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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보람과 좌절이 점철된 연구소 24

연구소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의 삶의 현장과 연구체제의 문제점을 알아본다.
 

명문대학 화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해 한 정부출연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는 L씨는 오늘 아침 출근길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새로운 농약의 원료를 합성하는실험이 오늘쯤은 결말을 볼 것 같아서이다. 밤을 지새워 실험하기를 3일, 어제밤 책임연구원 K박사는 옷이라도 갈아 입을겸 집에 들어가 쉬라고 권하면서 아이디어가 참신해 좋은 실험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예상대로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개발성과를 특허 신청하던 날 의기양양한 L씨는 대기업의 기획실에 근무하는 대학동창을 불러냈다. 그러나 이얘기 저얘기 끝에 월급이 화제에 올랐을 때 연구원으로서의 L씨의 긍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자그마치 20만원이나 차이가 났던 것이다. 귀가길 버스속에서 L씨는 남들처럼 유학이나 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애써 뿌리쳤다. 자신의 노력이 깃든 연구실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릴때부터 꿈꾸어오거나 일반인이 보통 생각하는 '과학자'의 이미지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 대학의 교수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차이가 모호해지고 연구개발(R&D)의 중요성이 점점 커짐에 따라,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교수보다 더 비중이 큰 과학자로 등장하고있다. 그리고 이들은 꽉 짜여진 연구체제 속에서 위에서 든 L씨의 예처럼 보람과 좌절이 점철된 생활을 하고 있다.

 

과학자가 되는 여러가지 길
 

과학기술계통의 연구소는 크게 기업부설연구소와 정부출연 연구소로 나눌 수 있다. 산업계에서 연구소를 본격적으로 설립하게 된 것은 70년대 말부터였다. 국제기술경쟁에서 열세를 통감한 기업들이 그동안 소화흡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자체 개발활동을 강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최근에 들어와 연구소의 설립은 붐을 이루어 85년 말까지 1백83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나 연구인력의 수준은 보잘것 없어 기업부설연구소의 총1만1천7백28명의 연구원중 박사급은 1.5%에 불과한 1백80명이고 학사급이 전체의 4분의3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정부출연연구소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사실상 우리나라의 연구개발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1966년에 설립된 KIST는 70년대초부터 본격적인 연구개발활동을 전개해, 우리나라 국공립연구소가 나아갈 길을 닦아 놓았다. 70년대 중반부터는 중화학공업 분야의 기술적 애로를 극복하기 위한 전문 연구기관이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했다. 한국화학연구소(76.9) 한국전자기술연구소(76.12) 한국통신기술연구소(77.12) 해양개발연구소(78.4)등이 그 예이다.
 

정부출연연구소가 현재의 면모를 갖춘 것은 지난 80년대 말 대대적인 연구소 통폐합 조치가 이루어진 후이다. (표)는 그들의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표에서 보듯이 정부출연연구소의 박사학위자는 총 4백79명으로 전체 연구원의 12.9%를 차지한다. 석사학위를 갖고 있는 연구원은 대략 전체의 50%라고 알려져 있다. 과학원과 대학원에서 석사가 대량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표)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현황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학보다는 연구소, 연구소중에서 정부출연연구소가 연구인력면에서나 비중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정부출연연구소를 중심으로 연구원과 연구체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이공계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원의 길을 가려는 학생은 대개 대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학부를 나와서도 연구소에 취직할 수는 있지만 정식 연구원이 아닌 위촉연구원으로 발령받아 연구 보조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학문에 뜻을 둔' 대학원 졸업자의 진로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기업부설연구소 또는 국공립연구소에 취직하는 일이다. '비명문대학'졸업생의 경우 이런 케이스가 많다. 이들은 '박사 아닌 설움'을 감내하며 연구소에서 자리를 잡거나, 몇년 근무하다 기회를 보아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학원을 나오자마자 유학을 가는 현상은 소위 일류대학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5~7년 후 학위를 딴 다음 현지에 주저앉거나 국내에서 자리를 찾게 되는데 흔히 기업체에 과장급 이상으로 취직하거나 국공립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으로 간다. 대학의 전임강사 자리가 선망의 대상이지만 웬만해선 기회를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국내에서 머물면서 박사학위를 따는 경우도 있다. 대학에서 자리를 잡기는 이들에게도 '하늘의 별따기'여서 국공립연구소나 기업체에 취직하는 게 보통이다.
 

외국박사를 선호하는 대학이나 연구소에 의해 이들은 푸대접받기가 일쑤다. 외국박사는 선진기술을 체득해 지식폭이 넓은 반면 자기 분야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국내 실정을 잘 모른다고 지적을 받는다. 이에 비해 국내 박사는 대개 연구열이 높고 의욕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또 '아직도 공부중'이라는 의식이 있어 연구관심의 폭도 넓다. 따라서 박사에 대한 평가를 출신지보다는 권위있는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의 수와 질로 하는 게 온당하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연구원의 세가지 계층
 

새로운 학문적 조류를 대변하는 선임연구원들은 연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사진은 초저온합금을 실험하는 KAIST 재료공학부 김영길박사팀.


연구소의 주인이라 할 연구원에는 크게 3가지 계층이 있다. 제일 위에 있는 책임연구원은 연구를 관리하고 연구결과에 책임을 지며 프로젝트를 따와 연구실 식구를 먹여살리는 역할을 한다. 선임연구원은 허리의 기능을 한다. 연구를 직접 지휘하고 이론적인 지원을 하며 연구의 관리에도 한 몫을 한다. 마지막으로 연구실을 지키며 연구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일반연구원이다.
 

연구소의 하루는 아침 9시 출근과 함께 각 연구실별로 모든 연구원들이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때 학계 산업계 또는 행정부의 동향에 대한 정보가 교환되고 아울러 그 날 할일에 대한 역할분담이 정해진다. 그로부터 겉보기에는 단조로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된다. 공장처럼 부산한 연구실도 있지만 대개는 대학과 흡사한 조용한 분위기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치열한 '연구개발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 전쟁에서 소총수의 역할을 하는것이 대개 석사학위를 갖고 있는 일반연구원이다. 이들은 박사급 연구원(책임 또는 선임연구원)이 따온 프로젝트를 주어진 연구방법과 방향에 따라 수행한다. 종종 이들은 박사급이 퇴근한 후에도 연구실을 지키곤 한다.
 

주로 1년 단위인 연구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이 수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책임연구원은 프로젝트를 따와 연구과정을 연구원에게 지시한다. 이에 따라 처음 2~3개월은 자료조사를 하고 다음 2~3개월 동안은 기초실험과 함께 가능성을 조사한다. 나머지 기간은 본실험과 결과물 추출 및 보고서작성에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박사들에 비해 과중한 부담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KAIST의 한 연구원(26)은 "사전에 충분한 대화나 설명없이 프로젝트가 주어져 그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이나 자료도 없이 연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시행착오를 되풀이하게된다"고 밝혔다. 소프트웨어개발 등에서는 프로젝트만 던져주는 예도 있으며, 또 선임연구원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그들도 나름대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해 어떤 경우에는 두 가지 프로젝트를 한 연구원이 동시에 떠맡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연구원급 인력이 연구과제를 주로 수행한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연구소 통폐합 때 책임급 연구원들의 이직률이 높았던 데다가 82년부터 시작된 특정연구개발사업을 해나가는데 필요한 인력을 손쉬운 연구원급으로 충당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의 직급별 분포를 보면(85.4현재) 책임급이 11.6% 선임금28.5%인데 비해 연구원급은 60%나 된다. 11개의 출연연구소중 연구원급의 비중이 60%를 넘는곳이 6개소에 이른다.

 

일반연구원은 연구현장을 지키는 주역이다. 미생물을 이용해 항생물질의 활성을 측정하는 모습.


술마시기보다는 영어공부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반 연구원들의 급여수준은 동년배의 일반 기업체 직원보다 낮아 불만요인이 되고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소에 갓들어온 연구원이 받는 월급은 기본급 27만1천원, 연구수당 4만원을 합쳐 31만1천원이다. 여기에 보너스 연4백%와 '인센티브'조로 주는 돈이 있다. 인센티브는 연구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상여금의 성격으로 A, B, C, D 4등급에 따라 9~13만원씩 지급하는데, 대개는 능력급이라기보다 돌아가며 등급을 받는다. 따라서 동년배의 기업체 근무자가 대리급으로 50만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면 약 20만원가량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일반 연구원들의 이직률은 매우 높다. 예컨대 지난 81년에서 84년까지 KAIST를 떠난 일반 연구원은 1백62명이었는데, 그중 46%가 3년 미만의 경력이었고 93%가 5년을 채우지 못햇다. 여기에는 연구원을 위한 재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다는 점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3년정도 지나면 유학을 생각하게 되는데, 특히 미국학기와 관련해 5,6,7월에 대거 이탈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석사급 인력이 연구소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연구경력을 쌓기 위해서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사실 정부출연연구소는 시설 등 연구여건이 좋기 때문에 여기서 기초연구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얻어 외국으로 유학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예가 많다고 한다. '연구원들은 근무가 끝나면 술마시러 가기보다는 영어공부를 한다'는 풍속도는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연구원은 준공무원의 혜택을 받기 때문에 신분이 보장되고, 특허나 논문을 내기 쉬워 연구업적을 쌓을 수 있으며 밤 9~10시에 퇴근하는 일이 잦아도 바쁜 기업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 연구소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부터 6~7년의 경력을 쌓기까지의 소장 연구자층이 선임연구원 그룹을 구성한다. 나이는 보통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까지. 새로운 학문적 조류를 대변하는 이들은 고분자 알로이 섬유나 알라미드펄프의 개발사례에서 보듯이 기존의 연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다.
 

선임염구원들이 하는 일은 연구원들의 연구를 현장에서 지휘하고 연구원들이 부딪치는 이론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 또 어느 정도 경력을 쌓으면 책임연구원과 함께 연구소의 살림에도 일조를 한다. 급여수준은 같은 또래의 박사로서 기업체에 근무하는 사람보다 학위수당(20만원  정도) 만큼 적다는 것. 그러나 연구생활에서 얻는 기쁨은 이런 대우의 차이를 상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경력 5년의 한 선임연구원은 "연구는 절반을 성공시켜도 잘 한셈인데 실패사례가 보고되지 않는 풍토가 개탄스럽다"고 젊은 연구자의 대담한 연구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선임 연구원들이 아이디어는 풍부하지만 책임급에 비해 연구의 실현여부와 현실성을 따지는데는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연구소 살림살이에 바쁜 책임연구원
 

연구실장을 역임하는 책임연구원은 대개 학위를 딴 후 7~8년의 경력을 갖고 있다. 이들은 연구를 전체적으로 감독하고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은 연구원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먹이를 물어오는 일'이다. 연구비를 신청해 따오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책임연구원들은 연구의 질보다는 살림살이에 더 신경을 써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와 하고 있다.
 

대덕에 위치한 한 정부출연연구소의 책임연구원은 "30명의 연구원을 먹여살리려면 5억원 상당의 연구프로젝트를 따와야 하는데, 이것이 모자라면 기업체를 설득하는 '아이디어 세일'이라도 해 프로젝트를 따온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니 마음놓고 하고싶은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개발 등 남들을 좇아가는 식의 연구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기업체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KAIST의 한 책임연구원은 "보수는 대기업체 보다 낮고 중소기업보다는 높은 편이지만 워낙 좋아하는 일이라 대우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연구프로젝트가 1천만원이든 1억원이든 간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나오는 '제반 경비'는 불합리하며, 또 책임연구원들이 정부의 연구비를 따기 위해 로비를 하지 않아도 될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구소의 젖줄은 다름아닌 연구비이다. 연구비의 양, 지급방법, 용도는 연구개발활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재 출연연구소의 연구비는 특정연구개발사업비, 수탁(受託)연구비(정부 및 산업계 수탁), 출연금 등으로 구성된다. 출연금은 연구소의 기초연구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연구비로 1년에 3~4백만원밖에 안돼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연구과제의 문헌조사나 착수비 정도로 쓰이고 있다. 수탁과제는 정부나 기업이 그때그때 필요한 경우 계약을 통해 수행하는 연구이다.
 

연구비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것은 특정연구개발비이다. 공공기술 뿐만 아니라 산업전반에 쓰일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지난 82년부터 추진되기 시작한 이 사업에 의해 86년까지 2천3백1억원이 연구비로 지원됐다. 금년도 특정연구개발사업비는 6백30억원. 이중 정부 출연분은 5백30억원이다. 한편 이 사업의 연구기관별 연구비 배분현황을 보면 정부출연연구소가 93%라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 특정연구개발사업은 이들 연구소 연구비의 60% 이상을 차지해 그 수행이 연구소의 주된 기능이 되고 있다.

 

연구비 결정을 둘러싼 줄다리기
 

매년 5월이 되면 책임연구원들은 바빠진다. 특정연구개발사업(이하'특연사'로 줄임)의 연구계획서를 내야 하고 동시에 지난해 따온 연구의 결과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하고 힘든 것은 신청한 과제가 선정되도록 '힘을 써야'하는 일이다. 연구비 결정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과학기술처의 각 분야 연구조정관. 기초, 기계, 전기전자, 화공, 동력자원 분야를 담당하는 조정관과 사무관 1~2명이 모든 연구기관에서 신청한 그 분야의 연구계획을 검토해 1백억원 이상의 연구비를 배분한다.
 

전문적인 내용의 두툼한 연구계획서 수백편을 검토하자니 한 과제당 심의시간은 15~20분꼴밖에 할당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책임연구원은 연구원들의 살림살이를 위해 '저녁이라도 한 끼 사지 않을 수 없고' 가능한 학연과 지연을 통해 로비활동을 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보다 많은 과제를 따는 박사급 연구원이 '유능한'책임연구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졸속한 연구비 심사과정에서 연구비 신청액수가 상당부분 깎이기 일쑤이다. 이에 대응해 연구원들은 삭감될 것을 예상해 연구비를 과다신청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금년도 화학공학분야의 예산은 1백50억원인데 신청액이 6백억원인 것은 연구비를 따기 위한 '생존 경쟁'뿐 아니라 과다신청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연구비의 산정은 그 속성상 불확실하기 마련이다. 1백번 실험해도 실패할 수 있고 단 두번째에 성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뭏든 연구원을 놀릴 수는 없으니까 삭감된 연구비라도 감수할 수 밖에 없다. 자연히 연구결과는 '벽돌집 대신 블록집'이 된다. 과기처로서는 '연구비를 줄여도 하겠다니 애초에 불린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처럼 상호불신이 악순환하게 된 근본적 원인을 한국화학연구소의 한 책임연구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모든 것을 할 수는 없고 필요한 분야만 하고 건너뛰는 전략을 펴야한다. 이때 무엇을 하고 무엇을 건너뛰느냐는 정부가 책임지고 결정해야할 과제이다. 현재 '특연사'의 연구개발 방식은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이기 때문에 정부의 장기적 정책의지가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연구과제에 일일이 관여하지 않고 큰 윤곽과 방향만 잡는데 그치며, 세부적인 연구과제의 선정과 추진을 연구소장의 자율과 책임에 맡기는 쪽이 바람직할 것이다."
 

사실 2000년대를 향한 과학기술발전 장기계획이 입안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공립연구소의 R&D활동은 단기적으로 무계획하게 수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KAIST가 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금 하고 있는 연구과제가 끝나면 무엇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연구자가 상당수에 달했다고 한다.

 

낭비되는 연구비
 

일단 따온 연구과제를 수행하는 과정도 철저히 과기처의 통제를 받는다. 연구비의 사용항목은 20여가지가 되는데 각각에 엄격한 규정이 붙어있다. 연구자들이 가장 고충을 느끼는 부분이 연구비의 항목변경과 정산과정이 까다롭다는 점이다. 특히 연구비 정산의 경우 남는 연구비는 정부가 회수해 가지만 모자라는 부분은 인정을 않고 있어, 일단 확보된 연구비는 남더라도 모두 써버리는 낭비 풍조가 연구소에 만연되어 있는 실정이다.
 

현재 연구원의 증가를 동결시키고 있는 T.O.제도도 원활한 연구활동에 장애가 되고 있다. 늘어나는 연구개발 수요에 따라 연구소에서는 가T.O.제도 또는 연구비의 인건비로의 전용 등 편법을 쓰고 있는 형편이다. 연구내용에 필요한 인력의 채용이 어렵다는 경험을 한 연구책임자들은 연구활동에 자연히 소극적이게 되고, 결국은 연구활동의 전반적인 침체를 초래할 우려도 있다.
 

연구결과에 대한 평가는 연구과제의 선정만큼이나 중요하다. 수백억원이란 연구비가 한낱 보고서로 캐비닛에 쌓여있다면 국가적으로도 큰 낭비이기 때문이다. 정부출연연구소의 연구중 기업체의 수탁연구는 기업의 이해가 걸린만큼 비교적 엄격히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특연사'의 경우 현재의 평가제도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아직까지 객관적 평가기법이 개발돼 있지 않고 평가위원도 전문성이 부족하며 정실에 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특연사 연구결과는 접근도 어렵고 응용도 안된다'는 기업체의 불만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도 연구결과에 대한 엄밀한 평가와 공개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고분자 분야의 개발성과가 많은 한 책임연구원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겪은 경험담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연구체제의 오늘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인도의 초청자는 방문하는 한국 과학자의 개발품 목록을 보고 대단한 거물로 판단해 성대하게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착후 만난 자리에서 최근 2년간 국제학회에 낸 논문이 한 편도 없음을 듣고 "당신은 과학자가 아니군요"라는 쓰라린 농담을 하더라는 것이다.
 

연구개발(Research and Development; R&D)중 우리나라의 과학자가 주로 매달리는 것은 당장 결과가 나오는 개발쪽이다. 보다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고 실패할 확률이 높은 기초연구를 등한히 하게 돼 '기술은 없고 제품은 많은' 기형적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독일의 '막스 플랑크'연구소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장이 대개 교수인 이 연구소에서는 기초연구만을 수행하고, 제품개발은 이 결과를 이용해 기업이 담당한다. 또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은퇴때까지 연구생활이 보장되지만 연구성과가 변변치 않으면 가차없이 제제를 가한다. 몇 개의 연구실은 연구결과가 나빠 폐쇄된 일도 있다.

 

연구소의 자율과 책임 중시해야
 

최근 발표된 KAIST의 기술발전평가센터가 발표한 연구보고서는 현재의 출연연구소와 '특연사'를 평가한 후, '연구수행상의 간섭주의를 지양하고 자율권을 부여하는 한편 연구결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제도적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고 제안해 주목을 끌고 있다.
 

이 보고서는 정부의 과학기술발전 전략의 목표를 반영한 연구소별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인사와 연구예산에 대해 연구소가 자율권을 가지며 개별 연구과제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한편, 연구결과와 연구소 운영의 책임을 강화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출연연구소가 부분적으로 노정하고 있는 경직성을 해소하기 위해선 자율과 책임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연구소 내부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자율과 창의성의 고양을 위해 필수적이다. 최근 일부에서 시도되고 있는 말단 연구원과 책임연구원의 대화모임이나 선임연구원들의 자치기구는 자율적인 연구분위기를 위해 바람직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연구소장 직선제'라는 설문항목에도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는 토양에선 창의와 자율은 싹트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연구자들은 이상에서 살펴본 연구조직과 연구체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연구생활에 얼마나 만족할까? 동아일보사가 85년 5백명의 과학기술자를 대상으로 수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자들의 76.4%가 현직업에 만족하고 있으며, 32.9%는 2세가 과학기술자가 되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KAIST의 한 책임연구원은 "좀 고되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희열을 느낀다"고 연구생활을 평가하면서, "변화를 찾으면서도 한 가지에 집착할 수 있다면 연구원은 권할만한 직업"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연구자들은 과학자로서의 긍지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연구소의 하루하루가 보람에 차려면 자유롭고 창조적인 분위기가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대두하고 있다.
 

오후 6시, 일찍 퇴근하는 연구원들을 태운 통근버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연구소 건물의 여기저기엔 과학한국의 내일을 밝히는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1987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조홍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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