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가짜약. 왜 환자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위약이 '순종'하는가?
K군은 어젯밤 복통으로 인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통증이 K군을 무척 고통스럽게 했던 것이다. 이 고통을 멎게하는 무슨 약이 없을까? 하지만 한밤중이라 약국에 갈 수도 없고, 미리 준비된 약도 없고.
K군의 어머니는 K군이 약을 애타게 찾는 것을 보다 못해 하얀 가루식품을 복통특효약이라고 속이고 이들에게 먹였다. 잠시후 K군은 조용히 잠이 들었다. 기세높던 복통이 멎은 것이다.
말하자면 K군은 가짜약 즉 위약(僞藥)을 먹은 셈이었고, 위약은 멋지게 그 효과를 나타내었다.
위약이란 약리작용(藥理作用)은 없으나 환자의 정신적인 위안을 위하여 투여하는 약이다. 처음엔 각설탕같은 불활성물질만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으나 차츰 용어의 범위가 확대된 것. 최근에는 임상적인 경험과 연구를 통해 위약이 실제로 정신적인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실례로 정신분열증을 치료하는데 널리 이용하는 약물인 발륨도 위약의 일종이다. 발륨은 정신분열증 치료에 특별한 약리효과가 없는 것이다.
위약효과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위약은 때로는 제약회사가 생산해내었던 어떤 약보다도 더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의사들은 의도적인 위약치료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내과, 치과, 족(足)병치료, 안과, 암치료, 수술, 정신과 분야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돼지 이빨, 당나귀 발굽…
위약은 습관성이 있고, 심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또 실체로 작용하는 약물의 효과와 유사하기도 하며 반대효과를 내기도 한다. 또한 뇌의 화학작용, 신체, 조직, 질병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여진다.
현대의학에 있어서 위약효과의 중요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의학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의학의 역사는 마치 위약효과의 역사랄 수도 있을 정도로 위약의 뿌리는 깊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는 특히 위약의 비중이 컸다. 당시 환자들은 병의 치료를 위해 유기물질 혹은 비유기물질을 복용하였다. 여기에는 악어의 똥, 돼지 이빨, 당나귀의 발굴, 파리의 기름기, 독사, 돌멩이, 벽돌, 모피, 깃털, 인간의 땀, 개미의 기름, 지렁이, 늑대, 거미 등이 포함된다.
수천년전, 의사들은 우리가 현재 무용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알고 있는 약들을 서슴없이 처방하였다. 따라서 근대과학 이전의 약물은 주로 위약효과에 의존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40년대 서양에서 약물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할 때 위약효과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새로운 약품의 효과를 알아보는 실험에서 위약효과가 문제가 된 것이다. 새로 만든 약물이 실제로 치료효과가 있는 것인가 ? 아니면 정신적 작용에서 나온 결과인가 ? 그래서 초기의 모든 위약효과에 관한 실험은 단지 약리작용을 억제, 감소시키는 목적으로만 실시되었다. 하지만 최근 과학자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위약효과가 일어나는가' 하는 연구를 진행중이다. 위약현상 자체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위약효과의 잠재력을 아는 것은 환자와 의사에게 매우 중요하다.
위약효과가 알려지지 알려지지 않았다면 환자와 의사들은 약물의 평가에서 오류를 범하기 쉬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용한 약물의 개발이 지연되었을 것이며 환자에게도 효과적인 치료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응자는 전무에서 전부
초기의 조사에선 위약을 복용한 환자의 30∼40%에게서 위약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위약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집단을 구별하려고 시도했다. 만일 위약반응자를 확인해낼 수 있다면 그들을 약물평가연구에서 제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약물의 확실한 화학작용을 알게 될 것으로 기대한 것.
그러나 좀더 연구한 결과 위약반응자의 범위는 종잡을 수 없었다. 각각 다른 여러 조건에서 측정했더니 위약반응자는 0∼100%였다. 더욱이 어떤 조건에서 위약에 반응한 사람이 다른 시간 혹은 다른 조건에서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위약에 지속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있을거란 생각을 포기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약 진통제가 예외없이 위약효과를 나타낸다는 이론을 다시 수립하게 되었다.
위약반응자의 범위가 매우 다양하고 넓기 때문에 위약효과를 제대로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학자들은 위약효과를 내는 인자들을 찾는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다양한 조건하에서 위약효과의 발휘에 영향을 미치는 일반적 인자와, 어떤 특수한 환경에서만 작용하는 특별한 인자로 구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반적 인자에 대한 연구는 별로 성과가 없었다. 위약효과와 연령, 성별, 지능 등의 관계를 살폈지만 뚜렷한 상관관계를 얻어내지 못한 것이다. 위약효과 측정방법의 다양함과 현상의 복잡함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그래서 최근의 연구자들은 위약효과를 발휘하게 하는 특수한 인자나 상황적 요소에 촛점을 맞춰가고 있다.
의사가 성직자 역할까지
위약효과의 발생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은 크게 3가지다. 사회적 영향효과, 기대효과 그리고 평가와 해석효과 등이다.
우선 사회적 영양효과에 대해 알아보 알아보자. 사회에서 의사의 역할은 아주 독특하다. 그들은 전문가, 치유자, 성직자 그리고 과학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특히 질병에 관한한 의사는 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다. 반대로 환자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의사의 도움을 요청하여 의사에게 지나치게 의지한다. 환자와 의사의 이같은 사회적인 관계는 의사원인의 위약효과를 조장한다.
그러므로 의사는 환자를 쉽게 설득시킬 수 있는데, 설득은 위약효과 발생요인의 하나이다. 환자가 의사의 말을 1백% 신뢰하고 긍정적으로 응할 때 위약효과가 잘 발휘된다는 얘기.
정신분신적이론에서는 자기의 감정을 남에게 떠넘기는 것, 즉 전이를 치료의 필수적 요소로 간주한다. 대개 환자는 의사에게 애정, 증오, 신뢰, 불신 등을 전이하는데 이것도 위약효과를 촉진시킨다.
한편 자신의 병을 과거의 죄가라고 생각하는 환자도 있다. 성불구, 불면, 심지어는 암까지도 때때로 이런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이때 의사는 환자에게 현재의 징후는 단지 병의 한 증상일 뿐, 결코 죄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환자를 안심시킬 것이다. 이런 희망과 낙관적 견해는 병의 치유를 돕는다. 아뭏든 긍정적인 위약효과는 환자가 역량있고 믿음직한 의사에게 피난처같은 느낌 받을 때 얻어진다.
위약효과는 기대감에 의해서도 얻어진다. 여기에는 2이론이 있는데 심리학자 스킨너(Skinner)의 '조작된 조건화'이론과 파블로프(Pavlov)의 '고전적 조건화'이론이 그것.
'조작된 조건화'란 보상과 비보상 즉 상벌이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조작된 조건화'는 환자의 행동을 제약할 뿐 아니라 그의 정신적인 반응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고전적 조건화'이론은 러시아의 심리학자 파블로프가 주장한 이론인데 개실험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파블로프는 직접 개에게 위약효과를 실험하였다. 처음엔 개에게 모르핀(morphine)을 주사하여 침분비, 구토, 방뇨 등을 유발시켰다. 주사를 여러 번 맞은 개는 파블로프가 주사기를 들고 접근하는 걸 보기만 해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같은 '고전적 조건화'이론은 암환자의 심인(心因)성구토를 설명해준다. 부작용으로 구토를 일으키는 항암제를 반복적으로 부여받은 환자는 그 약이 실제로 약리작용을 나타내기도 전, 즉 일단 치료가 시작되기만 하면 구토를 하는 것이다.
위약효과는 분명 정신적인 반응이다. 이와 관련, 최근 미국에서 수행된 실험 하나를 소개한다. 환자가 통증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한 실험이었다. 실험의 주 고려대상은 엔돌핀과 날록손.
엔돌핀은 대뇌에서 방출되는 화학물질인데 이 물질이 체내에 분비되면 통증이 감소된다. 그런데 이를 뽑으려고 하는 환자에게 위약을 주었더니 통증이 억제되었다. 다시 말해 엔돌핀이 분비된 것이다.
그로부터 1시간 후, 또한차례 실험을 했다. 이번에는 엔돌핀분비를 억제하는 약제인 날록손을 동일한 환자에게 투여한 것이다.물론 환자에게는 이 사실을 알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환자는 통증을 느꼈을까 ? 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였다. 위약효과가 날록손의 약효를 차단시킨 것이다.
부메랑효과도
또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평가하거나 그들이 타인에 의해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위약효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한번 위약효과가 있었다는 걸 알면, 환자는 의사를 기쁘게 하고 감동을 주려고 한다. 이처럼 선입견의 반응에 의한 위약효과는 실제로 병이 치유된 것이 아니며 단지 평가과정의 인공품이다.
위약효과는 질병이나 치료가 새로운 것일 때 더 잘 발생한다. 환자들이 잘 알고있는 병, 약물에는 위약이 별 힘을 쓰지 못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암을 치료하는 항암제가 위약효과를 발휘하기는 어렵다.
현재 대부분의 위약효과는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초기에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비슷했다. 많은 연구에서 위약을 복용한 48%의 환자가 증상이 악화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내과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현저했다.
의사는 환자에게 치료의 효과를 과장, 위약효과를 조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환자는 치료의 효과를 더욱 세밀히 관찰하는 경향이 있다. 환자는 의사가 약속한 효과보다 상태가 미달임을 알면 이것이 의사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혹은 치료가 비효과적이거나 질병이 악화되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결론은, 환자가 그의 병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걱정에 빠져 낙담하여 다시 증상악화를, 이른바 부메랑효과를 야기시킬 수 있다.
여러 연구 결과는 위약의 부작용을 지적하였다. 부작용은 부작용에 대한 암시의 결과일 수 있다. 또 의사들이 "사전에 부작용을 미리 말해주면 오히려 그것이 부작용의 원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환자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하여튼 사전에 많은 정보를 얻고 복용한 환자들에게 부작용이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