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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과학자들 기지개 켜고 일어서는 중

짧은 근대과학의 역사속에서 불모지로 남아있던 여성과학계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뿌리 깊은 편견을 딪고 일어서는 여성과학자들.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과학자는 누구일까? 천문우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최초의 여성우주인인 소련의 '발렌티나 테렉코바'를 들겠지만 역시 우리에게 친근한 사람은 '퀴리'부인이다.
 

폴란드 태생의 '마리 클로도스카 퀴리'가 금세기에 가장 위대한 과학자들 가운데 하나라는 데는 과학사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의가 없다. '마리 퀴리'는 1903년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방사능을 발견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탔고 1911년에는 라듐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다시금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퀴리'부인이 당한 여성차별


마침 프랑스 학술원 종신회원의 빈자리가 생겼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마리 퀴리'가 이 자리를 차지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안된다'였다. 이유는 '여자이기 때문'.
 

여성과학자 '마리 퀴리'가 당해야 했던 차별은 이것 만이 아니었다. 남편과 함께 첫번째 노벨상을 받았을 때 프랑스는 최고의 영예인 '레종 도뇌에르' 훈장을 '피에르 퀴리'에게만 주었다. '피에르'는 수상을 거부했다. 또 '마리 퀴리'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파리의 한 거리는 '피에르 퀴리가(街)'였다. 몇 해 뒤에 고쳐진 이름은 '피에르와 마리 퀴리가.'
 

'퀴리'부처에게 내려지는 일반적인 평가는 오늘날 여성과학자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같아 흥미롭다. 그 평가는 '피에르의 창조적 천재성과 마리의 놀라운 끈기 정확성 인내심이 결합됐다'는 것. 실상 '피에르'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연구에 끌어들인 사람은 '마리'였고, 연구와 실험이 난관에 부딪힐 때 종종 용기를 잃고 낙담했던 '피에르'를 북돋아 준 이도 '마리'였다.
 

과학계에 뿌리깊은 보수적 태도가 무너진 것이 극히 최근의 일이다. 미국에서 최초로 여성을 받아들인 공과대학은 '매사추세츠'공대(MIT)였는데,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내세웠던 독립선언 이후 1백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여성과학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두 여성 '마리아'와 '하이파샤'는 보통 최초의 여성과학자로 불린다. '마리아'는 뛰어난 기술적 재능을 가졌는데 이론적 실험적인 면에서 연금술의 기초를 다진 사람으로 평가된다.
 

'하이파샤'(370─415)는 4세기 고대과학의 부흥기에 가장 유명한 과학자로 수학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알렉산드이아'대학의 수학과 철학 교수를 지냈던 그녀는 증류수를 만드는 도구, 해수면 측정기, 액체 비중계를 발명하기도 했다. 그리스의 과학적 이성주의를 옹호하던 '하이파샤'는 예루살렘 '성 시릴'교회의 수도승 '따라볼린'에 의해 살해되었다.
 

퀴리부인

 

불모지,여성과학계


가부장적 봉건주의가 뿌리깊고 근대과학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에서 여성과학자를 찾으려면 해방 이후로 거슬러 올라와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과학교육을 한 곳은 숙명여자 대학교이다. 당시 전문대학이긴 했지만 1947, 48년 두 해에 걸쳐 모두 2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서울대학교는 1951년에 첫 자연과학 여자 졸업생을 내보냈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1954년 4명의 자연과학 여자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불과 30여년이 지난 1985년 자연계 여자 대학생 수는 4만9천7백96명에 달했다. 전체 자연계 대학생 수 33만6천6백24명의 14.8%에 해당하는 숫자다. 전체 대학생 중 여대생이 26.8%를 차지함을 볼 때 아직도 여자들이 문과계열을 선호한다고 하겠으나 아뭏든 여성과학자의 후보자는 엄청나게 늘어난 셈이다.
 

이렇게 자연계 여대생의 양적인 증가는 눈에 띄지만 본격적인 연구를 하는 중견 여성과학자의 수는 미미한 실정이다. '불모지'라는 수식어가 아직도 여성과학자 앞에 자연스레 붙는다.
 

한국 과학기술 단체 총연합회가 1983년 조사한 의학 분야를 제외한 기초 및 응용과학 분야의 여성 과학기술자의 수는 1백5명이다. 이들 중 88명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나머지 17명은 연구소 병원등에서 연구활동을 한다.
 

자연계 교수 1천6백82명 가운데 여자 교수는 91명으로서 겨우 5.4%를 차지한다. 게다가 여자교수들은 대개 여자대학교에 치중되어 있고, 시설이 좋고 경쟁이 심한 국공립대학의 자연계 교수는 거의 남자교수들로 채워져 있는 형편이다.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의 교수 27명 가운데 여자는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 그 실태를 입증한다.
 

연구소에서 응용과 개발연구에 종사하는 여성과학자의 수는 더 작다. 연구기관과 기업체를 합해도 여성과학자는 70여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책임연구원 실장급의 중견과학자는 10여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7년 이상의 실무경력과 이론이 겸비되어야만 응시자격이 있는 기술계 최고의 영예인 기술사 자격증을 딴 여성과학자의 수에서도 그 불모성을 엿볼 수 있다. 85년 말까지 배출된 기술사 4천3백2명 가운데 여성은 단지 9명. 이들은 대개 연구소의 중견 연구관이나 개인회사의 기술이사로 활약하고 있다.
 

다른나라 여성과학자들은 얼마나 활발히 활동할까? 영국의 경우는 우리와 비슷하여 자연계 대학교수의 5% 정도가 여성이라고 한다. 프랑스는 이보다 훨씬 나아서 자연과학 종사자의 31%가 여성이다. 보수적인 전임교수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여성과학자의 진출이 미미한 정도였지만 최근 여권운동의 신장과 함께 여성교수직 진출이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여성의 활약은 주목할 만하다. 소련의 과학연구원 중 40%가 여성이고 이 가운데 30%가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대학교수 중 10% 정도가 여자라고 한다. 또 중공의 경우는 중국과학원의 여러 연구기관에 종사하는 연구원 중 25%가 여자라고 하며, 헝가리와 폴란드의 경우에도 여성들이 각각 전체 연구원의 22%와 28%를 차지한다.

 

미래의 여성과학자들. 여성차별을 이겨낼 지식과 용기가 필요하다.


급증하는 내일의 여성과학자


불과 한 세대의 근대과학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여성과학자들이 수백년 동안의 끈질긴 투쟁을 통해 자신의 권익을 키워왔던 서구의 여성들과 같이 활약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 과학기술의 붐을 타고 여성과학자를 지향하는 젊은 층이 급격히 불어나고 있다.
 

제일 활발한 여성참여를 보이는 곳은 이학분야. 1985년 현재 전체 이학 전공 대학생의 43.4%를 차지하는 3만8천6백26명의 여대생이 과학미래의 꿈을 키우고 있다. 가정학 의류학 등을 제외한 순수과학 분야에서 여성이 가장 많은 과는 생물학과(40.1%)와 화학과(36.8%). 여성의 비율이 적은 과는 응용통계학과(11.6%)와 물리학과(13.4%)이다.
 

반면 공학분야에서는 여성을 찾아보기가 힘들어 진다. 전체 공학계 대학생 19만9천6백명 중 여자는 5천4백87명으로서 2.7%에 불과하다. 두드러진 현상은 많은 수의 여성이 전자계산학과로 몰린다는 것. 이 과에 재학중인 여대생은 1천9백여명으로 과원 10명 중 2명 꼴이다. 하지만 다른 분야로의 참여는 미미해 가장 여자의 수가 많은 건축공학과 전자공학과에도 그 비율은 4%를 넘지 못한다.
 

과학자의 주공급원은 대학원이다. 따라서 자연계 대학원의 석·박사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이 연구하고 있는가를 알아봄으로써 미래의 한국 여성과학계를 점칠 수 있다.
 

(표1) 석·박사과정의 여자 대학원생 추세
 

(표 1)은 1981년부터 85년까지 자연계 대학원생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추세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계 여자 대학원생이 차지하는 비율은 11%남짓 일정하지만 그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작년에 석사 및 박사과정을 이수한 여자는 각각 5백5명과 30명이다. 이 가운데 석사과정 이수자의 2백95명과 박사과정 이수자의 전부가 취업했다. 외국 유학자를 빼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과학기술계에 종사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성과학계를 빠른 속도로 성장시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성과학자의 증가추세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를 서울대 물리학과의 여자 석사학위 취득자 수에서 찾을 수 있다. 80년 이래 그 수의 추이를 보면 80년 6명, 81년 12명, 82년 27명, 83년 31명, 84년 30명, 85년 33명으로서 빠른 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배우자 선택이 중요하다


여성과학자가 아무리 양적으로 팽창한다고 해도 그들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모처럼 많은 투자를 해 얻은 인력을 사장하는 것이 된다. 여성과학자의 앞길에 놓인 가장 큰 장애는 사회적 편견. 남성 위주로 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열등하다는 의식과 가족과 사회로 부터 주입되고 있다는 것이 많은 여성과학자의 지적이다. '과학자란 애초에 여성에겐 적당치 않은 직업이다' '여자는 과학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고 추리력과 창조력이 부족하다'는 등의 선입견은 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과학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난관을 뚫고 과학계에 몸을 담게 된 여성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중 삼중으로 덮쳐드는 무거운 짐이다. 여성과학자는 전문적 직업인으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생 중 연구활동이 가장 왕성한 조교수 시절이 여성과학자에게는 출산기와 겹쳐 연구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가정에 돌아와서는 연구의 짬을 내기 힘들고 장기여행을 요하는 연구에는 애초에 손을 댈 수 없는 여성과학자에게 가사노동과 육아노동의 경감은 보통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런 짐을 더는 방법은 있다. 과학과 결혼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미국에서의 통계를 보면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과학자(40%)가 독신 남자과학자(12%)를 크게 앞지르고 있다고 한다. 1969년 '아스틴'에서 연구하던 미국의 여성과학자의 절반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 수월한 길은 과학자로서의 아내를 이해하는 남편을 얻는 것이다. 박영자(숙대 화학과)교수의 '기초과학에서의 우리나라 여성과학자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여성과학자의 배우자 절반 이상이 비슷한 전공이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부부 과학교수의 예로는 모혜정(이대·물리학)씨와 장회익(서울대·물리학)씨 백경현(서울대·화학교육)씨와 서정헌(서울대·화학)씨, 남정이(숭전대·화학)씨와 신국조(서울대·화학)씨, 고광희(충남대·화학)씨와 박준우(이대·화학)씨 등을 들 수 있다.
 

앞서 든 논문에서 박영자 교수는 여성과 학자에 대한 편견과 일반인의 이미지가 바르게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 여성의 직업선택 제한을 가하거나 직업의 목적을 낮추도록 여성들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하며 남성으로 하여금 남성자신에 대해서나 여성들에 대하여 좀 더 절도가 있고 서로 협조할 수 있도록 고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성과학자 단체 설립을 기대


정부는 '2000년대 선진 과학권 진입'을 국가발전목표로 내걸고 그 주역인 과학기술인력을 양성·확보하는 것이 선결요건임을 밝혔다. 그러나 15만명에 달하는 고급과학기술 인력을 확보하는 방안으로서 여성과학인력을 양성한다는 계획은 보이지 않는다.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제연합의 여러 특별기구가 모든 단위 사업마다 여성의 참여를 북돋우고 여성의 잠재력을 키울 수 있는 특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여성인력의 중요성에 눈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 과학기술 인력에 관해서는 아직 기초자료 조차 없는 실정이다. 한국여성개발원의 권영자(조사연구실장)씨는 여성 과학기술 인력 개발을 위한 사업이 88년이나 89년에 가서나 구체화될 것이라고 한다.
 

여성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서로간의 정보도 교환하고 결속된 힘으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성과학자 모임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한국여자의사회 대한약사회 대한간호협회 등 의약분야의 전문직 여성단체가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데 비해 여성과학자들은 바쁜 생활에 쫓겨 분산돼 있어 여성과학자들이 처한 문제를 지속적이고 계획적으로 해결해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각 학회마다 여성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여성과학자 단체가 설립돼 과학발전의 길에 여성도 당당히 한 몫을 할 날을 기대해 본다.

 

숙명여대 김명자교수

여자는 직관력에만 뛰어나나?

 

"한국의 여성과학자는 이중 삼중의 짐을 안고 있읍니다. 과학연구의 본업 말고도 가사노동과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이 여성과학자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지요"
 

그러나 세아이의 어머니이자 숙대 화학과 교수로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벌이고 있는 김명자박사(42세)의 얼굴에선 전혀 피곤한 기색을 찾을 수 없다.
 

1966년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를 졸업한 후 바로 도미, '버지니아'대학에서 반응속도론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교수도 고등학교 때는 오히려 문과 쪽에 흥미가 있었다 한다. 아버지의 권유로 자연과학을 택한 김교수의 과학사에 대한 관심도 이때부터 싹튼 것이라고.
 

"남성이 공간지각력에서 뛰어난 반면 여성은 직관적인 통찰력과 언어력이 우수하다는 통설은 여성이 과학분야에서 열등하다는 결론을 끌어낸 데 불과합니다. 물론 여학생들이 수학 공포증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인것 같지만 과학적 소양을 잘 깨우쳐 주기만 하면 끈질기게 파고드는 장기를 발휘해 여성도 과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밤을 새우는 실험에도 여학생이 더 열심이더라면서 김교수는 이렇게 강조한다.
 

김교수가 아쉬워 하는 것은 많은 투자를 해 길러낸 자연과학계의 여성인력이 제대로 활용 못되는 점. '이를 해결하려면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하겠지만 우성 여성과학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차별대우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강의와 집안일 그리고 자녀 보살핌으로 몹시 바쁘지만 김교수는 짬짬이 저작과 번역활동을 한다. '과학혁명의 구조'와 '엔트로피'는 잘 알려진 역서이고 비타민 농약 화장(化粧) 등 생활에 밀접한 분야의 저작이 많다. 지난 84년에는 제1회 과학저술상을 받았고 작년에는 과학저술 부문 과학기술진흥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캠퍼스 커플'이던 부군 최동식교수(고려대 화학과)의 격려와 협조가 큰 활력소라고 말하는 김교수는 '앞으로 과학역사 속의 여성' 등 과학사 분야의 논문을 써 볼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힌다. 과학을 지망하는 여학생들에게 권할 만한 분야로서 김교수는 환경과학 생명과학 전산 그리고 화학을 추천한다.

 

한국화학연구소 오세화박사

여성의 전문직으로 과학자가 최고


첨단기술로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는 정밀화학.
 

오세화 박사(43세)는 이 정밀화학 분야에서 선단을 달리는 중년 여성과학자이다.
 

"최근에는 1년 6개월 만에 폴리에스터 섬유의 형광염료를 기초원료에서 제품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읍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유기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오박사는 "박사 학위가 실력의 척도는 아니다"라고 못박는다. 박사 과정에서 배운 것은 문제해결의 방법을 얻는 기본적인 소양이라는 얘기다. "학위를 딸 틈이 없이, 경우에 따라서는 결혼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연구에 몰두하는 분위기가 되어야지요"
 

이런 다부지고 실제적인 태도는 고등학교 때부터 길러졌는 지 모른다. 이화여고 재학시 오박사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실력은 키가 10㎝만 컸어도 그 방면에서 대성했을 정도.
 

하지만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단다. "특히 화학에 남다른 재미를 느꼈어요. 결국 집안의 조언도 있고 해서 화학자로의 길을 택했지요. 과학적 적성을 찾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정부출연 연구소에서 최초의 여성 연구실장이라는 중책을 맡고있는 오박사는 "현재로서는 학교보다 연구소가 연구비 장비 분위기 면에서 낫고 기업체로 부터의 자극도 큰 활력소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성과학자로서 '남성 중심 사회'에서 겪는 어려움도 있다 "처음 실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도 여자라는 것 때문에 말이 많았읍니다. 흔히 여자가 일을 못하면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잘 하면 그 개인의 능력 때문이고요'
 

오박사는 '여자이니까…'하는 식의 묵시적 '혜택'을 받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당부한다 여성도 직업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 2∼3일은 출장을 가지만 생활이 그다지 바쁘지는 않다고 한다. 가사노동의 부담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날 때는 책을 읽는데 88권짜리 전집을 모두 읽은 일도 있다고.
 

지난 83년 정밀화학 부문의 과학기술 진흥 동백장을 받은 일도 있는 오박사는 여성의 전문직으로서 과학자 만한 것이 없다고 강조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섬유염색 가공기술의 성과를 거두는 것.

1986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조홍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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