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에서 커피까지,제주도는 열대과일 재배의 실험실이 돼가고 있다.
열대식물의 재배조건과 제주도의 기후
가령 온도와 습도 햇볕 등을 인공적으로 적절하게 조성해준다면 남극이나 북극의 얼어붙은 땅에서도 갖가지 곡식과 꽃 나무들을 훌륭하게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물을 끌어대 사막을 옥토로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이다.요컨대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주면 전혀 새로운 종류들도 재배·번식이 가능한 게 요즘 세상이다.
물론 이같은 '인공을 가하는 식물재배'를 하려면 그에 따른 경제성이 있어야 한다. 경제성만 맞출 수 있다면 오늘날 크게 발달한 시설재배기술수준으로 얼마든지 색다른 식물을 다양하게 키워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라고 해서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과일을 재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겠다. 특히 제주도처럼 아열대성의 기후를 보이는 곳이라면 조금만 노력을 기울여도 훌륭한 열대식물재배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몇년 사이에 제주도의 서귀포를 중심으로 바나나와 파인애플 키위 등 열대성식물이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때늦은 감마저 있다.
과연 주어진 환경조건을 어떻게 이용해서 열대성 과일과 식물들이 제주도에서 재배되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열대식물들은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자라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 대표적인 식물이라 할 바나나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바나나의 생육에 적합한 온도는 섭씨 27~30도이고, 최하 12도 이상을 유지해야만 영양분의 이동을 막을 수 있다. 이 온도의 유지야말로 바나나재배의 필수조건인 셈이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남단 해상에 떨어져 있고 연안을 난류가 흐르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적은 해양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열대식물이 집중적으로 자라고 있는 서귀포일대는 연평균기온 섭씨 16도, 1월평균기온 6도, 8월평균기온 26.6도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바나나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11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 비닐하우스를 3중으로 설치하고 열풍기로 더운 바람을 불어 넣어 주는 가온(加溫)재배방식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4월~10월은 무가온재배가 가능하고, 특히 가장 더운 때인 7월~9월중순 사이에는 비닐하우스도 필요없는 노지재배가 가능하다.
온도와 함께 중요한 것은 습도다. 강우량이 많아 토양습도를 65~75%로 유지해야 열대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서귀포는 연평균강우량 1천6백88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다. 따라서 습도유지에는 별 문제가 없다. 다만 건조한 겨울철에 살수기를 이용해 물을 뿌려주면 적절한 토양습도를 유지시켜줄 수가 있다.
일조량도 중요한 재배조건이나 이점에 있어서는 조건이 좋지 않다는 게 농민들의 얘기다. 특히 장마철이나 겨울철에 일조량이 크게 부족한데 인공적으로 조절해주기에는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 그래서 바나나의 개화시기를 일조량이 가장 많은 때인 7월말에서 9월중순경으로 맞추고 있다.
온도 습도 일조량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람이다. 바나나는 잎사귀가 매우 크고, 줄기는 잎사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위장줄기인데 한꺼풀씩 벗겨내면 아무것도 안남는 매우 부드러운 상태다. 뿌리 역시 얇은 육질근(肉質根)으로 분포돼 바람에 약하다. 따라서 풍속이 매초 20m를 초과하면 잎사귀가 파열되고, 잎줄기가 부러지며 심지어는 뿌리가 뽑히는 수도 있다.
제주도는 매해 8,9월이면 태풍이 불어오므로 바나나재배에 매우 중요한 고비가 된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방충망(구멍이 뚫린 비닐제품)을 설치해야 한다.
바나나를 재배하는데 유리한 토양은 중성이다. PH 5.5~6.5(약산성)에서도 가능한데, 강한 산성토양은 바나나에 불리하며 파나마병(黃葉)을 일으키기 쉽다. 제주도지역은 화산회토로 인해 산성토양이 많으므로 퇴비 등 유기질비료를 충분히 넣어주어야 한다.
아뭏든 제주도는 바나나재배조건에 다소 부족하기는 하나 그런대로 가능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는 셈이다. 제주도에서도 한라산북쪽의 제주지역보다는 남쪽기슭인 서귀포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바나나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기후조건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서귀포가 위도상으로 남쪽인데다가 연평균기온이 제주시보다 2도가량 높으며 일조량도 훨씬 많다. 그리고 겨울철에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북서풍을 한라산이 막아주고 있기 때문에 서귀포지역이 유리하다.
현재 제주도에서 재배되는 바나나는 대만에서 들여온 것으로 다프 차이나(dwarf china)품종이 대부분이다. 이 바나나는 온실재배에 적합한 품종으로 바나나중에서는 난장이 그룹에 속해 키가 3m정도에 불과하다.
파인애플과 그밖의 열대식물들
바나나와 함께 제주도의 열대성 과일을 대표하는 것이 파인애플이다 파인애플은 바나나와는 달리 고온에서 자라되, 습도를 크게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재배되고 있는 파인애플은 추위에 견디는 힘이 큰 품종이어서 바나나보다는 열관리가 편한 게 특징이다.
따라서 파인애플은 5월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 노지상태에서 자라고, 나머지 기간에만 2중의 비닐하우스를 설치해주면 된다. 또 파인애플은 높이가 70~80cm에 불과하므로 비닐하우스를 높다랗게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이 있다.
파인애플 역시 바나나처럼 서귀포 부근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는데, 재배역사는 바나나보다도 오래돼 15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말하자면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재배에 성공한 열대성 과일인 셈이다.
제주도에는 바나나·파인애플 이외에도 열대성 과일이나 식물들이 많다. 대부분이 시험재배단계이긴 하나 무려 40여종의 갖가지 열대식물들이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테스트되고 있는 것이다. 제주대부설 아열대농업연구소와 극소수의 농민들에 의해 재배되고 있는 열대식물은 약40여종에 이르는데, 망고 체리모야(나무토마토) 구아바 레이시커피 파파야 바바코 등은 비닐하우스안에서, 훼이조아 오렌지 키위 등은 노지에서 각각 재배되고 있다.
이들 열대식물들은 대부분이 과일인데, 특히 키위는 몇해 전부터 전국에 선을 보인 아열대성 과일로 맛이 매우 좋다는 평을 듣고 있다.
제주대 아열대농업연구소의 김용호연구원은 "40여종의 열대성 식물을 2, 3년 시험재배해오고 있는데 이중 몇종류는 재주도 에서도 충분히 대량재배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현재 시험재배단계에 있는 것들 중 일부과일들은 국내의 몇몇 특급호텔을 통해 미식가들의 구미를 돋구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마도 90년대에 가면 제주도가 열대성 과일의 보고가 되리라는 전망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듯하다.
제주도에서 열대성 과일이 점차 많이 생산되자 일부에서는 과연 '맛'에 문제가 없겠느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바나나를 놓고 의견들이 많은데, 이에 대해 재배농민들은 바나나의 익은 정도나 신선도면에서 국내에서 생산한 게 월등하다고 주장한다.
서귀포에서 바나나를 재배하고 있는 김창준씨(바나나협회장)에 의하면 바나나는 대개 80~90%쯤 익은 상태에서 후숙(後熟)시켜야 제맛이 나는데, 수입바나나는 60~70% 익은 시점에서 따가지고 우리나라까지 오므로 맛과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뭏든 제주도의 열대성 식물, 그중에서도 과일은 특유의 환경조건을 십분 이용해 성공적으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는셈인데, 이같은 평가는 재배면적과 생산량을 살펴보면 쉽게 입증된다.
70년대말에 처음 바나나재배가 시작된 이래 83년 15명의 농민이 9천6백여평에서 10t의 바나나를 생산했으나 작년에는 1백65명이 25만평에서 4백t을 생산했다. 올해는 더욱 늘어 40만평에서 약2천t을 생산할 것으로 전망된다. 파인애플의 경우는 바나나보다 더욱 많이 생산돼 생산량이 3천t을 웃돌고 있다.
한반도의 대륙성기후와는 달리 해양성기후의 특징을 가진 제주도, 특히 서귀포일대는 아직은 열대식물의 실험실수준에 있지만 멀지 않아 바나나가 귤처럼 흔하게 되는 기적(?)의 근거지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