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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로잘린 얄로우

아무리 우수해도 연구소 조수 정도로 밖에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을 딛고 일어선 다부진 여성. 그러나 우먼리브의 맹목성에는 비판적이다.
 

남녀평등의 대표적인 나라가 어디냐고 물으면 누구든지 미국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훈련 받은 최초의 여성 노벨 수상자가 된 '로잘린 얄로우'의 경우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때문에 과학자의 길을 걷는데 숱한 푸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1977년에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았으나 남성이었다면 그보다 몇해 전에 노벨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성의 불평등을 이겨내고 마침내 세계에서 두번째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여성이 되었다.
 

올해 67세인 R.알로우 여사. 최선을 다한 삶이었기에 만족하고 있다고.

 

선생님을 자로 때린 여학생
 

1920년 뉴욕시 '브롱크스'구에서 이민온 유태인의 딸로 태어난 로잘린은 브롱크스에서 쭉 자랐다. 그녀보다 5살위인 오빠 '알렌잔더'가 처음 국민학교에 등교하던 날 장난치다가 엄격한 선생에게서 자로 손가락마디를 맞고 엉엉 울면서 집에 돌아 왔다. 5년 뒤 처음 학교에 등교하던 날 로잘린도 자로 얻어 맞았으나 그녀를 자를 뺏아 선생을 되받아 쳤다. 교장 선생님에게 불려간 로잘린은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그렇게 하려고 몇해를 기다렷던 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10대소녀로서 로잘린은 언제나 착한 학생이었다. 그녀가 과학을 평생직업으로 택한데는 그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저는 운동에 몹시 서툴었어요. 게다가 노래도 부를 수 없는 음치였고요." 또 당시의 생물학은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을 주로 했기 때문에 그림재주가 없는 그녀에게는 생물학으로 나가는 길도 막혔다. 고등학교를 나와 뉴욕 맨하탄구에 있는 '헌터'대학에 화학전공으로 입학했으나 대학4년때 물리학으로 돌아 버렸다.
 

그녀는 19세의 나이로 우등으로 졸업했으나 그녀의 앞날은 그렇게 밝지 못했다. 경기는 수렁에 빠지고 일자리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퍼듀'대학에 대학원장학생으로 신청했으나 그녀의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퍼듀대학측은 "이 학생은 유태인일 뿐 아니라 여성이어서 우리는 학교를 마친 뒤에도 일자리를 구해줄 수없읍니다"라는 이유를 내걸고 툇자를 놓았다.
 

그래서 로잘린은 교수와 의논한 끝에 속기술을 배워 컬럼비아대학의 한 생화학자의 비서로 취직하면 이 생화학교수가 눈치껏 뒷구멍으로 대학원에 넣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리노이대학에서 1941년 2월 조교로 받아 주겠다는 제의가 왔다. 그녀는 속기장을 찢어버리고 1917년이래 일리노이대학원이 24년만에 처음으로 받아 들인 여학생이 되었다. 일리노이대학원에 처음 등교하던 날 그녀는 같은 유태인인 시라큐스의 율법사 아들이며 물리학전공의 대학원생인'아론 얄로우'에게 첫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두 남녀간의 로맨스는 곧 무르익어 갔다.
 

이 두사람의 첫번째 보금자리는 차고를 개조한 곳이었는데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한 일종의 모임장소나 다름이 없었다. 이들은 창문을 언제나 열어두어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했다. 로잘린에게 의료물리학의 길을 택하라고 권한 사람은 '아론'이었다. 2차대전이 끝나자 로잘린은 원호병원인 뉴욕시의 '몬테피오'병원에 일자리를 얻어 방사성동위원소를 다루게 되었다. 처음에는 동위원소를 암치료에 사용했다. 예컨대 방사성 요오드를 환자에게 주입하면 이것은 갑상선에 축적되어 그곳의 종양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잘린은 방사성물질을 사용하여 몸속의 물리적 반응을 추적하는데 많은 관심이 있었다. 1947년 그녀는 이 원호병원 수위실 하나를 방사성동위원소 연구실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공동연구자로 의사 한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원효병원 의학부장에게 누구 한분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가 보낸 사람은 명석한 머리를 가진 젊은 레지던트 '솔로몬 버슨'이었다. 머지 않아 이들은 완전히 호흡이 맞는 단짝 연구자가 되었다. 체스의 대가이며 바이얼린 연주자인 '버슨'은 번뜩이는 재치를 제공했고 로잘린은 뛰어난 수학솜씨를 보였다. 이들은 연구실에서 흡사 결혼한 뒤 오래된 부부처럼 호흡이 잘 맞았다. 논문은 모두 거의 '버슨'이 써서 배포하는 한편 점심이나 비행기예약같은 잡일은 로잘린이 맡았다. 그런데 '버슨'에게는 남성우월주의 끼가 좀 있어서 함께 걸을 때 항상 자기보다 두어 발짝 뒤에서 따라오기를 기대 했다. 로잘린은 공개적인 곳에서는 그의 기대대로 행동했다.
 

그는 어떤 세계에서든지 첫째가 될 가치를 지닌 사람이었기에 저는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요즘세상과는 달라서 제가 자랄 때는 남성우위의 세상이었으니깐요. 그래서 그 시대의 문화적 인습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어요."

 

방사면역 측정법의 발명
 

결국 이들을 노벨상의 수상대상이 된 '방사면역측정법'(RIA)의 발명으로 이끌어 간것은 당뇨병 연구였다. 당뇨병 환자들은 몸속에서 설탕을 이용하는데 필요한 인슐린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소나 양의 췌장에서 나온 인슐린을 주사해야 한다. 그런데 한 동료 연구자가 당뇨병환자의 경우는 어떤 효소가 인슐린을 파괴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가정을 내세웠다. 버슨과 로잘린은 그의 주장이 옳은 것인가 알아 보기로 했다. 이들은 자신은 물론 지원자에게 방사성 요오드로 표지한 인슐린을 주입하여 시험대상자인 당뇨병 환자의 조직에서 방사성 인슐이 더 빨리 사라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뇨병환자들이 건강한 자원자들보다 더 오래동안 방사성 인슐린을 간직한다는 사실이 들어났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뇨병환자들은 종전의 치료를 받는 가운데 인슐린에 대해 일종의 항체가 생겨 피속에 있는 이 항체는 인슐린을 가둬두고 고정시킨다고 버슨과 로잘린은 풀이했다. 그런데 이 이론은 인슐린의 분자가 너무나 적어서 항체를 자극할 수 없다는 당시의 의학계의 견해와는 상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논문을 출판하기 위해서는 당초의 제목에서 '인슐린 항체'라는 말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인슐린은 너무 적어서 종래에는 측정 할 수 없었으나 이들은 항체의 효과를 통해 피속의 인슐린의 양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기술은 방사성 표지의 인슐린과 돼지 인슐린을 기니아 피그에게 주입해서 얻은 비표지 인슐린 항체를 혈정 플라즈머의 샘플과 혼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방사성인슐린과 천연의 인슐린은 항체와 경쟁을 하는데 샘플속에 천연 인슐린이 더 많고 방사성 인슐린의 양이 적으면 항체에게 갇히게 된다. 갇힌 인슐린과 갇히지 않은 방사성 표지의 인슐린을 가려서 이들의 상대적인 방사능양을 측정한 뒤 이 결과를 표준 혼합체의 시험결과와 비교하면 피속에 있는 당초의 인형(人型) 인슐린의 농도를 미루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이를테면 거대한 호수속에 녹아 있는 1입방센티의 설탕까지 측정할 수 있다.
 

이들은 한 걸음 나아가서 몸 조직의 다른 호르몬을 측정하는 방법까지 개발해 나갔다. 이리하여 오늘날 인슐린에게 인형성장호르몬과 LSD(환각제)에 이르기까지 수백종의 호르몬, 바이러스. 화학물을 측정하는 방사면역측정법(RIA)이 있으며 제약회사에서 키트모양으로 만들어 파는 것도 많다. 방사면역측정법의 발전과 함께 얄로우부부의 가족도 늘어 났다. 그녀는 아이들을 원호병원의 시험관과 실험동물양육장사이를 오가면서 키웠다. 1952년에는 임신 5개월이 되는 여성은 사임해야한다는 원호병원의 규칙을 어겼다.
 

로잘린은 아들 벤자민을 토요일에 출산하고 1주일 뒤에 다시 일터로 나갔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딸 엘라나를 출산 한 뒤 병원에서 8일간 있다가 워싱턴으로 날아가 강의를 해야 했다. 이 아이들은 장성하여 딸은 남 캘리포니어대학의 교육심리학교수이며 아들은 뉴욕시립대학에서 컴퓨터 시스템 어날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실험실에서 단백질 분자를 분석하는 「알로우」여사.

 

여자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1972년 로잘린은 뜻밖의 불운을 맞는다. 버슨이 심장병으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버슨의 죽음은 로잘린에게 이중의 타격을 안겨 주었다. 그녀는 연구실의 단짝을 잃었을 뿐 아니라 RIA 발명의 공로로 탈뻔 했던 노벨상의 기회를 놓치고만 것이다. 그런데 노벨상은 죽은 뒤에는 수여하지 않으며 함께 일하던 팀의 생존자에게 준 일도 없다. 더우기 여성은 연구팀에서 보조연구자정도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로잘린은 이래저래 매우 우울한 한때를 보냈다.
 

"만약에 제가 그때 죽었다면 노벨위원회는 저를 버슨의 조수였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상을 주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입니다."고 로잘린은 말하고 있다.
 

그녀는 한동안 의과대학에 다녀볼까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새로운 협조자를 한사람 채용했다. 그는 바로 처음에 그녀에게 버슨을 소개해 주던 '스트라우스'의 아들 '유진 스트라우스'였다. 로잘린은 곧 그녀의 연구실이 아직도 최상급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음 4년간 12개의 여러 의학상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권위있는 '알버트 라스커' 기초의학연구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사실상 이 상을 탄 첫번째 여성이 되었다.
 

1977년 10월 13일 새벽 6시30분 로잘린은 원호병원의 자기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 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타고 남편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여보 집에 와서 옷 갈아 입고 나가는 것이 좋겠소"
 

그녀는 집으로 달려가서 옷을 갈아 입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윽고 사진기자들이 떼지어 몰려 왔다. 새로 탄생한 노벨상수상자의 모습을 담기 위해 서였다.
 

그녀가 버슨과 함께 개발한 RIS는 몸속의 미량의 호르몬, 바이타민, 바이러스, 효소 등을 동정(同定 : 화학적으로 그 실체를 확인하는 것)하거나 양을 측정할 수 있어 의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대량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고 새로운 통찰력을 부추겨서 내분비학 분야에 혁명적인 진보를 가져오게 한 공을 마침내 노벨위원회가 인정한 것이다.
 

전통적인 성장과정을 거친 그녀는 이것을 과학적인 배경과 배합하여 절충형인 여성관을 지니게 되었다. 예컨대 남성이 수학적인 재능에서 여성보다는 약간 뛰어나며 이것은 이를테면 생물학과 의학 등 자연과학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이 비교적 적다는 이유의 배경을 설명할 수 있다고 비친 말성많은 실험을 지지했다고 해서 그녀는 최근 큰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다. 그러나 여권주장론자들은 이런 차이가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그렇게 만든 사회적인 조건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로잘린의 견해는 다르다.
 

"그런 것이 어떤 미묘한 문화적인 영향의 결과이던 나는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수학을 할 수 없으면 자연과학으로 들어 갈 수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분명히 거부하기 어려운 사실이 있읍니다. 저는 분명히 남성을 닮지 않았고 또 남성과 닮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평균해서 남성은 대부분의 여성보다는 키가 더 크고 체중도 더 무겁습니다. 그런데 저는 많은 남성보다 키도 크고 체중이 더 나갑니다. 사람이란 평균치와는 다른 것입니다. 제가 여성이라고 해서 어떤 일은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평생을 방사성물질를 다룬 경험을 가진 그녀는 핵에너지의 열렬한 옹호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주장은 일반인들이 방사능에 관해 너무 아는 것이 없어 결국 핵에 대한 지나친 공포를 갖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과학자들 중에도 맹점은 있다고 시인하면서 예컨대 퀴리부인을 비판한 일이 있다. 그녀는 퀴리부인이 방사선을 너무 쬐면 건강을 해치고 심하면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만약에 퀴리부인이 방사선을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자기 자신은 물론 딸까지 방사선앞에 노출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퀴리부인의 예는 재능있는 과학자가 저질은 중대한 과오의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다.
 

몇해전 그녀는 정부가 원자력 발전소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요오드화칼륨 캡슐을 나눠줄 것을 고려하는 문제에 대한 증언을 해 달라는 초청을 미의회로부터 받은 일이 있다. 공청회에서 로잘린은 이런 계획은 요오드화칼륨이 핵로에서 새어 나온 방사성 요오드가 갑상선에 축적되어 암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을 막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말했다. 그녀는 방사성 요오드가 새어나오는 확율은 뉴욕 맨하탄에 스카이래브 우주선이 떨어질 확율보다 적다고 주장하면서 "반핵운동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핵발전소에 대한 공포를 자아내게 한다"고 공격했다.

 

「지성이 작동되지 않는시대」개탄
 

그녀는 20세기로 들어 와서 과학덕분에 생활이 편해진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으면서 자연으로 되돌아 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 난 것은 간단한 생활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공해나 방사선에 대한 두려움이 과장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 동해안에는 별이나 태양이나 우주에서 오는 우주선과 땅속의 자연방사능등 모두 합펴 연간 1백 밀리라드의 방사능이 있으나 원수폭실험과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능은 모두 0.1밀리라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주장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사능을 쬐는 근로자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태평양을 왕복하는 여객개의 파일럿과 승무원 그리고 뻔질나게 항공여행을 하는 승객들이라고 한다. 1만2천킬로 상공을 나를때 이들은 시간당 1밀리라드의 방사선을 쬐게 되지만 이것은 방사선물질을 다루는 일을 하는 연구자가 1주일 동안 쬐는 방사선량보다 많다는 것이다. 파일럿조합은 방사성물질의 운반에 엄격한 규칙을 요구하고 있으나 실제로 운반되는 방사성물질에서 나오는 방사선은 하늘을 나를 때 받게 되는 방사선량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와 같이 이름 난 사람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만 보통 과학자들의 말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고 로잘린은 안타까워 하고 있다. 실상 그녀도 노벨상을 타기 전에는 누구 하나 그녀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으나 노벨상을 타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녀의 머리속의 알맹이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틈만 나면 어디든지 날아 가서 계몽강연에 열을 올린다.
 

요즘 로잘린의 연구는 뇌속에 있는 어떤 호르몬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는 이 호르몬이 섭식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호르몬의 일종인 인슐린을 쥐에게 주사하면 먹이의 섭취량이 늘어나서 며칠을 두고 계속 주사하면 쥐는 살이 찐다. 호르몬을 주거나 거꾸로 내분비선을 제거하거나 하면 식물을 섭취하는 방법이 전혀 달라진다. 먹이를 먹는 이른바 섭취행동은 동물에게 기본적이며 반드시 필요한 행동이다. 건강하면 이상비만은 없다. 그래서 섭취행동은 동물이 여러 행동으로 잃는 에너지에 알맞게 에너지를 받아 들이는 일종의 자기 조절 행동이다. 동물이 어떻게 이런 섭식행동을 하는 것인가를 밝히기 위해 그 중요한 요인의 하나인 뇌속의 호르몬연구에서 그녀는 실마리를 찾자는 것이다.
 

요즘 로잘린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오늘의 세계는 차츰차츰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주요한 원인을 사람들이 서적이 아니라 텔리비전 같은 것에서 정보를 얻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결과 지성을 작동시켜 스스로의 생활을 관리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성의 결여를 도처에서 볼 수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제 70고개를 바라보는 로잘린 얄로우는 나이를 먹어 가는데 대해 만족하면서 그 이유는 스스로 최선의 삶의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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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과학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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