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으로 과학적인 모습을 띤 연장이나 방법을 이용하는 것을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과학자는 아닐 것이다. 내가 말하는 과학자란 과학적인 지성이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과학자의 위치는 어떠한가? 과학자들은 자기가 이룩한 업적이 인간의 경제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공헌해 왔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는 편이다. 한편 그는 자신의 과학적 업적이 정치권력을 쥔 도덕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인류에 대한 하나의 위협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고민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또한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진 공업기술적인 여러 방법으로 말미암아 경제력과 정치권력이 소수 사람들에 집중되었으며, 이들이 대중의 생활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대중들은 더욱 더 특징 없는 존재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욱 우려할 일은 그러한 집중의 결과 과학자가 경제에 종속되어 과학자의 내부로부터 독립이 위협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학자는 지적, 심리적으로 독자적인 개성을 계발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과학자는 정말 비극적인 운명을 경험하고 있다. 뚜렷한 사상과 내적인 독립을 위해 성실하게 싸우면서 과학자는 여러가지 연장을 만드는데 진력했지만 이것들은 오히려 과학자를 노예화 하고 그의 내부를 파괴하는데 쓰이고 있다. 그는 정치권력을 잡은 사람이 물린 재갈을 뿌리칠 수 없다. 한 명의 병사처럼 그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고 남의 생명도 파괴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런 희생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각 민족국가들의 손아귀에 모든 경제력, 정치권력, 군사력이 집중되는 방향으로 역사가 발전해 온 이상 전세계의 파괴가 피할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있다. 비록 과학자는 폭력적인 방법을 영원히 제거해야만 인류가 구제받을 수 있음을 깨닫고 있지만 각 민족국가가 그에게 뒤집어 씌운 노예신세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더우기 그는 인류 전체의 파괴수단을 완성시키는 일에 고분고분 협력한 정도로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정말로 과학자가 빠져나갈 길은 없는가? 과연 그는 이 모든 모욕을 눈감고 감수해야만 할까? 과학자가 자신의 내적자유와 독자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연구업적으로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할 기회가 있었던 시개는 영 가버리고 말았는가? 자신의 연구활동을 너무 지식에만 치중하느라 책임과 품위를 잃은 것은 아닐까? 이 모든 의문에 대해 나는 선천적으로 자유롭고 양심적인 한 인간을 파괴시킬 수는 있지만 이러한 개인은 결코 노예가 될 수도 무모한 도구로서 사용될 수도 없다고 확신한다.
만일 과학자가 오늘날 자기 앞에 놓인 상황과 임무를 성실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생각할 시간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알맞게 행동할 수 있다면 현재의 위험한 국제 정세를 만족스럽게 해결할 서광이 비칠 것이다. (이 글은 1950년 이탈리아 과학진흥협회 제 43차 회의에서 발표된 글의 발췌요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