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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칩인가, 칩이 나인가 휴먼 온어 칩(Human on a chip)!

평소 고혈압 약을 복용하던 50대 남성 A씨. 어느 날 새벽 갑자기 심장이 갑갑해짐을 느끼고 응급실에 실려 왔다. 급히 수술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 의사는 복잡한 CT 촬영 대신 A씨의 피 한 방울을 뽑아 칩 위에 떨어뜨렸다. 2분 뒤 의사는 그가 심장마비, 패혈증 쇼크가 아닌 뇌졸중이라는 진단 결과를 얻었다. 곧바로 뇌혈관을 막고 있는 피떡(혈전)을 녹이는 약물치료에 들어갔다.


피 한 방울로 모든 질병을 본다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수 년 내에 실제로 응급실에 적용될 수 있는 랩 온어 칩(lab on a chip) 기술이다. 랩 온어 칩은 각종 바이오센서를 칩 위에 오밀조밀하게 배치한 진단 기기다. 정식 명칭은 미세유체제어(microfluidics) 기반 바이오칩. 극미량의 시료만 있으면 전처리, 혼합, 반응, 분리, 분석 등 실험의 전 단계를 하나의 칩 위에서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랩 온어 칩의 가장 큰 특징은 분석 시간이 짧고 시료가 적게 든다는 점이다. 응급 상황 시 환자의 상태를 랩온어 칩으로 대략 파악하고 세부 검사나 치료에 돌입할 수 있다. 골든타임을 절약하는 셈이다. 또 여러 가지 시료를 한꺼번에 분석할 수 있고 휴대가 용이하다. 학술지 ‘네이처’는 랩 온어 칩을 ‘맥가이버 칼’에 비유하기도 했다.

랩 온어 칩 기술은 최근 들어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국내만 봐도 2014년에 나노엔텍에서 혈액 한 방울로 전립선, 갑상선 질환의 유무를 알아낼 수 있는 랩 온어 칩을 개발해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다. 랩 온어 칩으로 알츠하이머 발병 여부를 분석하려는 연구팀도 있다. 김영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 박사팀은 혈액 속의 베타아밀로이드의 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랩 온어 칩을 개발 중이다. 베타아밀로이드는 신경세포를 파괴해 기억을 지우는데, 양이 워낙 적어서 일반 조직 검사나 양전자단층촬영(PET)을 통해서는 검출하기가 어려웠다. 연구팀은 올해까지 임상실험을 완료하고 기술이전을 거쳐 상용화하겠다는 계획이다.

한편 랩 온어 칩이 바이러스 진단에 활용되기도 한다. 에볼라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을 일으키는 심각한 바이러스의 경우 언제 어디서나 즉각 바이러스를 확인하고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추진하는 바이오나노헬스가드연구단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바이러스를 포착해 걸러내고 PCR 분석을 하지 않고도 종류를 알아낼 수 있는 랩온어 칩을 개발하고 있다.


 
심장, 간, 폐를 작은 칩 위에
여기서 끝이 아니다. 랩 온어 칩 기술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올갠(organ) 온어 칩’이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2012년 1320억 원의 예산을 들여서 인간의 몸을 칩 위에 구현하는 플랫폼 사업을 제안했다. 이때 전 세계에서 12개 팀이 심장, 간, 신장, 폐, 심지어는 뇌까지 칩 위에 옮기는 모험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인간의 몸 전체를 만드는 것, 즉 ‘휴먼 온어 칩’이다.

미국 하버드대 위스생물공학연구소가 개발하고 있는 ‘렁(폐) 온어 칩(lung on a chip)’은 2010년 ‘사이언스’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이 논문의 제1저자는 지금은 미국 펜실베니아대 조교수인, 허동은 당시 위스생물공학연구소 연구원이었다). 연구팀은 ‘폴리디메틸실록산(PDMS)’이라는 합성수지를 이용해 칩을 만들었다. 두께가 10㎛(1㎛·100만 분의 1m)인 PDMS 박막 양면 중 한 쪽에는 폐 세포를, 다른 한쪽에는 모세혈관세포를 배양했다(자세한 작동 원리는 144쪽 참조). 렁 온어 칩은 간단했지만 폐의 핵심원리를 잘 구현하고 있었다. 전누리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폐는 팽창했다 수축하는 성질이 있는데 PDMS는 신축성이 있어서 이런 움직임을 잘 흉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과거 평평하고 딱딱한 유리표면에 폐 세포를 키워 실험할 때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전 교수는 “렁 온어 칩은 투명하기까지 해서 폐에 들어간 나노 입자가 세포에 어떻게 달라붙고 흡수되는지, 침투한 박테리아가 백혈구에 어떻게 잡아먹히는지를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심장도 칩 위에 올라간다. 심장은 심근을 흥분시키는 전기 자극을 만들어내고 이것을 통해 자율적으로 수축하는 특수한 신경조직이다. 하버드대 위스생물공학연구소 질병생물물리학 그룹의 애나 그로스버그 연구원팀은 2011년 11월 학술지 ‘랩칩’에 ‘하트(심장) 온어 칩(heart on a chip)’ 개념을 제시했다. 연구팀은 PDMS로 된 얇은 기판 위에 심장 근육세포를 배양해 근육박막(MTF)을 형성했다. 그리고 여기에 전기 자극을 가해 전기 자극과 심장 수축 정도의 상관관계를 근육박막이 휘는 각도를 측정해 정량화했다.

2007년에는 한국계 미국인 과학자인 루크 리(한국이름 이평세) 미국 UC 버클리 교수팀이 ‘리버(간) 온어 칩(liver on a chip)’을 발표했다. 리 교수는 랩 온어 칩 연구를 초창기부터 이끌어 온 이 분야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는 칩 위에 세포를 키울 때 단순히 단백질만넣을 것이 아니라, 신선한 혈액을 공급해서 세포에 영양분과 산소 교환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랩 온어 칩의 핵심 개념을 2005년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정맥과 간문맥을 연결하는 3차원 간세포 조직을 칩 위에 구현했다. 간세포 조직 사이에 영양소와 산소를 공급하는 수송채널을 함께 구현한 결과, 그렇지 않을 때보다 간세포가 훨씬 밀도 있게 자라고 활발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국내에서는 전 교수가 피부에 있는 미세혈관이나 모세혈관을 칩 위에 배양하는 데 성공, 가장 최근에는 2015년 ‘플로스원’등에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탯줄에서 떼어 낸 표피세포는 칩 위에서 스스로 자라면서 지름이 30~50μm 정도 되는 관으로 성장했다. 전 교수는 이 혈관이 개미굴처럼 3차원 형태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동안의 혈관 세포는 배양접시와 같은 2차원 유리판 위에서 만들어졌다. 그렇다보니 실제 혈관과 모양과 기능이 완전히 달랐다. 세포가 자라는 환경에 따라 표현되는 유전형이나 세포의 움직임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전 교수는 “체내 물질 대사는 대부분 농도 차이에 의해 일어나는데, 혈관이 3차원이어야 이것을 모방할 수 있다”며 “암 연구를 할 때도 암세포가 혈관벽을 어떻게 뚫고 퍼지는지, 이때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알아내려면 혈관을 잘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3D 프린팅 기술이 발달해 여러 가지 세포를 찍어낸다곤 하지만 혈관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랩 온어 칩이 유일하다.

혈관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세포에 원하는 물질을 전달할 때, 그리고 장기와 장기를 서로 연결할 때 혈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 교수는 랩 온어 칩을 혈관이 복도(통로)처럼 연결된 ‘아파트’에 비유했다. 그는 “작은 암 조직만 보더라도 암 세포가 있고, 관련된 면역 세포가 있고, 아교세포, 혈관세포 등이 마치 아파트 주민처럼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며 “각 집에 있는 세포들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니터링 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설명했다.


 
동물 실험 대신할까
올갠 온어 칩 기술은 제약회사에서 특히 관심이 많다.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동물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독성과 안전성 검사가 필수인데 이때 막대한 비용이 든다. 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보통 10년, 8000억 원이 소요된다. 리 교수는 “올갠 온어 칩이 이런 시간과 비용을 확실히 줄여놓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물 실험은 의약계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동물은 인간과 세포의 비율 자체가 다르고 면역 시스템도 달라서 실험 결과가 정확하지 않았다. 전 교수는 “쥐 실험에서는 잘 작동하던 항암제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선 독성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었다”며 “이런 경우 실험을 처음부터 다시 한다”고 했다.

하지만 올갠 온어 칩은 이런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한다. 가령 타이레놀과 같은 약을 복용하면서 술을 마시면 간에 얼마만큼의 부담이 가는지, 약효는 어느 정도 나타나는지를 칩 위에 인간의 간세포를 직접 키우면서 모델화할 수 있다. 피부질환을 개선하는 약물을 개발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피부세포와 미세혈관을 그대로 재현한 칩에 약물을 투여하면 어느 때보다 약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폐로 흡입하는 약물의 경우, 이것이 폐의 움직임에 따라 어떻게 이동하는지 관찰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앞으로는 이런 올갠 온어 칩을 환자 본인의 줄기세포로 키워 만들 수 있다.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가 동물실험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분위기에서 올갠 온어 칩은 실험동물을 보호한다는 의미도 있다. 실험을 무한히 반복할 수 있고 과거에는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조건의 실험이 가능하다.

물론 올갠 온어 칩이 상용화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살아있는 세포와 움직이는 유체를 다루는 작업인 만큼, 기술적인 장벽이 높다. 올갠 온어 칩 분야에서는 최근 PDMS를 능가하는, 생체에 대해 독성이 없는 천연 상태의 고분자 재료를 찾는 것이 이슈다. 콜라겐이나 해조류에 들어 있는 알기네이트로 하이드로젤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쪽에서는 뇌 신경세포와 같이, 연결부위가 엄청나게 복잡한 장기를 칩 위에 구현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브레인(뇌) 온어 칩’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알츠하이머의 치료제 개발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혈관 세포가 칩 위에서 스스로 자라면서 혈관을 형성하는 것처럼, 신경세포가 스스로 칩 위에서 복잡한 신경망을 형성하도록 하는 방법이 유력하다.

리 교수는 중국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속한 연구실을 비롯해 랩 온어 칩 분야 전반에 중국인 과학자 수가 급격히 늘었다는 것이다. 리 교수는 “랩 온어 칩이 바이오의약 분야 실험 환경을 완전히 바꿀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며 “다른 나라가 앞서가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과감한 투자로 기술을 선도해야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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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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