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에 겨우 따라잡고 이제는 가장 앞서 박력있고 넓은 화면의 정밀도 놓은 텔리비전을 개발하기까지 20여년이 걸렸다. 이 21세기 TV의 원리·기능과 개발되기까지의 얘기를 더듬어 본다.
일본의 위성방송은 다른 방송을 크게 압도하면서 지금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위성방송은 BS-2b로 2파(波)를 중계하여 이루어진다. 1파(위성 제2방송)은 지상방송의 종합프로그램과 교육프로그램을 혼합한 것이다. 다른 1파(위성 제1방송)는 지상방송을 종합프로그램과 교육프로그램을 혼합한 것이다. 다른 1파(위성 제1방송)는 국제뉴스를 중심으로하여 영화 음악 등으로 구성되어 24시간 방송을 하고 있는 완전히 독립된 프로그램이다. 그러므로 젊은 사람들의 인기는 음악프로가 많은 제1방송에 집중되고 있다. 음성이 16비트 PCM(Pulse code modulation), 다이나믹 레인지 96데시벨과 CD못지않은 하이파이이기 때문이다(제2방송은 14비트 PCM, 다이나믹 레인지 84데시벨).
이런 위성방송이 앞으로 2년 쯤 지나면 크게 변하게 되었다. 1990년에 방송위성 BS-3가 발사되면 주사선수(走査線數) 1천1백25개, 애스펙트비(aspedct ratio ·텔리비전 화면의 가로 세로 비) 9대16의 하이비전(high definition television)방송이 시작되는 것이다.
세계의 가전산업계를 제패하여온 일본의 전기기기산업계가 다시 금세기 최후의 초대형 상품으로서 내놓을 하이비전은 차세대 텔리비전 방식으로 그야말로 획기적인 것이다. 약 20년에 걸친 그 개발과정과 원리를 살펴본다.
독창적인 새 텔리비전 개발을 위한 출발
NHK 기술연구소 텔리비전 연구부장 '스즈키 케이지'씨와 책임연구원 '하야시 코조' 연구원 '후지오 타카시'씨 팀이 미래형 텔리비전연구에 착수한 것은 1965년 초의 일이었다. '스즈키'씨는 그 전년에 있는 도코 올림픽땍 사상 처음으로 정지위성에 의한 미국과 일본간의 텔리비전 중계를 성공시킨 주역이다.
NHK가 텔리비전 방송(흑백)을 개시한 것은 1953년 2월 1일. 그해 8월에는 민간방송 제1호인 일본텔리비전(NTV)이 탄생하여 일본의 텔리비전 방송시대가 개막되었다.
미국에서 텔리비전시대가 시작된 것은 1941년으로 주사선수 5백25본, 30프레임/초(秒), 에스펙트비 3대4의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 방식이 표준방식이었다. 유럽여러나라는 NTSC방식에 동조하지 않고 독자규격의 PAL(phase alternation by line) 방식과 SECAM(Séquencial á ménomrire) 방식을 채택했다.
1950년에는 RCA가 섀도우마스크형 컬러브라운관 개발에 성공하여 그 다음해부터 미국은 컬러방송시대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그로부터 9년뒤인 1960년부터 컬러방송을 시작했으나 미국과의 기술격차는 아직 크게 벌어졌있었다. 일본은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그것을 단번에 좁혔다.
스즈키씨는 이때 젊은 기술진을 독려하면서 NASA가 쏘아올린 '신콤3호'를 이용하여 위성 생중계를 거뜬히 해냈던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텔리비전 기술은 유럽과 미국의 수준을 쫒아가게 되었다. 여기서 일본은 이번에는 앞서 갈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래형 텔리비전 연구를 무엇부터 착수해야 할 것인지 막연했다.
우선 유럽과 미국의 연구동향을 조사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입체텔리비전과 고정밀(高精密)텔리비전이었다. 이 두가지를 병행하여 연구하기로 했다.
얼마후 이 계획이 정식으로 승인되어 프로젝트 팀이 구성되어 작업이 시작되었다.
입체 텔리비전에서 고정밀 텔리비전으로
먼저 입체텔리비전에 도전했다. 고정밀 텔리비전은 기존기술을 개량하여 쉽게 이루어질 것 같았으며 텔리비전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입체텔리비전 쪽에 연구할 매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눈에는 어째서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연구의 출발점은 생체의 신비를 해명하는데 있었다.
인간의 눈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으로 대상물을 약간 비켜서 본다. 그 두개의 상(像)이 뇌에서 겹쳐져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좌우의 눈의 움직임을 잘 이용하면 입체화상(畵像)을 만들수가 있다. 구체적 방법으로는 오른쪽과 왼쪽의 색이 다른 방법으로는 오른쪽과 왼쪽의 색이 다른 안경을 쓰고 오른쪽 눈으로만 본 상과 왼쪽 눈으로만 본 상을 짜 맞추면 뇌는 입체물로 착각한다. 이것은 현재로 입체화상의 원리로 통용되고 있으며 85년의 츠쿠바 과학박람회에서 인기를 모은 입체화상도 이 기본원리를 정리하여 이용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방식만으로는 미래형의 첨단 텔리비전이 될 수가 없었다. 시간은 자꾸 가고 좀처럼 활로가 뚫리지 않았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뽀족한 수가 없었다. 드디어 포기할 단계에 이르렀다.
입체텔리비전은 포기하고 고정밀 텔리비전으로 전환했다.
고정밀 텔리비전이란 브라운관의 화소(畵素·picture element·텔리비전이나 사진전송에서 화면을 전기적으로 작은 면적으로 분해한 최소의 면적)를 좀더 작게하고 수를 늘려 섬세하게 비치게하는 방법이다. 당시의 컬러브라운관의 화소수는 22인치형이 약 37만개였다.
화소는 작으면 작을수록 좋고 수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텔리비전 전파에 실릴 수 있는 정보량에 제약이 있으므로 어느정도 선에서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이 당면과제가 되었다.
연구개발팀은 8cmx10cm 크기의 필름으로 찍은 풍경사진을 컴퓨터로 화상처리하여 화소가 거치른 것에서 섬세하고 치밀한 것까지 여러종류의 사진 패널을 만들어 품평회를 가졌다. 그결과 이정도라면 하는 타협점이 떠올랐다. 화소수가 약 1백85만개로 종래의 브라운관의 약 5배였다.
텔리비전은 가까이서 보면 가로 방향으로 수많은 선이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주사선이라 하며 그위를 브라운관의 전자총이 쏘아낸 전자빔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 브라운관의 뒷면에 칠해놓은 형광체가 빛나면서 화상을 만들게 된다. 컴퓨터 화상처리로 만든 약1백85만개의 화소에서 역산하면 주사선수는 ${2}^{10}$=1024본이 필요하다. 또 1천24본 이상의 주사선이 있으면 앞으로 컴퓨터와 도킹할 수도 있다. 아직 컴퓨터산업자체가 초보단계였던 이 시기에 연구팀은 컴퓨터와의 결합을 다음세대 텔리비전의 중요한 개념으로 생각한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NTSC방식은 주사선수가 5백25본이다(유럽방식은 6백25본). 그러나 텔리비전화면상의 실제수는 그95%인 약 5백본이다. 따라서 텔리비전 화면에 실제수롤 1천24본 이상의 주사선을 내기 위해서는 그만큼 상승시켜야 한다. 연구팀은 여기에 1백본 정도 더 올려 1천1백25본을 고정밀 텔리비전의 주사선수로 정했다(그뒤 주사선 실수의 규격은 1천35본으로 정해졌다).
할리우드 영화를 기초로
이렇게하여 고정밀 텔리비전의 주사선수는 정해졌다. 그러나 일부에서 클레임을 걸어왔다. 그중에는 인간심리와 시각·청각관계의 연구로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사람도 있었다.
"확실히 깨끗한 화면이다. 그러나 그림엽서 같이 깨끗하고 아름다울 뿐 박력이 없다"
이것이 클레임을 건 이유였다. 예리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연구팀도 그점을 알고 있다. 단순히 섬세하고 치밀한 것만이 아니고 박력도 있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미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면을 넓게하면 박력이 생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영화의 역사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연구팀은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화기술 전문서와 영화기술잡지 논문들을 입수하여 광범위하게 검토했다.
35mm 영화의 애스펙트비는 4대5이다. 그리고 시네마스코프는 1대 1.75~2.35이다. 애스펙트비가 일정하지 않은데다 어째서 화면을 넓게한 것인지 이론적인 뒷받침이 분명치 않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정체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화면의 와이드화를 시도한 것이 성공했을 뿐이다.
와이드화의 이론적 근거는 해명되지 않았으나 화면을 넓게하면 박력이 있을것같다는 것만은 확인되었다.
연구팀은 다시 여러가지 애스펙트비의 사진패널을 만들어 품평회를 가졌다. 시각효과는 심리적 요소가 크므로 될수있는 대로 많은 사람의 의견을 모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결과 애스펙트비 3대5가 가장 좋다는 결론이 나왔다(그뒤 변경되어 현재는 9대16이 되었다).
이렇게하여 프로젝트팀의 다음세대 텔리비전 개발목표가 '고정밀화+와이드화'로 구체적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고품위(高品位)텔리비전'이라는 호칭이 정식으로 정해지고 개발기간도 10년으로 설정되었다(호칭은 그뒤 하이버전으로 바뀌었다).
하이비전을 향한 전진
하이비전개발에 있어서의 구체적 기술과제로 카메라 디스플레이, VTR, 필름·비디오변환시스팀, 대역압축(帶域壓縮) 등이 설정되었다.
고정밀화상을 실현하기 위해 카메라개발을 담당한 기술진은 처음에 2인치용 대형촬상관(撮像管·텔리비전 송상장면을 일정한 텔리비전방식에 적용하여 전기적 화상신호로 변환하는 기능을 가진 전자관의 총칭)을 제작하기로 했다. 74년에는 일단 고정밀화상용의 카메라도 완성했다. 그러나 정지된 화면은 대단히 섬세하고 치밀하게 비쳤으나 움직임이 빠른것은 잔상(殘像 ·afterimage)이 남았다. 촬상관이 크기 때문에 광전면(光電面 ·빛의 강약이 전류의 강약으로 바뀌어 비치는 면)이 전하(電荷)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자기(磁氣)테이프 개량이 진전되어 방송용비디오는 1인치가 주류로 되어갔다. 그리고 1인치용 촬상관을 개발하게 되어 종래의 것과는 동작원리가 전혀 다른 DIS타이프의 촬상관이 개발되었다. 이것은 그뒤 80년에 완성되었다.
이렇게하여 빠른 움직임도 섬세하고 치밀하게 찍을 수 있게 되었으나 여전히 난점은 그대로 남았다. 현행 텔리비전용의 카메라에 비해 감도가 3분의1 정도 낮기 때문에 많은 광량(光量)이 필요한 점등 촬영조건이 어려웠던 것이다. 야외에서는 맑은날이 아니면 촬영할 수 없고 스튜디오촬영의 경우도 조명을 웬만큼 밝게하지 않고는 카메라의 초점을 맞출 수 없어 섬세하고 치밀한 화상이 되기 어렵다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문제는 그뒤 87년 1월 히다치제작소와 공동으로 새로운 고감도촬상관계개발에 성공하여 해결되었다. 이 촬상관은 빛을 전기로 바꾸는 엷은 막에 높은 전압을 걸어 생기는 '애벌랜쉬'(avalanche·전자사태) 증폭작용에 의해 하이비전으로서의 높은 해상도(解像度)를 가지면서 잡음을 늘리지 않고 높은 감도를 얻을 수 있는 HARP방식으로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하여낸 것이다. HARP방식은 입사(入射)된 빛에 의하여 아모르포스(非晶質·amorphous)의 엷은막(光導電膜)에 발생한 전자를 높은 전압을 걸어 사태(沙汰)식으로 늘려주는 방식이다. 이로써 아침 저녁등 광량이 부족한 옥외장면이나 극장무대 등의 촬영도 가능하여졌고 또 카메라의 렌즈도 한껏 조를 수 있어 초점심도(深度)가 깊은 화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 하이비전용 VTR은 1인치 C타이프를 베이스로 개발(소니에서도 NHK기술연구소와는 별도로 개발)하고 영화의 필름을 하이비전비디오로 변환하기 위한 '레이저 텔리시네'도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다.
이런 기술적 과제는 회로를 개량하는 것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거의 메이커의 협력을 얻을 필요가 없이 NHK 기술연구소가 독자적으로 개발하였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은 브라운간 개발이었다.
브라운관은 40인치로
1972년 NHK연구팀은 카와자키에 있는 마츠시타기술연구소(마츠시타전기 계열기관)를 찾아갔다. 이곳의 연구스탭에는 NHK기술연구소 출신이면서 브라운관 전문가가 있었다. NHK팀은 고정밀 텔리비전용의 '섀도우 마스크'(Shadow mask)를 시험제작하여 줄것을 부탁했다.
섀도우마스크는 수많은 작은 구멍이 있는 엷은 금속판으로 전자총에서 발사된 전자빔이 이 구멍을 빠져나가 브라운관의 형광체를 빛나게 한다. 따라서 브라운관의 화소를 비약적으로 증대시키는데는 섀도우마스크의 구멍을 훨씬 작게하고 그 구멍의 간격을 대폭으로 좁힐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구멍을 작게 하면서 전자빔의 투과율(透過率)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금속판을 훨씬 엷게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자빔의 입사각(入射角)이 커지면 구멍의 가장 자리에 맞아 튀어 되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츠시타기술연구소의 시작품은 실패작이었다. 전자총에서 방사된 전자빔이 거의 형광면에 도달하지 않았다. 70~80%가 섀도우마스크에 차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또 높은 에너지의 전자빔이 격돌하기 때문에 금속란이 열을 내게 된다. 금속판이 어느정도 두꺼우면 별 문제가 없으나 엷게하면 '도밍현상'이라하여 금속란이 돔(dome) 처럼 부풀어 버린다. 그결과 구멍의 위치가 어긋나거나 전자빔이 빠져나가기 어려워지거나 하여 형광체를 충분히 빛나게 할 수가 없게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마츠시타전가공업의 영상관개발부에서는 다시 시작품 제작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거뜬히 성공했다. 종래의 섀도우 마스크 핏치 0.66mm의 반 이하인 0.3mm의 파인핏치 마스크를 개발하여 22형 브라운관에 조립한 것이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주사선 1천 1백25본에 상당하는 고정밀화상을 낼수있게 된 것이다. 연구팀은 이순간 환성을 지르면 기뻐했다. 그것이 1973년의 일이었다.
고정밀화상은 내게 되었으나 브라운관 자체는 종래의 형 그대로이며 와이드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와이드 브라운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브라운관의 밸브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연구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사히초자에 30인치의 가로로 긴 밸브를 주문했다.
이렇게하여 애스펙트비 3대5의 30인치 브라운관 밸브를 겨우 마련했다. 그리고 이 밸브로 다시 마츠시타전자에서 하이비전용 브라운관을 시험제작했다. 22인치 고정밀 브라운관의 시험제작으로부터 5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밸브를 포함하여 이 개발에 든 비용 약 1억5천만엔(한화환산 약 9억원)은 마츠시타측이 그 반을 부담했다.
하이비전 30인치 브라운관 테스트는 무사히 끝났으나 아직 문제는 남아 있었다. 30인치로는 아직 박력을 충분히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40인치 정도의 크기가 필요했다.
NHK 기술연구소의 에스펙트비를 결정하는 사진품평회때 화면 크기에 대한 의견도 모았다. 이때 40인치 이상의 큰 화면이 아니면 하이버전의 박력을 충분히 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면 왜 연구개발팀은 30인치 브라운관을 시험제작하도록 했는가. 그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옛날에는 가정용 텔리비전 브라운관이 가끔 파열하여 신문에도 나고 했는데 파열 않는 강도(强度)등으로 계산하면 30인치 텔리비전은 1t 가까운 무게가 된다. 그러므로 30인치가 브라운관 텔리비전의 한계일 것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화면을 박력있게 하려면 40인치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무리다. 그래서 하이비전방송의 결정판은 벽걸이텔리비전이 될 것이라고 내다 보게 됐다"
벽걸이텔리비전의 아이디어는 액정식(液晶式), 형광표시판식, 발광다이오드식 등 그전부터 여러가지로 시도되어 왔으나 현재는 플라즈마 디스플레이를 결정판으로 보고 있다. NHK기술연구소도 87년 6월 20인치의 디스플레이를 시험제작하여 세계에서 처음으로 컬러텔리비전 화상표시에 성공하였다.
연구팀은 벽걸이텔리비전을 하이비전 방송의 목표로 잡고 있었으나 30인치 브라운관으로 하이비전을 시험하여 개발에 한층 박차를 가하려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시작품을 살펴보니 당초에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벨브만으로 50kg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브라운관으로도 40인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30인치를 시험제작하는데 1억5천만엔이 들었으므로 40인치는 그 3배인 4억5천만엔(한화환산 약 27억원) 정도가 들것이라 생각되었다.
츠쿠바 과학박람회를 계기로
40인치 시험제작을 위한 예산을 확보할 길이 없어 연구진이 고민하고 있을때 생각지도 않던 낭보가 날아들었다. 츠쿠바과학박람회의 프로젝트로 채용되면 정부예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각 40인치 하이비전 개발을 츠쿠바과학박람회에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그렇지만 정부예산으로 개발하는 것이므로 1개 회사를 지명하여 발주할 수는 없엇다. 그래서 아사히초자가 만든 40인치용 밸브를 마츠사타 토시바 미츠비시전기 등 3개회사에 공급하여 각 회사의 40인치 설계로 시작품을 만들게 했다. 이렇게하여 85년에 개최된 츠쿠바과학박람회에 3개사가 각각 별도로 제작한 40인치 대형 하이비전이 출품되었다.
그러나 시험제작 하이비전으로 실험하여본 결과 여러가지 문제점이 나타났다. 음향효과도 그중 한가지이다.
현재의 텔리비전은 화면이 작고 스피커가 영상과 바로 가까이에 있는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화면에 비친 사람의 소리는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들린다. 따라서 영상과 음향의 방향이 달라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하이비전은 가로가 길고 화면도 크기 때문에 화면의 중심측 위에서 볼 때를 제외하고는 영상과 음향의 방향이 틀리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음향청각 실험을 거듭한 결과 앞쪽에 3개 뒤쪽에 1개씩 스피커를 배치하는 3-1방식 4채널 스테레오 시스팀이 고안됐다.
이렇게하여 하이버전 연구개발은 순조롭게 진전되어 갔으나 실제로 방송하는데는 또 하나의 애로가 있었다. 주사선을 대폭 늘리고 거기다 화면을 넓게 하면 전파에 실려야할 정보량이 현행 텔리비전의 5배로 늘어나게 된다. 도로로 말하면 20m 폭을 단번에 1백m 폭으로 넓히는 것 같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전파가 과밀상태가 되어있는 오늘날 전파관리당국이 승인할리가 없다. 하이비전은 1990년에 일본이 쏘아올릴 방송위성 BS-3을 이용하여 방송할 예정인데 하이비전이라하여 특별히 넓은 전송대역(傳送帶域)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현행 텔리비전신호를 압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연구가 필요했다.
그 대역압축이란 그대로는 넓은 전송대역이 있어야하는 화상신호를 어느 정도 솎아냄으로써 좁은 대역에서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예를들면 최근에 화제를 모으고 있는 텔리비전전화과 같은 것, 흑백의 정지화상타이프이지만 통상 전화회선의 전송대역을 쓸수 있도록 되어있다. 일본국제전신전화(KDD)에서는 이미 컬러의 동화용(動畵用)을 개발했고 후지츠나 일본전기에서도 디지틀 기술을 구사한 컬러 동화 텔리비전전화를 시험제작하고 있다. 그러나 ISDN(종합 디지틀 통신 서비스망)대응의 전송대역으로 1초간에 몇장면의 화상밖에 보낼수 없으므로 표준속도 이하로 촬영한 영화처럼 움직임이 어색하다.
텔리비전의 경우는 화면이 아름답고 커져도 움직임이 어색하면 치명적이다. 텔리비전 화상은 1초간에 30프레임이다. 그것을 5분의 1로 압축하면 1초간에 6프레임이 된다. 그렇게되면 표준속도 이하로 촬영한 영화와 마찬가지가 된다.
화면을 가늘게 분할하여 조금씩 솎아내보면 어떨까. 이 아이디어를 연구팀이 착안한 것은 82년이 저물 무렵이었다.
어떤 기술도 정확한 방법론만 확립된다면 완성을 향하여 급속도로 달려가게 된다. 이 경우도 그러했다. 화면분할 아이디어에 착안한지 1년 뒤에는 세분화한 화면 4분의1씩의 화상신호를 전파에 실어보내는 뮤즈(muse)방식이 완성되었다. 이것으로 20메가헤르츠의 하이버전 신호가 반 이하인 8메가헤르트라는 대역폭으로 보낼 수 있게 압축된 것이다.
1984년 9월 런던교외의 브라이튼에서 열린 IBC(국제방송기술회의)에서 이 뮤즈방식이 발표되었을 때는 NHK가 세계 텔리비전 기술의 정상에 있음을 세계 각국 텔리비전 기술자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없었다.
도쿄올림픽 때까지는 외국기술의 도입과 그것을 뒤쫓아가는데 시종하고 있던 일본의 텔리비전기술이었으나 20년 뒤인 오늘날 NHK기술연구소가 개발한 하이비전이 다음세대 텔리비전의 국제규격으로 제시되어 미국이나 캐나다도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럽은 현행방식과 호환성(互換性)이 있는 주사선 1천2백50본, 25프레임 방식을 개발하려 하고 있다.
국제표준 규격화를 일본이 리드한 것은 NHK의 하이비전이 역사상 처음이다. 그리고 이제 바야흐로 하이비전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