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되던 해 4월에 옛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니 지금부터 43년전 일이다. 기계공학과 인연을 맺어 온 햇수가 바로 해방 후 흐른 세월과 일치하는 셈이다. 요즈음과 달라서 당시에는 대학에 들어가기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무척 힘들었다. 얼마전 서울대학교에서 서울대공과대학사를 간행한 적이 있는데 마침 해방전의 약사를 필자가 담당한 관계로 새삼 그 당시의 자료를 조사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리하여 해방전에 국내의 전문학교나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한국인수가 47명(해방전 졸업생수)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 공작과 장난감에 미친 어린시절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은 한국인에게 대학의 문호를 엄격히 제한하였으며 그중에서도 기계공학교육에 대하여 인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의 기계공학과에 내가 입학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무척 행운이었다고 여겨진다.
당시의 제국대학이라는 것은 그 전단계로 대학예과과정이 있어 실은 그 2년전에 이 예과에 먼저 입학했던 것이다. 예과과정에서는 이공학부로 진학할 반은 이과갑류로 불리웠으며 전공구별없이 2년간 물리 화학 수학 어학 교양과목 등의 공통준비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기계공학을 선택하는데 2년간이나 신중히 생각해 볼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 점이 요즈음의 고등학교학생들보다는 다소 전공선택에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유리한 점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려서부터 장난감에 미쳐있던 나는 어머니를 어지간히 졸라댄 것으로 집안에서 유명했다. 따라서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공작 등에 흥미를 가졌었다. 그러나 이러한 취미를 직업에까지 연관시켜본 적은 없었다. 중학시절까지도 막연히 법과나 의과에 가려니 생각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 당시 한국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진출한 분야가 그 두분야이었으므로 나도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방향을 바꾸어 본격적으로 이공계로 마음을 돌린 것은 경기중학 4년때였다. 4학년때 급장을 맡아보면서 차츰 자기 적성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가졌던 법과에 가려던 막연한 생각은 차츰 자신의 성격을 생각하면서 바뀌어지기 시작했다. 법과에 가봐야 그 당시 체제하에서는 결국 일본인밑에서 그들의 시중이나 드는 도리밖에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미 중학 4학년쯤 되니 일제식민지하의 우리처지가 차츰 견딜수 없는 슬픔과 절망감으로 느껴져오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 식민지의 슬픔과 절망을 이기고
마침 그 당시의 교장은 우리들에게 이공계로 많이 진학할 것을 열성적으로 권고하고 있었다. 일본인교장은 물론 자기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어 그런 것이지만 나는 이공계로 진학하는 것이 내 적성에도 맞는것 같았다. 또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 우리가 일본보다 서양의 과학기술문명을 흡수하는 데 뒤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도 늘 있었기 때문에 이공계로 진출하는 것이 법과나 여타 어느 분야에 가는 것보다 훨씬 뜻있는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경성제국대학에서의 공부는 전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한시간의 휴강도 없는 강행군으로 4개월반을 계속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당시 기계공학과 1학년은 16명인데 한국인은 모두 4명뿐이었다.
해방을 맞이하자 교수나 직원이 모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소수의 한국인 학생들만이 남게 되었다. 해방직후의 치안공백기에 나는 서울에 집이 있는 극소수의 학우들과 학도대의 일원으로 이공학부교사(현 경기개방대학)를 한달 가까이 지킨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아픈 것은 9월 8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이공학부교사를 미육군야전병원으로 접수하는 와중에 이공학부소장의 모든 실험기자재를 길가에 내버려두어 결국 거의 모두가 상실되어버린 일이다. 당시 군정청도 채 들어서기전의 과도기라 사회문제가 될 여지도 없이 잊혀져버린 사실이지만, 이를 지켜보며 발을 구르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비통한 것이었다.
해방 이듬해에 경성대학 이공학부가 발족되어 약간의 우리 교수진과 기존재학생과 편입학생들로 학교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수가 태부족이었고 실험실습은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물론 교수들이나 학생들의 공부하려는 의욕은 매우 높았었다.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헌 책 중에 쓸만한 전공서적을 헌책방에서 뒤지며 찾아내는 것도 이 무렵의 학생들의 일과의 하나였고, 방학중에도 교수님댁의 온돌방에서 무릎을 맞대고 윤강을 하며 공부하던 생각이 엊그제같이 떠오른다.
●-학문의 토대는 합리성
그뒤 서울대학교가 발족되어 경성대학도 이에 흡수되자 나도 여기서 2년을 더 공부하고 48년 8월에 졸업을 하였다. 결국 나는 학교이름이 세번이나 바뀌는 역사적 과도기에 대학생활을 보낸 셈이다. 비록 배운 양이 많지는 않았으나 민족이 해방되는 그 벅찬 감격의 시대를 전후하여 대학생활을 보낸 탓으로 나의 대학시절은 의욕과 좌절과 낭만이 뒤엉킨 인상적인 추억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대학졸업당시는 학사의 길보다도 직접 기계공업의 현장에 진출하여 우리의 기계공업건설의 일선에서 활약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1948년의 우리나라는 겨우 미군정이 종식되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무렵이어서 나의 희망이 충족될 직장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소위 적산공장들이 더러 있었으나 거의 조업중단상태였고 겨우 산업부흥기운이 움트려 할 때 6.25동란이 발발하였다. 동란중 나는 진해해군공창(工廠)에서 기술장교 복무를 하던중 액체산소플랜트의 건설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 때 자기가 아는 지식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실감하게 되었고 기계공학에 대하여 보다 깊은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당시는 전시라 민간산업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기계공학도에게 진해공창은 다시없는 좋은 실습기회를 제공하여 준 셈이다. 나는 여기서 기계공장주임, 함정검사관, 기계설계과장 등의 직책을 맡아가며 약 2년반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1954년 인하공과대학이 창설될 때 나는 전임강사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기계공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깊이 연구하려던 희망이 실현되는 계기를 얻게 된 셈이었다.
이 대학에서 약 4년남짓 근무하다가 1958년 10월에 국비유학생으로 서독의 뮌헨공과대학에 1년간 유학을 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대학에서 담당한 과목은 공업열역학과 증기원동기(증기보일러, 터빈)였다. 뮌헨공대 기계공학과에는 쟁쟁한 석학들이 많았지만 특히 내가 지도를 받은 '슈미트'(E. Schmidt)교수는 열역학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었다. 패전후의 독일이었으나 2차대전전까지 세계에서 으뜸가는 공학을 자랑하던 독일이라 그 공학의 교육과 연구의 전통은 여전히 맥맥히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점이 감동이었다. 강의나 실험, 연습, 연구실에서의 연구수행 실태 등 모든 면에서 사소한 점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이고 불합리한 구석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실로 놀랍기조차 하였다. 독일의 공학이 그렇듯 영광을 누린 것이 바로 이 합리성과 근면성에서 비롯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나는 하나하나의 구체적 지식보다도 서구선진국들이 기계공학을 연구하는 자세, 방법에 관심이 있었다. 한가지 기뻤던 것은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생각했던 것들, 예컨대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각종 교육보조장치 같은 것들이 이미 독일에는 활발히 이용되고 있음을 발견한 때였다. 이런 것도 합리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독일이나 한국이나 합리성에는 국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몸소 깨달은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도 결국 합리성의 기반위에 구축된 것이므로 이러한 깨달음은 기계공학전반의 연구자세, 연구정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이 유학 1년간은 나에게 기계공학연구에 대한 어떤 자신감 같은 것을 키워준 중요한 계가기 되었다. 1년후 나는 슈미트교수로부터 계속 남아 연구를 계속하도록 권유를 받았으나 인하공대학장(고 최승만선생)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귀국하였다.
●- 공학의 중심에 위치하는 기계공학
여기서 잠시 기계공학의 역사를 더듬어보고 그것이 산업발전 나가아 인류문명발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자.
영어로 공학을 엔지니어링(engineering)이라 하는데 이말의 어원은 엔진(engine)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엔진이란 말할 것도 없이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된 제임스와트의 증기기관(steam engine)을 가리킨다. 현대의 기계문명은 산업혁명이후 급속도로 발달되어온 기계기술이 촉매역할을 하여 이루어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산업혁명으로 인간은 가축과 도구대신 기계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생산력을 급증시켰으며, 인간사회 그 자체가 기계화되어 복잡한 사회기구를 탄생시켰다. 산업사회라 일컬어지는 오늘날의 사회기구가 그 본질에 있어 기계문명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은 정보화사회라 흔히 근자에 불리우는 미래사회형태에서도 크게 변화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최근에 등장한 많은 첨단기술들도 역시 기본적인 기계기술의 토대없이는 크게 발전하기 어렵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첨단기술들을 발전시키는 데도 기계기술의 지원역할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학은 많은 분야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대로 기계공학은 공학이라는 어휘의 탄생에 직접 관여할 만큼 제반 공학의 중심에 위치한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날의 모든 경제활동을 비롯한 인류사회의 여러기능이 기계없이 잠시도 영위될 수 없음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보통 기계산업이라 할 때 자본재, 소비재를 막론하고 모든 기계, 기구의 생산에 관련되는 산업을 말하기 때문에 그 범위는 매우 넓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일반기계 전기기계 수송기계 정밀기계 병기로 대별한다. 일반기계는 다시 일반산업기계(보일러 원동기 토목건설기계 화학기계 등) 농업용 기계기구 금속공작기계 금속가공기계 섬유기계 사무용기계 등으로 나뉘어진다. 전기기계는 다시 발전용 원동기 회전전기기계 정지전기기계 민생용 전기기계(전열용품 전기냉장고 등) 통신기 전자기기 등으로, 또 수송기계는 자동차 산업차량 철도차량 선박 항공기 등으로, 정밀기계는 광학기계 시계 등으로 나뉘어진다.
●- 설계와 제조에 큰 비중
기계공학은 이렇듯 광범한 기계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학문이니만큼 그 다루는 내용도 매우 광범하다. 기계의 종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많으며 각기 다른 기능과 용도를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인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통적인 특성을 체계적으로 분석, 연구하는 것이 기계공학이라 할 수 있다. 공학이 과학과 다른 점은 과학이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진리를 찾아내는데 목적이 있는데 반해 공학은 과학이 찾아낸 진리를 이용하여 인류에기 유익한 어떤 구체적인 물건을 창조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기계공학의 목적은 인류에게 유익한 새로운 기계를 창조하는데 목적이 있다 하겠다.
기계공학의 내용을 좀더 학문적으로 정의하면 "기계나 이에 관련된 장치·설비의 설계 제작 운전 등에 대하여 기초적 및 응용적 분야를 연구하는 공학의 한 분야"라고 말할 수 있다. 기초적인 것으로는 열역한 유체역학 재료역학(또는 고체역학) 재료학 기계역학 기구학 기계설계법 기계제작법 등이 있고, 응용적인 것으로는 내연기관학 증기동력학 수력기계학 공기기계학 공작기계학 교통기계학 산업기계학 측정법 기계제어학 등이 포함되다.
이상은 전통적인 기계공학의 각분야를 열거한 것이나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과 보조를 맞추어 그 내용과 분야는 끊임없이 변천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기계공학의 목적이 결국은 새로운 유익한 기계의 창조에 있느니만큼, 설계와 제작은 기계공학연구에서 특수한 위치와 의의를 차지한다.
위에서 열거한 어떤 분야의 연구도 궁극에는 설계와 제작에 관련을 맺게 된다는 것은 기계공학이 여타 공학과 구별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개별적인 세부분야의 연구가 아무리 충실하여도 그 단독으로는 실제로 우수한 기계를 창조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하나의 우수한 기계라는 작품을 창조하는데 위에서 말한 기계공학의 각분야의 지식이나 연구성과가 고른 수준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작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대의 문명이기라 할 수 있는 고급의 기계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대한 기계공학의 지식축적과 경험을 통하여 창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제3세계의 후진국들에게서 기계공업의 발달을 저해하는 핵심적 원인이라고 보인다. 물론 기계공업의 발전은 기계공학의 뒷받침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제반조건이 기계공업의 육성을 뒷받침하여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여건이 충족되더라도 그나라 고유의 기계공학의 축적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최근 기계공업이 상당히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여 자동차공업의 신장에서 보듯이 상당히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해방당시부터 우리의 기계공업을 지켜보아온 나로서는 가끔 꿈과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10년전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우리 자동차공업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 자영업 성공사례 많아
기계공학도들의 활동분야를 살펴보면 우선 그 범위기 대단히 넓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기계공업뿐아니라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기계기술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로 현장기술자로 활약하는 길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기계공학전공자는 이 길로 들어선다. 현장기술자는 다시 기업내에서도 진로에 다소 차이가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기계기술의 전문가가 되는 길이며 일부는 관리직에도 발탁되어 최고관리직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 선진국의 예로 보아 우리나라도 공업화가 진행될수록 이러한 가능성이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현장기술자로 출발하여 결국 기업을 스스로 일으켜 자영하는 길이 있다. 서독의 중소기업에는 박사학위를 가진 기업주가 상당히 많으며 각가 특수제품의 제조업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 청소년들도 생각해 볼만한 길이다.
세째로 개발연구자로 진출하는 경우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계공학의 응용에는 매우 넓은 단계가 있다. 기계공학의 응용분야에서의 연구결과를 실제 기계제품의 창출, 개발에 직접 활용하는 연구자들이 앞으로 갈수록 많이 소요될 것이다. 현재 이미 대기업에서는 자체의 연구소들을 만들어 이러한 연구자들을 배치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 경우 석사학위정도의 학력이 요구된다.
네째로 대학교수와 같은 순수한 학문적 연구에 전념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공학자체가 순수과학과 다르므로 대학교수도 응용적 연구를 할 수 있으나, 역시 제반여건은 기초연구에 적합하다고 보아야 한다.
다섯째는 기타 기술공무원, 세일즈엔지니어 등을 꼽을 수 있다.
기계공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은 수학 물리 등의 기초학력도 단단하여야 하겠으나, 공작 등에 취미가 있거나 기계를 좋아 하는 학생이 더욱 적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학문적 전통 쌓아야
지금까지 기계공학의 외길을 걸어오면서 이 분야에서의 석학들도 여럿 만났다. 그들로부터 느낀 점으로 무엇보다 귀중한 것은 세계적 석학의 빛나는 업적이 모두 노력의 결과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이다. 그러나 또하나 중여한 것은 학문적 전통의 귀중함이다. 일찌기 뉴턴이 "자기의 업적은 오직 거인의 어깨에 걸터앉아 좀 더 멀리를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여기서 거인이란 선인들의 업적, 바꾸어 말하면 학문적인 전통을 가리키는 말이다. 40년을 기계공학연구의 길을 걸어오며 항상 아쉽게 느껴온 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어 이 학문적 전통이 모자란다는 점이다. 이를 보완하는데 미력하나마 다소의 보탬이라도 되고자 했던 것이 나의 살아온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기계공학의 중요성이 국민들에게 보다 널리 인식되어 유능한 청소년들이 이 분야로 들어와 우리의 기계공업을 보다 힘차게 발전시켜주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