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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설립

산학연계의 효시

현재 한국경제가 부닥치고 있는 어려움의 원인을 기술력의 부진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발전은 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계획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과기처와 KIST의 설립, 해외과학자유치, 원자력연구와 대덕연구학원도시구상 등 현재 우리과학기술의 토대는 대부분 이 시기에 마련됐다. 6,70년대 초창기 한국과학기술은 어떠했는가. '과학동아'는 이러한 의문을 당시 과학기술정책의 주역이었던 최형섭 전(前)과기처장관의 증언을 통해 풀어보았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80년대초 한국과학원과 통합돼 KAIST로 흡수됐다가 89년 다시 분리됨)가 설립된 배경에는 국내적인 요인과 국외적인 요인 두가지가 있었다.

설립 제안이 처음 나온 것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이 한창 진행되던 60년대 초반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이 시작된 것이 62년이었는데 당시는 경제개발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우선 먹고 사는게 급했고 나라의 기본은 농업이라는 사상이 여전히 컸으므로 있는 돈을 몽땅 농업발전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국토의 80%가 산인 우리 경우 농업으로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몇년 지나봐도 아무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이용하자, 사람을 이용해서 경제를 일으키자'는 식의 공업화로 눈을 돌리게 됐다. 독일에서 막상 차관을 들여오기는 했지만 물건을 만들어낼 기술이 없었다. 게다가 국내시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보잘것 없었다. 그래서 해외시장에 당장 내다팔 수 있는 섬유 가발부터 시작됐다.

이런 상황에서 박대통령은 경제개발이 성공하려면 먼저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을 구상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각 기관에서는 한결같이 돈을 먼저 달라는 얘기뿐이었다.

"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

이런 국내 사정과는 별도로 내가 소장으로 있던 원자력연구소로 국제원자력기구에서 한가지 연구의뢰가 들어왔다. 캐나다 정부에서 값싼 지르코늄(핵연료를 넣는 용기, 생성된 중성자를 최소로 흡수하는 재료)을 만들려고 하는데 내게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소장이라는 직책보다는 연구경력이 우선이라 생각한 나는 63년에 캐나다의 알버트대학과 알도라도금속연구소로 갔다. 그리고는 64년 3월에 돌아왔다.
그후 대한화학회에서 캐나다의 과학기술에 대해 써달라는 요청이 와서 '캐나다의 과학진흥을 위한 NRC(National Research Council)의 역할'이라는 논문을 학회지에 게재하게 됐다. 이 연구소는 돈은 전부 정부에서 나오지만 거기서 일하는 사람은 정부관리가 아니었다. 즉 근본 철학은 연구의 자율성에 두고 민간운영방식으로 운영되던 연구소였다.

그런데 64년말경 청와대에서 한준석 경제담당비서관이란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당신 글을 대통령께서 읽으셨소. 직접 청와대로와서 그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지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통령 국무총리 그외 장관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발표를 하고 질문을 받게 됐다.

대통령은 내게 "최박사, 우리나라 과학기술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나는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기본적인 몇가지만 이야기를 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제대로 하려면 무엇보다도 과학교육을 바꾸어야 합니다. 과학을 '아는' 교육에서 과학을 '하는' 교육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 교육으로는 정답 오답 가리기는 잘해도 현상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능력은 기르지 못합니다."

경제기획원장관이 "과학을 아는 교육과 하는 교육의 차이는 뭡니까" 하고 물어 설명을 해줬지만 장관들은 못알아 듣는 눈치였다. 개의치않고 계속해서 설명을 해나갔다. '양의 교육보다는 질의 교육을 해야한다, 자격을 따는 교육이 아니라 연구능력을 갖추는 교육이 필요하다' 등등. 말이 나온 김에 평소 생각들을 쏟아놓았다.

"공업화를 하는데 기술을 아는 사람도 없고 기술을 어디서 가져와야 된다는 것도 모르고 기술을 만들어낼 줄도 모르는 지금으로서는 기업과 학계를 연계하는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어떤 기술을 선정해 도입하고 소화하는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당시 국립시험소는 있어도 기업이 필요한 생산기술을 연구하는 곳은 없는 상태였다. 대학에서도 겨울에 난로를 못피울 때였으니 연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연구를 하는 곳은 원자력연구소와 국방과학연구소였는데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연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과학기술을 하는 풍토를 먼저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대학을 갈 때만 해도 가족들이 전부 공과대학은 뭘하러 가느냐고 반대하던 때였다. 공과 계통은 목수나 미장이 정도로 여길 때였으니 무엇보다 기술을 발전시키려면 전국민이 과학을 이해하는 풍토를 조성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후 65년 4월경 박대통령이 연구소장들을 모아놓고 리셉션을 연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스웨터를 2천만달러 어치나 수출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내가 "그것 참 기특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것만 하겠습니까? 일본은 이미 10억달러 어치 전자제품을 수출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겠습니까? 그것은 기술개발입니다. 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월남파병에 대한 「선물」

KIST를 설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65년 5월에 있었던 박대통령의 방미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존슨대통령은 한국군의 월남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국군의 현대화와 경제원조를 해주겠다고 하고 박대통령을 미국으로 공식초청했다고 한다. 그때 공동성명이 발표됐는데 같이 동행했던 사람들 모르게 그 문안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에 관한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후문으로는 존슨대통령이 뭔가 개인적으로 특별한 선물을 하려고 생각하고 과학고문인 호닉박사한테 자문을 구했다. 호닉은 공과대학을 만들어주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박대통령이 공업기술연구소를 하나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미 공동으로 연구소를 설립한다는 문안이 들어가게 됐다.

양국 정상간에 합의는 됐지만 구체적인 방안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연구소설립이 가능한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그해 6월 호닉이 벨연구소 바텔연구소의 전문가와 농업전문가 등을 대동하고 내한했다. 그들은 원자력연구소와 금속연구소를 둘러보며 타당성을 조사했다.

바텔연구소의 전문가가 이 조사단에 포함된 과정은 이렇다. 호닉박사는 각 연구소로 전문가들을 보내기 전에 "타당성 조사기관이 장래 기술연구소와 자매결연을 맺게 했으면 좋겠는데 어떤 기관이 좋겠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내가 "미국정부 생각은 어떠냐"고 하니까 "벨연구소를 생각한다" 했다. 그래서 나는 "막대한 돈을 들여 기초부터 연구하는 그런 귀족적인 연구소는 아직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 우리는 기업을 도와 물건을 만들어내는 장사꾼 같은 연구를 하는 곳이 필요하다. 그러니 바텔연구소전문가를 보내달라. 그곳처럼 경제성있는 과제를 연구할 수 있는 계약연구소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호닉은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배겨낼 재간이 없다는 것이 당시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기초에서부터 막대한 돈을 투자해 연구결과가 나오면 상품화하는 벨연구소보다는 수탁연구 중심으로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안되는 바텔연구소가 우리 실정에는 더욱 필요했다.

바텔연구소 전문가단의 타당성 조사가 있은 후 66년 KIST의 초대 소장으로 내가 임명됐다. 그러나 참으로 막막했다. 소장만 임명해 놓았지 돈도 없고 직원도 없는 상황이었다. 예산을 담당하는 경제기획원에서는 언제 돈을 주겠다는 확답도 해주지 않았다. 할수없이 경제기획원을 잘 아는 사람을 하나, 그리고 심부름할 사람 하나와 셋이서 일을 시작했다. 사무실이 없어서 어머님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에서 집무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일은행 청계천 6가 지점장이 나를 찾아와 자기네 사무실을 쓰라고 고마운 제안을 했다. 돈이 없다고 했더니 돈없어도 좋으니 함께 가자고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은행 2층에 사무실을 얻었는데 건물 옆에는 어물시장이라 파리가 들끓었고 칸막이도 없어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KIST는 이처럼 초라하게 출발했다. 재미있는 것은 은행 지점장이 인심이 후해 그런 제안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두달후 기획원에서 돈이 나오자 바로 아래층에 있던 은행에 입고됐고 은행은 그 이자만으로도 수지가 맞은 셈이었다. 더 있어볼까도 했지만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파리가 들끓는 곳에서 계속 맞을 수는 없어 곧 종로에 있는 와이엠시에이(YMCA)사무실로 옮겼다. 거기서 KIST의 본격적인 집무가 시작됐다.

설립 초기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산업계와 연계를 갖도록 할 것인가' 였다. 후진국에서 연구소들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은 연구소를 만들어 먼저 연구를 한 뒤에 사용자를 찾으니 찾을 수가 없고 아무도 그 연구성과를 믿지 못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기술을 이용했다가 잘못되면 자기만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 자기네가 돈을 댄다면 위험이 있어도 쓸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계약연구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선(先)연구 후(後)사용자 물색'이 아니라 연구할 때 미리 돈을 받는 기업과 같은 방식을 채택했다.

초기 유학생 이론물리 핵물리에 치우쳐

두번째 고민은 '유능한 사람을 모으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건가' 하는 것이었다. 계약연구를 하려면 경험있는 연구자가 필요한데 당시 대학교에 있는 교수들을 빼오면 대학교육은 정지상태가 돼버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해외에 있는 과학자들을 유치하기로 마음먹었다.

50년대 휴전이후 유학간 사람들 가운데 조건에 맞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문제는 이들을 어떤 조건으로 유치할 것인가 하는 거였다. 궁리 끝에 몇가지 원칙을 마련했다. 먼저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해주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안정성을 보장한다. 그리고 연구하는 환경을 제대로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들이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적인 인식을 높여주고 그 다음 생활의 안정을 마련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맨먼저 집을 마련해주고 당시 국내에는 없었던 의료보험을 미국과 계약해 맺어주고 아이들 교육을 위한 대책을 세워주고 그 다음에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돈을 주면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연구하는 사람에게 돈이 너무 많으면 공부를 안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학자는 배가 고파야 연구를 한다.

연구소 운영을 법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육성법안'을 직접 마련해 박대통령께 제안했다. 필요한 요구들은 내가 직접 조문으로 만들어 제시했다.

첫번째로 정부에서 주는 돈이 출연금이어야 함을 명시했다. '출연금'이란 기부금이란 뜻인데 기부금이란 말을 쓰자니 좀 속된 표현같아서 어감이 좋은 말을 찾은 것이 출연금이었다. 그후 '출연금'이란 단어는 연구소마다 자연스레 쓰이고 있다.

그리고 KIST는 회계감사도 받지 않고 사업계획 승인도 받지 않는다는 조문을 만들었다. 연구하는데 정부에서 이것저것 간섭하면 일이 안된다는 발상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못을 박은 거였다.

이 법안을 내자 국무회의에서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연구소를 재단법인으로 하고 민간운영이 되면 국유재산을 민간인에게 그대로 이양하는 것인데 이것은 국유재산법에 저촉되는 것이라는둥, 회계감사도 없이 어떻게 운영을 맡기냐는둥 반론이 거셌다. 결국 대통령의 고집으로 국회에 법안이 제출됐고 우여곡절 끝에 66년 10월 기공식을 가졌다.

법안 뿐만 아니라 장소 선정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대통령은 임업시험장을 알아보라고 했는데 농림부장관에게 말을 꺼내니 한평도 못주겠다고 버티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전에서부터 천안 서울까지 30여군데를 물색하다가 최종적으로 서울 망우리 동구능으로 정해 문교부에 제안했다. 이 결정사항을 대통령에게 알리자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농림부장관과 서울시장을 부르더니 당장 임업시험장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는 거기서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그보다 더 중요하니 38만평 모두를 주라"고 명하는 것이 아닌가. 농림부장관 얼굴도 있고해서 중간선에서 타협해 그중 15만평을 넘겨받아 비로소 공사를 시작했다.

바텔기념연구소와 의논해 안내책자를 만들어 유럽 및 미국의 주요 연구기관과 대학에 두루 돌렸다. 연구소에서 일할 연구원들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도처에서 5백여장이나 되는 답장이 쇄도했다.

놀라운 현상은 답장 가운데 금속 기계분야는 각각 10명 정도에 불과한 반면 물리학분야는 원자 이론물리 등을 합해 4백여명이나 됐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인 과학자들이 이론물리 핵물리에 편중된 것은 순전히 미국측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즉 당시 이론물리 원자물리가 주류를 이루던 미국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으려면 이 분야를 전공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청서 중에서 78장을 추려 이들을 만나보기 위해 미국으로 직접 건너갔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매우 엄격하게 인터뷰를 했다. 신청자들마다 세차례씩 면담을 했다. 바텔전문가 세사람이 함께 입회하여 각 분야별로 질문했다.

한번은 내가 가르쳤던 제자 한사람이 이렇게 불평했다. "절 그렇게 못 믿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답변했다. "한국에서 제일 좋은 연구를 했다가는 곤란하다. 기업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학문적으로 재미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잘못 알고 가서 나중에 못하겠다고 하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한국에 와서 이런 일을 해도 괜찮겠다는 확답을 받으려고 이러는 것이다."

1차로 5년 이상 경력을 가진 18명을 뽑았다. 그리고 그후 35명을 추가로 뽑아 이 사람들을 전부 바텔로 보냈다. 벨연구소에 근무했던 사람 하나가 이에 반발했다. "하필이면 왜 급이 낮은 바텔연구소로 보내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어떻게 장사를 할 것인가를 배우는게 중요하다. 어떻게 연구보고서를 써서 기업에서 연구를 따오느냐를 배워야한다"고 설득했다.
 

65년 5월 워싱턴을 방문한 박대통령. 이 자리에서 존슨 미대통령은 한국군의 월남파병에 대한 대가로 국군 현대화와 경제원조를 약속했고 덤으로 KIST설립도 지원하기고 했다.


"회계감사를 못받겠다" 고집

연구원을 뽑은 뒤 또 한차례 법 때문에 진통을 겪었다. 육성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골격이 전부 바뀌었는데 그 중에는 연구계획승인과 회계감사를 받아야한다는 항목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대통령한테 달려가 당장 개정해야겠다고 말하고는 67년 3월 임시국회에 개정안을 냈다.

국회에서는 시행해보지도 않고 개정안이라고 펄쩍 뛰었다. 결국 내가 국회의원들 앞에 직접 나가 "과학기술이 정말로 우리나라 발전에 기여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한마디 우문을 던지고 "나를 믿고 법안을 통과시켜달라"고 우겼다. 이에 한참 실랑이를 하던 국회의원 가운데 한사람이 "우리가 무슨 과학기술을 아느냐. 소장이 그렇게 말하니 믿고 맡겨보자"하여 겨우 원안대로 통과됐다. 덕분에 다른 출연연구소 법안들도 별 어려움없이 통과될 수 있었다.

결국 연구소의 회계감사는 자체에서 공인회계사를 불러 보고서를 작성, 정부에 보내는 것으로 끝나고 이에 따라 연구의 자율성은 최대한 확보됐다. 요즘 감사원에서 연구소 감사하게 되면서 과학자들이 연구보다 이러한 잡무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안스럽기 그지없다. 일반기업의 잣대로 연구소를 재려하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나는 KIST가 자리를 잡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박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설립후 3년동안 적어도 한달에 한두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눠 연구소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었고, 설립현장에 직접 나와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주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써주었다. 그리고는 장관들의 반대에 부닥칠 때마다 방패막이가 돼주었다.

이렇게 KIST는 정부에서 돈이 나오되 완전히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캐나다의 NRC, 자기나라에 필요한 연구만 하는 호주의 CSIRO, 산학(產學)을 제대로 굳힌 독일의 막스프랑크연구소, 자율적으로 기초에서 응용연구까지 하되 그 결과를 기업화하는 일본의 이화학연구소 등의 장점만을 따온 방식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바텔에서는 계약연구를 배워 연구소 운영의 기본방침을 세웠다.

연구 자율성을 확보하고 사회적인 인식도 높아지자 연구원들은 아주 일을 열심히했다.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 불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기만 제대로 부여되면 아주 열심히 일을 하는 근면한 민족이다.
 

1979년 KIST김장호 선임연구원이 국내 처음으로 개발한 전기자동차


연구성과내자 기업가 태도 달라져

KIST의 설립목적은 학문을 추구하는 것이라기 보다 학문을 토대로 우리나라 산업발전, 특히 공업화와 관련한 기술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기업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에게는 책임있는 연구 자세가 요구됐다.

그러려면 우선 연구를 할 수 있게 프로젝트를 따오는 장사꾼이 필요했다. 즉 연구소에 영업부 판매부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 역할을 기꺼이 맡은 사람이 당시 서울시 수도국장이던 최종완 박사였다. 과학기술도 두루 웬만큼 알고 장사에도 어느 정도 수완이 있던 그는 연구개발실장을 맡아 열심히 뛰어다녔다. 연구소를 소개하는 슬라이드와 책자를 만들고 백방으로 연구프로젝트를 팔러 다녔다.

하지만 당시 기업가들의 의식수준은 "일본에서 기능공 몇사람 데려오면 되지 연구는 무엇때문에 하느냐"는 식이었다. 그러니 기업이 자기 돈을 투자하고 본전을 찾으려는 기업가의 생리를 이용해 연구소를 운영한다는 방침에 많은 이들이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 연구소를 계약연구기관으로 하겠다고 밝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유로 반대했다. "선진국에서도 어려운데 어떻게 후진국에서 가능하겠느냐"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수지를 맞추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기업이 자기네가 필요한 기술을 스스로 개발하겠다는 참여의식을 갖는 것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연구결과를 반드시 이루는 책임있는 연구자세를 갖추는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어쨌거나 3년을 돌아다녔지만 의뢰받은 프로젝트는 몇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말 잘하는 사람이 돌아다녀도 소용이 없었다. 상공회의소에 기업가들을 모아놓고 연구소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겠다고 설명해보았자 돌아서면 "뭐하는 곳이냐"고 되물어올 뿐이었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신진자동차에서 일본의 도요타와 제휴해 자동차를 만드는데 부품들은 똑같은데 무슨 연유에선지 우리쪽 자동차의 엔진 수명이 짧은 거였다. 윤활유가 문제였다. 그래서 내가 신진자동차 사장한테 "윤활유 문제를 해결해주겠으니 2백만원만 투자해보라"고 제의했다. 그랬더니 "아니 무슨 돈을 들여서 연구를 하느냐" 고 하면서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연구를 하기로 했다. 이것이 첫 과제였다. 돈을 받고 연구해 결과를 갖다 주었지만 처음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윤활유 담당과장이 와서 그 보고서를 보고 경탄하자 그제서야 신진에서 태도가 달라지며 함께 연구를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68년 삼덕물산이라는 한 방직회사에서 20만달러나 들여 설치한 장치에 문제가 생겼다. 이걸 해결해달라고 감사를 통해서 요청이 들어왔다. 그래서 방직연구실 연구원, 기계연구실 연구원, 전자연구실 연구원에게 일을 시켰다. 결국 회수율을 100%로 높여주고 동대문에서 부품을 하나 구해다가 약간 개조해 더 나은 장치를 만들어 망해가던 그 회사는 기사회생했다. 이 회사 사장의 입을 통해 우리 연구소의 명성이 올라갔다. 그는 고마움의 표시로 연구소 앞을 지날 때마다 연구소를 향해 절을 하곤 했다.

연구 얘기만 꺼내면 얼굴을 돌리던 한 유명한 제약회사 사장이 어느날 로열티 문제로 급해서 내게 달려왔다. "중간재를 대주던 외국 회사에서 공급을 중단해 당장 회사가 문을 닫게 생겼으니 중간재를 합성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화학연구실에 이 연구를 의뢰해 외국 비용의 1백분의 1 가격으로 합성해 제약회사에 공급해주었다. 곧 망한다던 제약회사가 더 사업이 번창하니 다른 제약회사에서 주목할 수 밖에. 그리고는 그 원인이 KIST 덕분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너나 할것 없이 연구소로 몰려왔다.

그래서 화학연구실의 경우 금방 연구원이 40명으로 불어났고 실장은 돈방석에 앉게 됐다. 당시 연구실은 연구실장이 관리하면서 자기가 돈을 벌어 운영하게 돼있었기 때문이었다. 3년간 돈을 벌 때까지 연구소에서 돈을 대주고 반드시 그 돈을 갚도록 했다. 화학연구실은 이 사건으로 자립하고도 남았다. 다른 연구실장들은 프로젝트 맡기가 어려워 하는 수없이 대학으로 간 경우도 있었는데···.

설립 5년째 되면서 연구계약고가 1천만달러를 넘어 본궤도에 올라섰다. 70년대는 2천만달러가 되어 정부에서 돈한푼 안줘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계약연구제는 이렇게 자리를 잡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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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기획

    박진희 자유기고가
  • 사진

    K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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