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을 전공했다든가 천문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다. ‘귀한 학문을 했다’, ‘배고픈 학문을 했다’, ‘별볼일이 많겠군’ 등등.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하늘의 별이나 쳐다보고 살다니, 하늘만 쳐다보고 살면 돈이라도 떨어지나?’등의 비아냥을 받기도 일쑤다.
물론 이 모두가 옳은 말들이다. 천문학은 실로 자연과학의 어떤 분야보다도 역사가 깊고,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과학을 잉태시킨 고귀한 학문이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학문일지도 모른다.
●─국민학교 교과서에서 자극받아
인간이면 누구나 밤하늘에 펼쳐진 아름다운 별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우주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또 우주를 생각하며 우주속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의심하게 마련이다. 이는 기원 수세기 전의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불빛등 도시의 온갖 공해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보다 하늘을 더 자주 올려다 보았을 터이고 그 신비함에 더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우주의 신비스러움이 인간의 운명까지도 결정해 준다는 점성술적인 예언의 필요성과 연결되면서 천체의 관측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로부터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역학의 기본법칙과 수학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우주는 수천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지금도 신비의 베일에 싸여있다. 지난 수천년 동안 수없이 많은 천재적인 두뇌가 동원되고 각종의 관측기기가 활용, 우주의 본질을 알아내려는 온갖 노력이 이루어졌다. 하나 아직도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은게 천문학의 딜레마라 할 것이다.
어린 시절을 거친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 쯤 갖게 되는 별에 대한 호기심에서 나의 천문학 또는 우주에 관한 관심도 출발하였을 것이다. 특히 6.25를 겪으면서 전쟁을 피해 산골마을에서 여름을 지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당시 저녁식사를 마치면 으례 동네 어귀에 나가 멍석에 누워 별을 세거나 유성(별똥별)을 바라보는 것이 매일의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주의 신비로움에 감명을 받았을 것으로 믿어지는 것이다.
중·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는데 당시에는 과학계통의 교양서적이 거의 없던 시대였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우주에 관련된 책을 구해서 흥미롭게 읽곤 하였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천문학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어서 학교에선 천문학을 이렇다 하게 배운 기억이 없다. 당시 나는 수학과 과학과목에도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장래에 천문학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만든 단서는 동생들이 사용하던 국민학교 교과서였던 것같다. 기이한 일이지만 심심하면 국민학교 교과서를 들척이는 버릇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교과서 안에는 나에게 무언가 꿈틀거리게 해준 대목이 있었다.
그 책에는 ‘안드로메다’성운의 사진과 함께 “여기에는 수천억개의 태양과 같은 별이 있는데 이 별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무슨 물질로 이루어졌는지 또한 이 많은 수의 별이 왜 이 성운과 같이 은하라는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천문학자들이 앞으로 풀어야할 숙제인 것이다”라는 대목이었다. 특히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는 건 큰 유혹이었다. 사실 의문 투성이의 학문을 눈앞에 두고 한번 도전해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배고픈 학문」의 선택
내가 대학에 입학할 당시에는 국내 대학에 천문학과가 한 군데도 개설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얕은 소견에도 천문학과 물리학은 같은 뿌리의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위대한 천문학자가 되려면 물리학과 수학의 튼튼한 배경이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대학은 물리학과를 택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진학한 곳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였다.
당시 대학은 좋은 선생님과 좋은 책 모두가 부족한 실정이었다.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문을 익히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더우기 천문학 분야는 더욱 어려웠다. 우리나라의 천문학은 거의 불모지나 진배 없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천문학을 제대로 전공하신 분으로는 당시 중앙관상대장이던 이원철박사 한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분도 관상대 업무에 주력, 대학에 출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문학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대학 4년이 다 지나갔다. 이젠 물리학과 대학원을 진학하느냐 또는 외국에 가서 천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때 내게 도움을 준 분은 현재 한양대학교에 재직중인 조순덕박사님이다. “천문학은 배고픈 학문임에는 틀림없으나 참으로 매력있는 학문일 뿐더러 미해결의 문제가 너무 많은 학문이다. 또한 이 분야를 전공한 우리나라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서도 천문학 전공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 그 분의 충고였다.
그때 마침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프트니크를 발진, 미·소가 경쟁적으로 우주 진출을 꾀하던 때라 사람들의 관심이 우주로 쏠리고 있었다. 게다가 우주시대의 개막이라는 인류과학사의 큰 전환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나로 하여금 천문학 전공을 꿈꾸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유학중 암기교육의 단점 깨달아
일단 유학해서 천문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은 정했으나 곧바로 뒤따르는 게 재정문제였다. 다행히 미국 대학에서 조교로 채용되어 수당을 받게 돼 돈문제는 해결되었다. 미군 수송선에 자리를 하나 마련,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낭만을 맛보면서 나의 유학생활은 시작되었다.
인천을 떠난지 15일만에 도착한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항. 주머니에 넣고 간돈은 고작 2백달러로 학교가 있는 뉴욕까지 버스표를 사고 나니 남는 것은 70달러 뿐이었다. 낯설고 물설은 미국생활이 70달러로 시작된 셈이었다.
내가 들어간 학교는 뉴욕주 트로이시에 있는 런슬리어 공과대학(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으로서 규모는 조그마한 사립대학이지만 동부에서는 수재들만 모여든다는 이공계통의 명문대학이었다. 이곳의 물리·천문학과 대학원에서 나는 그리던 천문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이 학과는 교수만 40여명, 대학원 학생이 1백20여명이라는 방대한 숫자의 인적자원을 보유, 나를 더욱 놀라게 하였다. 실험이라고는 전무(全無)한 상태로 졸업한 내 앞에 나타난 완벽에 가까운 실험장치, 연습문제를 푸는 것에 중점을 두고 정기적으로 숙제를 부과하는 강의 방법 등 경이로운 일들이 줄을 이었다. 모두가 동양의 고요한 나라에서 간 나에게는 생소하기 이를데 없었다.
나의 초기 유학기간 몇년은 그야말로 투쟁의 시기였다. 국내의 대학에서 변변히 배우지도 못했지만 그 나마 군생활이라는 기간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지식은 이미 머리에서 사라진 상태였으니 당시 나의 난감함은 극에 달했었다. 그저 어렴풋이 들은 풍월로만 남아 있었다. 그때 내가 뼈저리게 느끼고 지금도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한자를 배워도 철저히 배우라는 말이다. 아무리 박식하게 많이 안다해도 완전히 머리 속에 넣지 않으면 공백기간을 거치는 동안 모두가 사라져 버린다는 얘기다.
그 뿐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암기교육의 허구성을 여실히 체험하였다. 과학은 암기일 수가 없다. 과학에서 필요로 하는 두뇌는 창의력을 갖춘 두뇌, 연산과 추리력을 겸비한 두뇌이지 암기력을 갖춘 두뇌는 아니다. 암기교육에 훈련된 나의 두뇌를 개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과제의 문제를 푸는데 고충이 컸다.
당시의 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밤샘을 밥먹듯 했으며 코피를 쏟은 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동료 학생들과 밤을 지새면서 함께 숙제를 풀어 나가고 동이 틀때 쯤 되면 24시간 문을 여는 커피샵에 가서 학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행복했던 추억들이 그리워진다.
●─전파 천문학을 택하다
나는 천문학 중에서도 전파천문학을 전공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것은 이 대학에 ‘그린버그’라는 별과 별 사이(星間)의 물질 연구의 대가가 있었고 또 그분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천문학 연구는 대체로 관측과 이론으로 나누어 진다. 천체관측에 의해서 발견된 사실이 이론적으로 설명되어야 하고 이론과 계산에 의해서 제시된 모델이 관측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관측과 이론은 이렇듯 상호 보완의 관계를 가지고 동등하게 발전하여야 학문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체의 관측은 수천년 동안 눈으로 보는 빛의 관측에 의존해 왔다. 하지만 우리 눈이 그리 밝지 못하기 때문에 1610년 갈릴레오 이후, 렌즈나 거울을 조립해서 만든 광학망원경이 활용되어 왔다.
1932년 미국의 ‘잰스키’에 의해서 우주로 향한 창문이 하나 더 열렸다. 천체에서 발사된 전파를 포착하는 것이다. 우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전파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TV나 라디오통신에 사용하는 전파와 같다. 단지 차이점은 그 강도가 이들에 비해 10의 -20승 이상이나 약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러한 전파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접시형의 안테나와 고감도의 전파수신장치가 필요하게 된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내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전파는 성간(星間)물질의 주성분인 가스에서 나오고 있다. 성간 가스는 우리 은하계 전체 질량의 5%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여기저기에 가스구름을 형성, 새로운 별을 탄생 시킨다. 이 가스 구름내에서 태양과 같은 별, 어쩌면 지구와 같은 행성이 태어나고 있기에 성간물질의 천체물리학적인 의미가 큰 것이다.
당시는 전파천문학분야가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은 단계였다. 또한 전파망원경도 몇개 되지 않아서 이 분야의 전공이 쉽지 않던 때였다. 그래도 학계에 널리 알려진 지도교수를 두었던 덕분에 혜택도 많았다. 예를 들면 미국 국립전파천문대의 직경 43m짜리 전파망원경을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내기도 했다. 이 망원경을 이용, 나는 성간구름에 포함되어 있는 포름알데히드(${H}_{2}$CO)분자에서 방출되는 파장 6cm, 주파수 4.3기가헬즈(GHz)의 전파를 관측하게 되었다.
성간 구름에는 수소원자를 비롯, 각종의 원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 원소들은 서로 결합하여 분자를 형성한다. 성간 구름의 분자들 중에는 두개의 원자가 결합한 간단한 것에서 부터 10여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복잡한 것까지 실로 다양하다. 이 가운데는 지구상에도 흔한 물, 일산화탄소, 암모니아, 포름알데히드, 에틸알콜, 메틸알콜 등도 상당량 포함되어 있다.
이같은 여러 종류의 물질중에서 포름알데히드분자를 관측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분자는 우주 공간에 아주 흔하게 널려 있어 관측이 용이할 뿐더러 당시 논란의 초점이 돼 있었다. 은하계내 포름알데히드 분자의 분포를 파악, 그때까지 설이 분분하던 우리 은하계의 실제모습을 알아낸다는 의도였다.
과연 우주에서 들어오는 전파를 포착할 수 있을까? 당시 우주의 불과 몇 군데에서만 관측되었을 뿐인 이 분자를 내가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늘 천체에서 샅샅이 뒤져야 하는 나의 관측계획이 정말 성공할까? 만일 성공한다면 은하계의 구조를 소상히 알 수 있을텐데 하는 설레임과 두려움이 나를 감쌌다.
흥분을 감추고 도착한 곳은 산으로 첩첩이 둘러 싸인 심산유곡, 웨스트 버지니아의 미국 국립전파천문대였다. 간절했던 우주와의 투쟁, 그 결전의 날은 온것이다. 며칠 동안의 준비작업으로 인해 지친 상태에서 이윽고 망원경에 천체의 좌표를 집어넣었다. 관측을 시작한지 5분후 드디어 우주에서 들어오는 전파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비록 미약한 전파이지만 내 앞에 놓인 오실로스 코프에 전달되는 대우주의 전파는 나를 한없이 들뜨게했다. 수천광년의 우주공간을 가로 질러 수천년의 여행 끝에 지구라는 작은 행성, 그 곳중에서도 웨스트 버지니아의 산골에 위치한 조그만 안테나에 포착된 것이다.
그 뿐인가. 그 신비스런 우주전파는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난 한 젊은 천문학도 앞에 그 정체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비록 남의 나라에서 그들의 기계를 이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의 감회는 매우 큰 것이었다. 한민족의 핏줄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우주전파를 관측, 눈으로 확인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게 하고 탄성을 내지르게 하였다.
그후 이 관측결과는 나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축이 되었다. 미국 학술지에도 발표되어 은하계 구조연구에 작은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 각계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결과로 나는 독일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갈 수 있었다. 나의 독일생활은 학문연구에만 전념하던 기간이었다. 당시 그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직경 1백m인 전파망원경이 막 건설되어 있었다. 그 기념으로 세계적인 석학들이 모두 집합, 천문학 전(全) 분야의 새로운 학문과 접하게 되었고 자유스런 관측과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새로 발견된 천체로서 신비스런 맥동하는 전파를 발사하는 팔사, 수십억 광년 이상의 거리에서 우주팽창에 참여하는 퀘이사, 빛 조차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강한 중력장으로 이루어진 블랙홀, 성간 공간에서 발견되고 어쩌면 생명체의 진화에까지 연결될지도 모를 복잡한 유기화학물질 등이 논의의 대상이었다. 독일에서의 연구기간을 거치는 동안 나는 천문학에 대한 시야가 트이고 학문의 위치와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국립 천문대에서
나는 그후 미국의 앨라바마대학 교수를 거쳐 한국 천문학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공헌하고 싶은 일념에 귀국, 마침 새로 생긴 국립천문대에서 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실로 오랜 천체관측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국유사·고려사·승정원일기 등 여러 역사책을 굳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경주에 남아있는 첨성대 하나만 보아도 우리 조상의 찬란한 천체관측 업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우리의 전통이 일제통치하에서 중단, 국가적인 차원의 천체관측 전담기구가 전무했다. 그러던 중 우주시대에 대비한 천문대의 필요성이 인식되어 국립천문대를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국립천문대를 만들기는 하였으나 당시의 국내여건은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인력도 태부족이고 관측기기는 전무한 상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 소백산에 천체관측소를 건설하고 그곳에 24인치 망원경을 설치, 관측을 시작하였다. 연구원을 해외에 파견하는 등 우수연구원 확보에도 주력했다.
한 나라의 천문학 연구 수준은 인력, 또는 관측장비만으로 가늠할 수는 없다. 아무리 우수한 연구인력이 있어도 장비가 없으면 좋은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고, 고급 장비가 있어도 인력이 없으면 마찬가지 결과가 된다. 당시 우리의 입장은 장비와 인력 둘다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지난 10여년간 이 두 분야 모두를 끌어올리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 이제는 충남 대덕에 세계적인 수준의 전파망원경이 세워졌고, 인력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두곳 밖에 없던 대학의 천문·우주 관련학과도 이제 6곳 이상으로 증설, 이들 학과로부터 매년 우수한 천문학도가 배출되고 있다.
천문학은 인간의 탐욕을 없애주는 청량제와 같은 학문이다. 순수한 마음, 우주의 신비스러움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 학문연구에 밑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거의 평생을 천문학과 더불어 살았지만 학문이 나에게 가져다 준 것은 자기만족 이외에는 없는것 같다.
끊임없는 노력과 각고가 필요한 것이 학문의 길이지만 숭고한 학문이 주는 희열 또한 큰 것이다. 이는 마치 등산가가 온갖 고난 끝에 등정에 성공한 후 얻는 기쁨에 비유될 것이다.
●─강한 매력을 느낄수 있는 사람이···
천문학은 그 학문 자체에 강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만이 전공할 수 있는 분야이다. 최근 우주개발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천문학이 응용되기도 하고 인류의 미래가 우주개발에 달렸다 해서 천체가 실생활에 활용될 것을 점치기도 한다. 물론 우주와 천체의 모든 자연현상과 원리·질서를 알아내는 학문인 천문학이 인간의 미래를 밝혀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문학의 참 매력은 학문 그 자체에 있다고 믿는다.
이제 천문학은 학제(interdisciplinary)간의 성격을 가진 학문으로 발전하고 있다. 수학과 물리학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분야임은 틀림없으나 화학이나 생물학이 가미된 천문학 즉 천문화학·천문생물학·우주생물학 등이 등장하고 있다.
인간이 수천년에 걸쳐서 우주를 좀 더 알고자 노력했으나 우리의 지식은 아직도 지극히 미미하다. 우주라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도 지나지않을 게 분명하다. 내가 천문학에 입문했을 때 모르고 있던 사실이 아직도 오리무중인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그러므로 천문학은 무한한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주개발이 시작된 이래 우주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급속도로 팽창해 가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전문인력을 요구하고 있다. 대학·연구소·우주관련 산업체등에서 앞으로 다가올 우주시대에 대비, 인력확보에 나서고 있다.
불투명한 장래밖에는 내다 볼 수 없었던 내가 천문학을 시작하던 시대와는 달라진 것이다. 천문학은 학문의 성격이나 장래성으로 보아 희망이 있는 학문이다. 아울러 우수한 학생에게 도전을 추천하고 싶은 학문이다. 내역시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천문학도의 길을 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