부녀들이 통과하고 있다.
호치민 묘 앞에는 참배자의 긴행열이 매일 끊이지 않는다. 이 수도의 중심부는 뭐니뭐니해도 '호안 키엠'호(작은 호수)일 것이다. 한쪽 손으로는 자전거를 끌고 다른 한쪽 손은 연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 젊은이들, 나무 그늘에서 시원하게 쉬고 있는 노인들….
이 호수에는 베트남의 한 영웅의 일화가 얽혀있다. 15세기에 뒷날 영웅이 된 '레 로이'가 어느날 이 호수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검(劍)을 발견했다. 그 검의 덕택으로 민중을 집결시키고 침략자 명나라 군사를 무찔렀다. 그 뒤 그가 혼자서 이 호수 옆을 지날때 검이 저절로 빠져나가 호수에 있던 용의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용은 호수속으로 깊이 잠겨버렸다는 것이다.
베트남판 아더왕의 전설이다. 지금도 호수가에 있는 작은 사원은 그 전설을 기려 세운 것이다.
하노이는 실로 오래된 도시다. 9세기말에 '탄론'이란 이름으로 왕도가 된 이래 수많은 영광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만큼 사원이 많이 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에는 비길 수 없으나 중국식의 대승불교사원이 볼만하다. 망고나무 그늘에 싸인 '콴탄'사원, 옛날의 민중지도자 츙자매를 모셔놓은 사원등이 그런것이다. 그 중에서도 하노이의 심벌과 같은 것은 연못의 한가운데 있는 '모노코토'사원(일주사·一柱寺)이다. 11세기 어느 왕이 후사가 없어 이곳에서 기도를 하여 왕자가 탄생하였다 하여 지은 것이라는 유서가 있는 사원이다.
또 유교관계의 유적으로는 베트남의 과거(문관등용시험)에 합격한 명사들의 이름을 새긴 돌비가 남아 있다.
그러나 역시 하노이는 산책에 알맞는 거리다. 중앙시장 부근의 오래된 거리가 특히 좋다. 포목점거리, 가마거리, 약방거리, 환전상거리 등 천천히 풍물을 즐기며 돌아다니기에 재미있는 거리다. 이곳에는 여러가지 점포가 있다. 카메라수리점, T셔츠 프린트점, 볼펜잉크 갈아넣는 상점,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드는 호치민 샌들점….
이밖에 하천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위해 쌓은 제방을 걷는 것도 좋고 돛배가 떠있는 서대호의 호반, 통일기념공원 등도 좋은 산책 코스다. 통일기념공원은 하노이시민들의 '아베크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하노이는 심한 인구과잉 상태다. 거리에는 검은 공단바지를 입고 땋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젊은 여성들이 가득하다. 그녀들은 언제나 여럿이 자전거를 타거나 걷거나 하여 일터에 갔다 왔다 하는데 어쩌다 외국인을 만나면 부끄러운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조용한 미소를 보낸다.
국도 1호선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의 여행
국가체제가 여유있는 관광여행을 허가하지 않고 있어 국내의 어디든 간단히 갈 수가 없다. 그러나 가능하면 고지의 소수민족지대나 중국과의 국경지대 또는 송코이 델타는 꼭 가볼만하다.
송코이 델타에는 오리가 헤어치며 놀고 있는 논이 있고 대나무 숲 속에 작은 촌락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농부가 물소를 몰고 논을 열심히 갈고 있다.
이 방향에서는 대규모 기독교성당이 있는 파토디엔의 카톨릭신도 지구와 북폭대상지역이었던 하이퐁항도 가볼만 하지만 어렵다.
또 잊어서는 안될 것은 하이퐁 북동쪽에 있는 아롱만이다. 프랑스식민지시대의 기록으로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자연의 경이가 가득한 곳'이다. 석회암질의 작은 섬이 수없이 많은 아롱만은 언제나 신비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 옛날에는 해적의 근거지였으나 지금은 평범한 어촌이다. 그러나 수로가 복잡하여 여행자가 이곳에 배편으로 가려면 미로를 헤매게 된다.
하노이에서 남으로 내려가려면 검은 연기를 토하는 기차를 2천km나 계속 타거나 자동차로 국도 1호선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국도 1호선으로 가면 처음 얼마동안 비옥한 델타지대를 시원하게 보며 가다가 갑자기 길이 꾸불꾸불하여진다. 벌의 허리같이 잘쏙하여지는 중앙부에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는 산이 해안의 사구(砂丘)지대에서까지 뻗어있다. 이런 황량하고 험한 자연환경인데도 베트남사상 이 부근에서 배출된 문인과 혁명가가 수없이 많다. 환경이 정신을 단련시키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모든 면에서 저항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폐허와 동굴뿐인 주변과 가로수가 늘어선 좁은 도로밖에 남아있지 않다.
길은 이어 빈과 동호이 거리를 지나간다. 동호이는 베트남전쟁이 끝났을 때 깨어진 벽돌과 콘크리트더미 사이에 가톨릭성당의 정문만이 남아 있었던 곳이다.
21년동안 '17도선'이라고 불렀던 경계선 벤하이강을 건너면 소위 남쪽 베트남이다. 쾅트리성채는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도 가끔 불발탄 희생자가 생긴다 한다. 이곳을 지나면 후에(위에)다. 왕조시대 베트남 최후의 왕조 구엔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후에시의 피해는 컸다. 3개 있던 성벽의 안쪽에는 왕조시대의 건물이 많았다. 그런 유서깊은 건물이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후에 부근의 아름다운 모래밭도 유명하다. 이 모래밭은 먼바다의 환초가 보호하여 씻겨내려가는 것을 막고있는 것이다. 이곳을 지나 해운관 고개를 넘으면 다낭까지의 길은 헤어핀커브의 연속이다.
다낭은 식민지시대에는 투렌이라 했다. 하노이와 사이공(현재의 호치민)을 잇는 요소로서 프랑스 당국의 거점이었으나 지금은 평범한 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가까이에 있는 대리석산 기슭에 있던 종전의 공군기지에는 지금 수백명의 베트남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철조망안에서는 미국이 남기고간 무기와 탄약상자가 녹슬고 있다.
대리석세공점을 지나 돌계단을 1백계단 올라가는 '대리석의 산'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다른 곳의 경관에 비기기 어렵다. 바다쪽을 보면 몬순계절에는 육지와 바다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 산쪽은 안남산맥의 나무가 많은 산들이 아름답고 남서쪽은 산악민족 모이족이 거주하는 고원이다. 남쪽을 바라보면 앗토프와 플레이크가 보이고 더 멀리는 고원지대도시 달라토가 아스름하게 보인다.
달라토 일대는 전에는 사이공시민의 피서지였으나 지금은 커피와 차를 재배하는 대농원지대가 되어있다.
길을 해안쪽으로 바꾸어 남하하면 이 일대는 옛날 소수민족 참족의 나라였던 곳이다. 처음에는 링이, 뒤에는 참파라고 한 나라다. 결국은 베트남에 정복되어 망했으나 그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남하하여 힌두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벽돌로 만든 탑의 잔해가 지금도 가끔 발견된다.
바다와 육지가 어울린 메콩델타
남부의 코친차이나가 지금 모습으로 이루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2백~3백년전에 걸쳐 베트남세력이 이 지역에 서서히 침투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 이 지역은 수백년간 말레이인과 크메르인의 문화가 지배했다.
지금 이 지방은 대립된 두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너무 비대하여 이제는 생산력을 잃어버린 호치민시(종전의 사이공)다. 또 하나는 쌀과 물고기를 얼마든지 내놓는 요술방망이 같은 메콩 델타이다.
호치민시는 이제 아름다운 도시라고 할 수 없다. 옛날의 사이공은 나무가 무성한 별장도 있고 여러가지 매력이 있는 도시였다. 지금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한번 이곳에서 지내본 사람은 아쉬워하며 떠나지 못하고 떠나도 그리워한다. 전화로 고향마을에서 살 수 없이 떠돌다가 이곳에 온 사람들이 지금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작은 포장마차에서 담배나 수프를 팔거나 자전거 바람넣기 등으로 겨우겨우 연명하면서 이 도시에 붙어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과잉인구가 이 도시를 황폐하게 하고 있다.
호치민시의 남쪽 수십km 지점에서 캄푸치아로 향하는 국도 1호선과 갈라지면 그곳이 메콩 델타이다. 종크평원과 미토의 벼논, 우민의 무성한 숲이 있고 카마우곶 까지는 델타가 펼쳐진다. 야자나무가 무성하고 비옥한 진흙을 실어나르는 많은 갈래의 강이 흐르고 있고 여러가지 신흥종교의 본산과 산적들의 은신처도 있는 곳이다.
메콩 델타는 신비로운 지대다. 어디에서 부터가 바다이며 어디까지가 육지인가를 분간할 수 없다. 그런 혼돈상태속에서 운하연안과 도로연변에 마을들이 점점이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는 운하가 버스나 트럭이 달리는 아스팔트 도로보다 훨씬 편리하다.
전에 군사초소였던 곳의 철조망은 지금 녹이슬어 있고 차츰 식물군에 덮여 초소건물이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그리고 엷은 초록색의 벼가 넓은 들에 깔려 어디에서 끝이 나는지를 알 수가 없다. 거기에 태양이 내려쪼여 논물에 반짝반짝 반사하고 있다. 이 메콩 델타를 하늘에서 내려다보아도 바다와 육지를 수십분동안 구별할 수 없도록 수면이 광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