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현
한화시스템
전자광학연구소 수석연구원
학력
대전 성모여고
이화여대 물리학과 학사
전북대 물리학과 석사
KAIST 물리학과 박사
“어떡하죠. 실험실을 취재하려면 국방부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전화 너머로 기자를 당황케 하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김서현 한화시스템 수석연구원과 인터뷰 일정을 잡기 위한 통화에서였다.
연구자가 어떤 연구를 하는지, 또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당연히 그 사람의 실험실이다. 실험 장비를 직접 한 번 보는 것이 백 마디의 설명보다 빠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연구자들이 자신의 실험실을 소개하는 걸 기꺼이 환영하지만, 아주 가끔 여러 이유로 실험실을 방문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번에는 그의 연구 분야가 군수품을 다루는 방위 산업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기밀 유지가 필수인지라 실험실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여러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고민 끝에 그가 2014년 박사학위를 받은 KAIST의 실험실에서 접선(?)하기로 했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는 온다
흔히 ‘방산’이라고 줄여 말하는 방위 산업은 국가 방위에 쓰는 군수품을 생산하는 모든 산업을 일컫는다. 전차나 미사일 같은 무기, 레이더나 무인기 같은 감시 시스템 등의 군수품은 전쟁 시 국가의 사활이 걸린 만큼 첨단 기술들이 집약돼 있다.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상당수의 군수품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추고 있는 동시에 첨단 기술을 적용할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김 수석연구원이 개발하고 있는 전자광학장비다.
대표적인 군사용 전자광학장비로는 열상감시장비(TOD)가 있다. 열상감시장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체의 열(적외선)을 감지해서 영상으로 보여주는 장비다. 공항에서 출입국할 때 승객들의 체온을 감지하는 열화상카메라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군사용 열상감시장비는 어두운 밤에 빛을 증폭해서 보는 야간투시경보다 관측 거리가 길어서 적을 탐지하는 데 유용하다. 그래서 주로 전차나 장갑차에 장착되거나 해안선에 배치된다.
김 수석연구원이 처음 설계한 전자광학장비도 우리나라 국군 주력 전차인 K-1의 전차장조준경(CPS)에 장착된 열상감시장비다. 김 수석연구원은 “2001년 입사해서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 설계한 대로 조립하고 완제품의 성능을 평가하는 일 등을 했다”며 “틈틈이 설계하는 방법을 배우며 입사 3년이 지났을 무렵, 처음으로 열상감시장비를 설계부터 최종 성능 평가까지 독자적으로 진행했다”고 말했다.
최근 김 수석연구원은 국방과학연구소와 함께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군사용 초분광카메라를 개발하고 있다. 초분광카메라는 사물이 반사하는 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해 형태나 소재 등을 알아낼 수 있는 카메라다.
예를 들어 무인기로 적군 탱크의 정체를 파악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적군의 탱크 중에는 진짜인 것도 있지만 나무나 풍선으로 만든 가짜 탱크도 있는데, 기존의 가시광선이나 적외선 카메라로 상공에서 관측하면 이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진짜 탱크와 가짜 탱크는 소재의 화학적 특성에 따라 반사하는 빛의 스펙트럼이 다르기 때문에, 초분광카메라로 스펙트럼을 10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단위로 쪼개 분석하면 어느 것이 진짜 탱크인지 구분할 수 있다.
초분광카메라는 2011년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인 알카에다의 지도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 제거 작전 당시 미군이 사용해 유명해졌다. 가짜 지폐, 가짜 미술품을 구분할 수 있는 등 활용도가 높지만, 그간 국내에서는 연구만 이뤄졌고 실제 생산된 적은 없다.
김 수석연구원은 “앞으로 우리 군에서도 초분광카메라가 사용될 것으로 생각하고 2010년 초분광카메라를 연구하던 KAIST 물리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 4년간 연구했다”며 “실제 산업 현장에서 초분광카메라를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부터 성능 검사까지의 과정을 최적화하는 연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박사과정을 마쳤을 때 마침 정부에서 초분광카메라 개발을 시작했고, 이를 김 수석연구원이 맡아 진행하게 됐다. 현재는 응용 연구까지 마치고 무인기 같은 군수품에 적용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같은 고민 나눌 수 있는 선의의 경쟁자 필요
김 수석연구원의 이력은 독특하다. 군 복무가 의무가 아닌 여성이고, 군대라는 집단과 별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19년 간 방산 분야에서 활발히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중학교 때부터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고 잘하기도 했어요. 과학반 활동을 하면서 친구들과 수학, 과학 문제를 풀곤 했는데, 이때 자신감과 흥미도 더 높아졌죠. 특히 물리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왠지 더 끌렸어요.”
그렇게 대학원까지 진학해 미성숙적혈구를 분리하는 의료용 장비를 연구했던 그는 뜻밖에 방산 연구 기업에 입사했다. 김 수석연구원은 “전자광학 연구원을 원하는 기업은 많은데 배출되는 인원은 적다 보니 전자광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이 있다면 활용 분야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 편”이라며 “방위 산업의 장점은 국가 산업인 만큼 부침이 있는 상업용 카메라 렌즈 분야보다는 연구를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별 탈 없이 입사까지 달려왔는데, 정작 연구가 아닌 다른 부분에서 큰 고민에 빠졌다. 그를 제외하고는 주변 연구원들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이었다. 여고와 여대를 다닌 덕분에 학창시절에는 자신이 소수라고 느낀 적이 없었지만, 입사한 뒤에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한 부서에 50~100명의 연구원 중 여성 연구원은 거의 항상 그 혼자였기 때문이다. 여성이 많지 않다 보니 여성을 위한 제도나 문화 역시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김 수석연구원은 “남자 연구원들과도 교류가 많았지만,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나눌 때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며 “때로는 고립된 섬 같다고 느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심리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부서의 여성 연구원들이나 다른 기업에서 연구하는 대학 선후배들과 모임을 만들었고, 꾸준히 만났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직장, 같은 부서에서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절실하다.
김 수석연구원이 입사한 지 20년이 다 됐지만 여성 연구원의 비율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최근 육아휴직이나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등으로 그간 막혀있던 새로운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어서 그래도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며 “여성 연구원들을 위한 문이 열리고 인원이 차츰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내가 겪었던 어려움도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