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세계의 우등생'이라는 한국은 과연 선진국 진입에 성공할 것인가? 한국형 기술개발 전략의 비결과 취약점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알아본다.
얼마 전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20년간의 실적을 바탕으로 20년 후인 2006년의 세계를 예측한 일이 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3만달러가 돼 일본 20만달러, 서독 10만달러, 미국 6만달러에는 못미치지만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접어든다는 것이다. 또 대만 출신의 일본 문명사가인 ‘사세휘’(謝世輝)는 최근의 저서 ‘21세기의 세계사’에서 동아시아 시대의 도래를 예언하면서 한국이 21세기에 일본을 앞지르고 세계의 정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런 예측의 공통된 바탕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고 있는 한국의 기술적 저력에 대한 평가이다.
|‘중진국의 맏형’인가‘ 선진국의 막내’인가
정부는 2001년까지 우리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기술선진국으로 만든다는 청사진 아래 강력한 기술 드라이브 정책을 펴고 있다. 이에 발맞춰 신소재 컴퓨터 유전공학 등 첨단기술 분야의 신제품 개발 소식이 잇달아 들려오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나라도 ‘중진국의 맏형’에서 벗어나 ‘선진국의 막내’가 되리라는 낙관론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에선 다른 목소리도 들린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제품을 만드는 제조 기술이지 그 기초가 되는 연구수준은 형편없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외국의 기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에 대한 기술종속은 심각하다는 지적도 있다. 기초과학이 육성돼야 하고 고급두뇌의 양성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세계에서 몇번째’‘ 국내 최초 자체개발’등의 발표를 허풍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1천만 달러 대의 엄청난 기술료를 주고 기술을 도입해 반도체 기억소자를 제조하기 보다는 국내의 두뇌개발에 투자하는 편이 낫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이처럼 우리의 기술력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나라의 기술은 아직도 외국에 의존하는 취약한 체질을 갖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나름대로의 소화능력을 갖춘 자립의 태세를 갖추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우선 우리나라가 취해온 기술발전 전략을 다른 발전도상국의 예와 비교해서 살펴보자.
|제3세계 주목 끈 ‘모방개발’ 전략
정치적 독립과 더불어 경제적 독립을 꿈꾸던 60년대의 신생 독립국들은 늘어나는 선진국과의 격차 앞에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그리하여 70년대의 제 3세계에는 종속이론이 풍미하게 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기술종속론은 선진국 기술도입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즉 구조적으로 제 3세계는 선진국의 기술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국내의 과학기술부문이 생산부문에서 유리되어 결국 국내 과학기술능력의 약화를 초래하며, 마침내 제 3세계는 과학·기술·생산 부문이 단절되어 정체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해외 지향적 수출공업화를 이룩한 우리나라의 기술을 이런 기술종속론의 입장에서 설명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80년대에 들어와 한국을 포함한 신흥공업국들의 발전은 종속이론이 맞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이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선진국의 주변부에서 성공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나 하는 기술적 차원의 문제가 제 3세계의 관심의 표적이 된 것이다. 즉 도입기술에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고 흡수했는가가 중요한 과제로 부각됐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전무한 상태라도 ‘바퀴를 다시 발명할’ 필요는 없다. 과학기술에 있어서 극단적인 폐쇄는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누가 앞섰는지가 불분명한 선진국의 경우 필요에 따라 기술을 개발하고, 후진국은 그것을 도입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기술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술이 과학의 단순한 응용이고 과학적 진보는 천재의 섬광같은 직관의 결과라는 잘못된 견해를 떨쳐 버리는 일이다. 오히려 기술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적당한 기술을 선택해 도입하고, 그것을 숙달해 제품을 만드는 데 활용하며, 나아가 개량을 통해 특정한 생산에 맞추는 등, 사소하지만 조그만 혁신을 통해 기술발전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수입된 기술을 성공적으로 마스터한 일인자가 일본이었다. 그 뒤를 이어 한국과 대만이 ‘모방개발형’의 기술개발 패턴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인도와 중공은 ‘자주개발형’으로 도입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개발을 고집했지만 최근 모방개발형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남미의 여러나라는 전형적인 기술종속의 양상을 보인다. 이들은 합작투자 형태로 기술을 도입하지만 자체의 R&D 축적을 게을리하여 기술의 소화·흡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기술 차용(借用)형’이다. 태국과 같은 나라는 뚜렷한 과학기술 정책이 없는 ‘자유방임형’이다. 선진공업국도 이와 비슷하지만 정책방향과 비전은 분명하다. KAIST의 이진주(경영과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기술변화 단계를 도입기술의 실용화기와 소화기를 거쳐 개량 및 자체개발기로 나아간다고 설명했다. 즉 60년대는 선진국에서 이미 굳어진 기술을 도입했지만, 70년대에는 한창 성장기에 있는 기술을 도입해 소화·흡수·개량을 하면서 자체적인 기술적 능력을 축적했고, 80년대 이후에는 자체적인 R&D와 기술혁신이 중심이 되어 세계수준의 제품과 공정을 개발하는 단계로 발돋음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림1).
이런 맥락에서 이교수는 “우리나라가 해외의 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탈피할 수 있는 구조와 능력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고 단언했다. 아울러 그는 “60·70년대에 무성했던 ‘낙후 기술을 도입했다’는 등의 비난은 우리의 기술단계에 비추어 볼 때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기술도입을 무조건 백안시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 정비에서 고유모델 개발까지
우리나라의 기술발전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분야로 자동차 산업을 들 수 있다. 자본 및 기술집약적 종합 기계산업인 자동차 산업은 광범한 연관산업을 갖기 때문에 그 나라의 기술수준을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 선보인 것은 1903년 황실용 승용차를 도입하고 부터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만든다’는 의미에서는 1955년 미군용 지프를 개조한 시발택시를 만든 것이 최초였다. 그 후 자동차 산업은 가파른 커브를 그리며 성장을 계속해 금년에는 45만대 이상의 수출계획을 세울정도의 자동차수출국으로 발전했다.
자동차 기술의 발전단계는 크게 여명기인 관련 기술 축적기(1955~61), 기술도입기(1962~74), 도입기술을 소화하여 자기것으로 만드는 내재화(內在化)기(1975~84), 수출량 10만 대를 돌파해 국제경쟁 단계에 접어든 창출기(1985 이후)로 나눌 수 있다(이진주·최동규저‘ 산업별 기술혁신과정과 정책과제’, 한국경제연구원, 1986참조).
일본과 미군 및 군수용 차량의 보수, 정비, 간단한 부품생산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자동차 공업은 1962년 닛산의 부품을 도입해 ‘새나라’자동차를 조립하면서 본격화된다. 이때까지의 기술원천은 주로 정비경험과 미군의 부품검사 규격서 그리고 미군의 차량정비 지침서 등이었다.
도입기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67년까지 ‘새나라’와 ‘코로나’를 조립생산했지만, 국산화율은 20%수준이었고 부품도 부분적으로 분해된 상태로 도입했다. 기술개발의 주역은 정비 경험이 있는 기능공이 맡고 있었다.
68년부터 74년까지는 외국기술을 활발히 모방하던 시기로서 비공식적 기술도입에 한계를 느껴 공식적인 도입에 착수하였다. ‘포드’사 ‘피아트’사 등과도 기술제휴와 합작을 통해 완전 분해된 부품을 조립해 ‘코티나’‘ 피아트 124’등을 생산했다. 국산화율은 30%정도. 대졸 수준의 기술인력이 투입됐다.
내재화기의 초기에 해당하는 75년에서 79년까지 고유 모델의 승용차가 개발됐고 수출도 시작됐다. 이제까지의 조립기술 도입과는 달리 제품을 향상시키고 생산성을 높이는 제품기술과 공정기술이 많이 도입됐다. ‘포니’‘ 브리사 ’‘제미니 ’‘마크IV’ 등이 이때의 생산품인데, 국산화율이 높아져 ‘포니’의 경우 85%에 달했다.
80년부터는 일본에서 도입했던 조립기술을 수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외국에서 연수받은 노련한 기술자가 주축이 되어 기존 모델을 대폭 개선하고 새로운 모델의 승용차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포니II ’‘맵시 ’‘로얄’ 등이 생산품으로 국산화율은 각각 98% 93% 91%에 달했다.
고유모델이 개발된 지 10년이 되는 85년부터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창출기로 접어들었다. 전륜구동 등 신규차종을 개발해 해외시장에서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단계에 온 것이다. 이때 기술개발은 기업 특유의 기술을 창출하고 축적할 수 있는 고참 엔지니어나 박사급 연구개발 인력이 담당하게 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자동차 산업은 우리나라가 공업화를 추진해온 요령을 그대로 답습했다. 즉 처음에는 쉬운 기술을 도입해 모방하다가 점차 높은 수준의 기술을 유상·무상으로 도입해 소화·개량해 결국 자체개발로 이끈다는 순서이다. 한편 자동차 산업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갖는 취약점을 또한 여실히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가공 조립 등 생산기술은 그런대로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고 하겠지만, 핵심적인 설계기술과 기초분야인 부품기술에서는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첨단과제 실현, 선진국에 5년 뒤져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기술수준은 어느 정도나 될까? 최근 한국과학기술원이 펴낸 ‘중·장기 기술예측에 관한 연구’는 3백 59개 첨단 연구과제를 선진국과 우리나라가 각각 언제쯤 실현시킬까에 대한 흥미있는 결과를 보여준다.
대학, 국공립연구기관, 기업연구소의 전문가1천1백명의 응답을 보면 정보통신, 소재, 에너지, 생물공업 등 9개 분야에서 평균 기술실현시기는 세계가 1995년인 반면 우리나라는 2001년 으로 예측했다. 또 일본의 실현시기는 대체로 세계적 수준에 비해 1~2년 정도 뒤져있으나 우리에 비해서는 4년 정도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표1)은 조사결과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이 연구에 참여했던 박재혁 연구원은 “5년이라는 차이는 첨단과제의 실현시기의 차일 뿐 기술 격차라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KAIST기술발전연구평가센터의 이종욱 소장은 이 연구 결과에 대해, “과제 하나하나를 집중 지원하면 5년내에 그 분야에서만은 선진국을 따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학기술 수준을 단편적이나마 알 수 있는 지표는 있다. 부품수가 1백~1천개인 라디오나 TV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발전도상국 수준이라면 한다면 수십만개에서 1백만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원자력 발전소, 로킷, 항공기의 제작은 선진국 수준이다. 우리나라에선 부품수 1만개인 자동차 뿐 아니라 약 10만개의 부품이 드는 미니컴퓨터와 미사일 등의 제조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 제품의 정밀도는 1~3μ(1μ은 1천분의 1mm) 정도. 자동차 등 일반 공업제품의 정밀도는 이 수준이다. 그러나 우주선이나 반도체 제품의 정밀도는 1μ이내여야 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1μ 이내의 정밀도를 가진 반도체 금형 제작이 가능하다고 한다. 반도체 미세설계의 수준은 선폭(線幅) 1~1.25μ. 이것은 현재 개발단계에 있는 4메가 DRAM을 설계할 수 있는 수준이나 미국 일본 등의 0.7~0.8μ에는 못미친다.
내년으로 30년의 연륜을 쌓는 전자산업을 통해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수준을 알아보자.
생산량만으로 볼 때 우리나라 전자공업은 미국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7위를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의 추세라면
금년 아니면 내년에 이탈리아를 따라잡고 10년내에 영·불을 추월하여 서독과 3위권을 겨룰 것이라는 예측이 전자공업계에서 나오고 있다.
전자제품의 1천달러 수출부터 1백억달러 수출까지 지켜봤다는 한국전자공업진흥회의 이홍부이사는 “가전제품은 세계적 수준이 1백이라할 때 95정도까지 와 있다. 컴퓨터 하드웨어와 반도체는 만드는 기술에서는 기술격차는 있지만 선진국을 어느 정도 따라가고 있으며, 무선통신은 안보상의 문제로 한계가 있다 치더라도 유선통신은 작년에 전전자 교환기 TDX-1을 세계에서 10번째로 자체 개발하는 등 상당한 수준에 와 있다”고 평가했다.
이이사는 또 전자공업이 뒤떨어져 있는 분야로서 소재분야와 기반기술 분야를 들었다. 실상 반도체 생산량의 90% 이상은, 기술의 축적과 외화 가득 면에서 웨이퍼 가공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단순 조립 형태이다. 또 국산화 비율이 5%미만인 것도 문제이다. 모방에서 벗어나 창의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원천기술과, 재료 및 부품기술이 뒤떨어진다는 것은 다른 산업기술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취약점이다. (그림2)는 우리나라의 기술수준을 선진국과 대비해본 것이며(그림3)은 우리나라와 미국 및 일본의 기술수준을 비교한 것이다.
|기계와 전자가 대종 이루는 기술도입
우리나라의 기술발전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기술의 도입이다. 기술도입의 추세와 성격을 통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어느정도나 자립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62년부터 작년말까지 35년동안 모두 4천 55건의 기술을 외국으로부터 도입, 그 대가로 17억 7백만달러를 지불했다. 기술도입은 70년대 이후 급속히 늘어나 1차적으로 기술 수입자유화가 실시된 78년에 2백건을 넘은 이래 작년에는 5백 17건을 기록하였다. 이에따라 대가 지불액도 급격히 늘어나 85년에는 2억9천만5백달러를 기록했고 86년에는 4억1천만달러로 39.1%나 늘어났다.
기술도입 분야는 산업구조의 변천에 따라, 60년대에 화학기술이 주종을 차지했는데 비해 70년대 중반부터는 기계분야와 전기·전자기술의 도입이 급증하는 양상을 보였다. 작년의 경우 기계분야에서 전체의 30%인 1백53건을 도입했고 전기·전자분야가 1백31건을 들여와 25%를 차지했다.
도입선으로는 일본과 미국이 전체의 3/4 이상을 차지한다. 일본으로부터는 모두 2천1백99건을 도입해 전체의 54.2%를 차지하며 미국을 도입선으로 한 것은 24.2%인 9백81건이다. 기술4건을 들여오면 그중 2건은 일본, 1건은 미국산인 셈이다.
그러나 대가지불 면에서 보면 미국쪽이 일본보다 월등하다. 즉 85년도의 기술료 중 52.4%가 미국, 25.2%가 일본에 지불됐다. 미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 건수가 일본의 절반에 불과한데도 대가는 두 배가 넘는 이유는, 미국에서 도입한 기술이 원천(源泉) 기술이거나 대형기술이 많은 반면 일본의 기술은 대개 재생기술로서 일본자본의 대한진출과 관련된 단기 저가 기술이기 때문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85년 3백28개의 기업을 대상으로한 조사에 따르면, 기업이 기술을 도입하는 목적으로는 신제품 및 신기술 개발이 62.3%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품질과 성능개선 33.3%, 원가절감과 생산성 향상이 25.5%였다. 한편 도입기술의 소화흡수도를 보면, 대체적인 소화흡수가 35.9%, 거의 전부 소화흡수는 29.8%, 완전한 소화흡수는 24.6%로서 대단히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도입이 기술의존으로 귀착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간의 꾸준한 국산화율 증대와 기술수출의 증가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종욱박사는 “최근 우리나라가 사양화된 기술이 아닌 핵심기술을 도입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만큼 우리 기술의 능력이 커진 증거”라고 주장하면서 선경(주)의 폴리에스터 필름 개발 사례를 들었다.
선경은 세계의 4개 회사가 기술을 독점한 폴리에스터 필름의 제조기술을 일본 ‘도레이’로 부터 도입하려 했으나 실패, KAIST와의 계약으로 독자개발에 착수했다는 것. 그후 한국에서의 제조 능력이 생기자 ‘도레이’는 기술 판매를 제의해 왔지만 정부는 제일합섬에게 도입을 금지시켰다. 결국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던 폴리에스터 필름을 이제는 수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평등 계약과 대일의존의 문제
기술도입이 국내의 기술능력 향상에는 이바지했지만 기술 창조능력에는 별 기여가 없었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에 있어서 외국기술 도입과 국내 기술능력의 관계에 대한 시론적 일 분석’(1986)이라는 논문에서 김우식씨는 “기업내에서 도입기술은 자체의 R&D 노력을 저하시켜온 경향이 있다. 연구개발투자의 주 목표는 기술의 소화·흡수·개량이었기 때문에 기술의 흡수과정이 대단히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도입기술의 대체경향은 미미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앞서의 선경과 같은 특별한 예를 제외하고는, 핵심기술의 전수를 기피하는 선진국의 세계적 첨단기술에 대해서는 여전히 크게 뒤지게 된다고 하겠다.
기술도입시의 ‘일방통행’식의 무리한 불평등 계약도 종종 문제가 되었다. 그런 계약의 유형에는 수출 및 판매지역의 제한이 가장 많고 국내에서 발전시킨 기술을 부당하게 제공토록 요구하거나 원자재와 부품 구입선을 지정한 것들도 상당수 있다. 삼성전자가 일본 ‘도시바’사로부터 에어컨 기술을 도입하면서 삼성이 추가로 개발한 새로운 기술을 ‘도시바’에 제공, 마음대로 다른 곳에 판매할 수 있도록한 것이나 금성반도체가 이탈리아‘올리베티’사에서 퍼스널 컴퓨터를 도입하면서 판매지역을 제한당했던 일 등은 전형적인 사례다.
기술도입과 관련해 가장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 일본에 대한 의존의 심화현상이다. 이러한 대일 의존은 80년대에 들어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무역수지를 보더라도 전체 적자폭보다 대일 무역적자가 더 큰 형편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나라에서 벌어 일본에 모두 주고도 모자라는 셈이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일본이 중화학공업 제품 중심의 생산재를 수출하는 반면 우리나라가 경공업 제품의 최종소비재를 주로 수출하는 양국의 수직적 분업구조에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의 기술격차에 있다.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시설재, 부품, 소재를 거의 일본산으로 충당하고 있다. 특히 기계공업의 대일 의존은 심해 83년을 기점으로 기계공업 전체의 무역수지는 흑자로 돌아섰는데 반해 대일 적자는 85년 31억달러에 이르는 등 증가일로에 있다.
한편 이런 구조적인 측면 말고도 일본에 의존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한국기계공업진흥협회의 김영춘씨는 “기계류와 부품을 일본에 의존하는 이유로 언어 소통에 유리하고, 지리적으로 가까와 신속한 부품 인도와 아프터서비스가 가능하며, 기계가 동양인의 체형에 맞음을 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모방에서 창조로
일본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을 결합시키자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의 기치를 내걸었던 일본은 기술 선진화에 성공했다. 이제 일본이 창안한 ‘모방형 기술개발전략’의 모범생인 한국이 일본과의 일방적 의존관계에서 벗어나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기 위한 길은 무엇일까?
한국화학연구소의 한 책임연구원은 국공립 연구소의 연구내실화를 들었다.
“연구보다는 개발에 치중하는 풍토가 문제다. 예컨대 라이터를 개발하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하면, 라이터라는 결과만 중요시하지 왜 불이 켜지지를 알아내는 건 평가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더 좋은 라이터는 못 만든다. 연구개발의 기반도 쌓이지 않고 연구원들은 원리고 뭐고 제품 개발에만 몰두하다가 머리가 굳어버린다.”
정부출연연구소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한 소장은 연구소의 ‘행정기관화’를 개탄했다. “연구업무 이외의 행정적 일이 너무 많아 아까운 연구시간을 까먹고 있다. 또 행정적 편의 때문에 연구원을 계층별로 나누고 있다. 소장이나 부장이 되면 아무리 훌륭한 연구 자질도 썩이기 마련이다.”
그 동안 정부의 야심찬 지원과 기업의 노력으로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견해에 따라선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상당한 정도의 자립단계에 와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종욱박사는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이 “어쩔 수 없는 의존에서 필요에 따른 의존의 단계로 왔다.”고 하면서 “선진국과 첨단기술을 주고받는 관계로 된다면 세계 10위권의 기술선진국은 현실로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기본설계 소재 시스팀개발 등의 핵심기술과 이를 뒷받침해 줄 기초과학이다. 이 약점을 보완하려면 보약을 먹듯 당장 눈에 보이는 실적이 없더라도 ‘과학기술 체력’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술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과학은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은 새겨 들을 만하다. 과학이 가지는 정신과 어울리는 사회분위기에서 만이 ‘모방’에서 ‘창조’로 넘어가는 열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